34) 복합질문(複合質問)의 오류(fallacy of complex question)
어떻게 대답하든, 대답하는 사람이 수긍할 수 없거나 수긍하고 싶지 않은 점을 수긍하는 결과를 야기시키는 질문을 하는 오류이다.
즉 직설적으로 질문하는 부분과 감추어진 전제가 합성되어서 이루어진 질문을 할 경우를 말한다.
"이제 극렬분자들과 손을 끊었나?" "이런 굴욕적인 처우를 얼마나 더 오래 참을 작정인가?"
이런 질문은, 이런 질문들이 물어지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쟁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쟁점을 당연할 것으로 전제하는 복합질문들인 것이다.
이러한 복합질문이 물어졌을 경우에는 당연히 질문을 단순 질문으로 나누어 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왕 찰스 Ⅱ세는 언젠가 영국 학술원 위원들에게 "왜 물이 가득찬 그릇에 죽은 고기를 넣으면 물이 넘치고 산 고기를 넣으면 물이 넘치지 않는가?"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몇몇 위원들은 이 점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기발하지만 설득력이 없는 설명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왕의 물음이 복합질문인데도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헛수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한 위원이 실제로 실험을 해 보았다.
물론 죽은 고기를 넣든 산 고기를 넣든 물그릇의 물높이에 차이가 없었다.
35) 수레를 말 앞에 놓는 오류
[fallacy of putting the cart before the horse;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오류]
매사는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는데, 그 일의 순서를 혼동함으로써 저지르는 오류이다.
컴퓨터는 인간의 활동을 크게 돕는다는 뜻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컴퓨터가 인간의 정신 활동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지만, 전자기적 물리법칙에 따라 작동 되는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컴퓨터의 능력이 증대될수록 인간의 정신도 한낱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부각되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능력이 증대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의 정신활동을 모델로 하여 컴퓨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뒤집어 생각하는 사람이다.
즉 컴퓨터의 기계적 기능을 모델로 하여 인간의 정신활동을 보려는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이 진행된 순서를 혼동하는 것은 마치 수레를 말 앞에 놓고 마차를 몰려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36) 목욕물을 버리면서 어린애까지 버리는 오류(fallacy of throwing the baby with bathwater)
어떤 논증(견해, 이론, 계획)이 부당하다고 해서 그 논증의 모든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낙태는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린 생명이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논증은 연민에의 호소라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증이 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논증 전체를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이 논증은 "태아도 생명체이다"와 같은 중요한 주장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 경우 논증을 오류로 여겨 젖혀놓게 되면 논증의 핵심을 놓치는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37) 가정 망각의 오류(fallacy of ignoring the assumption)
어떤 주장이든지 그 주장이 참되기 위한 이유나 조건이 있게 마련인데,
이를 망각했을 경우, 이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나를 부도덕한 사람이라 비난하지 말라.
나는 도대체 도덕적이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원하는 대로 하는 사람의 행위는, 비록 부도덕할지라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정당화되지 않는 전제를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마치 문제되는 전제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논리를 전개해 나갈 경우에, 가정 망각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곧 가정내적 세계(假定內的 世界)와 가정외적 세계(假定外的 世界)를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들과 딸>이라는 연속극이 인기리에 방영되던 때 어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권사님이 매일 아침 새벽기도에서 울면서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후남이가 불쌍해서 죽겠습니다. 후남이가 잘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권사님은 연속극의 이야기가 연속극 내의 가정적 세계 이야기일 뿐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38) 가설과 사실을 혼동하는 오류(fallacy of confusing a hypothesis with a fact)
우리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가설 저런 가설을 던진다.
그런데 이 가설은 문자 그대로 가설일 뿐인데 이를 사실로 여길 경우에 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저 친구 나를 우습게 본다"고 단정하고,
이번 주말에는 데이트를 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변했다"고 지레 짐작하여 마음을 상한다.
이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설을 가설로 인지(認知)할 줄 알아야 하고 가설을 가설로 남겨놓을 줄 알아야 한다.
"저 친구 나를 우습게 본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를 가설이라고 인지하고,
가설은 단지 가설일 뿐이기 때문에 섣불리 이를 사실로 여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39) 실용주의적 오류(pragmatic fallacy)
단지 실용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주장을 참인 것으로 받아들일 경우 이 오류를 범하게 된다.
"당신은 그럼 아무 희망도 없고, 죽으면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하고 말하였을 때,
그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렇습니다"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숙이고 다시 걸터앉았다.
나를 불쌍히 여긴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로 생각된다는 것이었다. (까뮈, 『이방인』)
신부가 제시하고 있는 논증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써 완전히 끝나고 그래서 죽음 후에는 아무 희망도 없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써 완전히 끝나고 그래서 죽음 후에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은 잘못이다.
신부의 논증을 이와 같이 재구성해 놓고 볼 때, 우리는 신부가 실용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후의 삶이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허무감을 주고 이 허무감은 삶을 위해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사후의 삶을 인정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실용주의적 오류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p는 유용하다. p는 유용하지 않다.
-------------- -------------------
p는 참이다. p는 거짓이다.
실용주의적 오류로 인하여 철학사상으로서의 실용주의를 오류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구분하여야 한다) 실용주의적 오류는 어떤 명제의 참 또는 거짓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되,
유용성을 기준으로 해서 참 또는 거짓을 가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오류인 반면,
실용주의는 어떤 명제의 참 또는 거짓을 가릴 수 있는 기준으로서 유용성밖에 없다고 하는 철학 사상이기 때문이다.
40) 논점일탈(論點逸脫)의 오류
(무관한 결론의 오류; 논점 흐리기; fallacy of irrelevant onclusion; fallacy of red herring)
어떤 사람이 어떤 논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전제들이 사실은 다른 논점을 뒷받침하고 있을 경우에,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한다.
곧 제시된 논증 자체는 얼마든지 타당한 논증일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논증이 현재 문제되고 있는 결론이 아닌 다른 결론에 대해서만 타당한 논증이 되고 있을 따름이라는 점이다.
취한 상태에서 살인을 하여 재판을 받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해 변호사가 판사에게 호소한다.
알코올 중독은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변호사는 자신의 고객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코올 중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조처의 필요를 위해 변론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오류는 토론석상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의 입장이 불리하게 되고 이 불리를 정면으로 돌파해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할 때,
화제를 바꾸거나 지엽적인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방식으로 토론을 유도한다.
이 경우 "논점을 일탈하지 마시오"라든가 "논점을 흐리지 마시오"라는 경고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비형식적인 오류는 논점일탈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비형식적인 오류든지 논점일탈의 오류라고 칭하는 것은 어떤 논증을 오류라고 지적하는 정신에 위배된다.
어떤 논증을 오류라고 지적 하는 정신이 그러한 지적으로 인하여 그 논증이 오류임이 보다 선명하고 명쾌하게 드러나게 하여,
오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 할 때,
어떤 오류든지 그 오류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을 쓰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논증에 논점일탈의 오류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그 명칭보다 더 분명하게(자세하게) 그 논증의 오류임을 부각시킬 수 있는 명칭이 별도로 없는 경우에 한해야 할 것이다.
자 이제 언어적 오류 아홉고개만 넘어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