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원칙 혼동의 오류(fallacy of applying a wrong principle)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든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원칙을 적용한다.
문제는 주어진 상황에 여러 가지의 원칙이 적용 가능할 때, 어떤 것을 택하는 가이다.
원칙의 선택에 따라 행위도 달라지고, 행위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공화국』(Republic)에 나오는 문제 하나를 살펴보자.
어떤 친구가 나에게 무기를 맡기었는데, 그때는 정신이 말짱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맡긴 무기를 찾으러 왔을 때 보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어야 하는가, 돌려주지 않아야 하는가?
이러한 상황에 부딪치어 적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맡긴 물건은 주인이 원할 때 돌려주어야 한다는 원칙 외에 다른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두 원칙 중 어떤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올바른 정신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 (무기와 같은) 위험한 것을 주어서는 안된다라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앞의 원칙을 적용하여 무기를 돌려주게 되면, 원칙 혼동의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처해 있는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적용될 수 있는 원칙들 P1과 P2가 있고,
P1을 적용하는 것이 P2를 적용하는 것보다 적합하거나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P2를 적용할 경우 그 사람은 원칙 혼동의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보관할 물건을 주인이 원할 때 돌려주어야 하는 원칙보다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위험한 물건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기 때문에,
위 예의 경우, 무기를 돌려주는 것은 원칙 혼동의 오류를 범하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 물음이 하나 생길 것이다.
바로 여러 원칙들간의 우선 순위 또는 적합성의 결정 기준에 관한 물음이다.
어떤 상황 S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들이 P1과 P2라 할 때,
그리고 P1과 P2가 각각 각각 A1과 A2라는 다른 행위를 불러일으킨다고 할 때,
P1을 선택하여 A1을 행하느냐,
또는 P2를 선택하여 A2를 행하느냐 하는 것을 어떤 원칙에 따라 결정하는가?
이 제 3의 원칙을 결정하는 것은 행위자의 세계관, 인생관, 종교관, 가치관, 이념, 지적 능력 및 수준, 취미, 성격 등 여러 배경 조건들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러 원칙들간의 우선 순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세계관 등이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26) 의도 확대의 오류(intentional fallacy)
의도된 행위는 인과 계열의 어느 단계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올림픽 대로에서, 차들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보행 금지 노상에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들었다.
급브레 이크를 밟는 소리가 나고 덤프 트럭이 뛰어든 사람을 피해 강변 쪽으로 퉁겨져 나가더니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운전사와 동승한 운전사의 아버지는 익사하고, 길에 뛰어들었던 사람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벌금 몇만 원을 물고 풀려 나왔다.
두 사람은 생명을 잃고, 두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한 자는 버젓이 활보하다니!
이런 판결이 있을 수 없다.
그 자는 마땅히 중벌에 처해졌어야 한다.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 어떤 사람 H가 차들이 질주하는 강변 고속도로에 뛰어들었다.
나. H의 행위는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덤프 트럭의 운전사와 아버지가 익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 따라서 H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벌금 몇만 원을 물게 할 것이 아니라 중벌에 처해져야 한다.
이 논증은 타당성하지 않다.
전제를 받아들인다 해도 결론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H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중벌에 처해져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친 사람이 살인을 할 경우, 살인죄를 적용하여 감옥에 보내는 대신 정신병원에 보낸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의도된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다.
미친 사람의 경우, 그가 범의를 가지고 살인을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다.
H가 고속도로에 뛰어드는 행위는 그가 의도한 바일 수 있다.
그러나 지나는 차가 강물에 빠지도록 의도하고, 또 그 차의 탑승자들이 익사하도록 의도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행동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대한 분석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따라서, 고속도로에 뛰어든 것은 의도했지만 두 사람의 익사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할 때,
H가 고속도로에 뛰어든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하고,
두 사람의 익사 부분에 대하여는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논증은 H가 중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떻게 의도되지 않은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일까?
H가 두 사람의 익사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의도한 행위(고속도로에 뛰어듦)가 익사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익사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형식의 추리를 의도 확대의 오류라 한다.
이 오류추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다.
(1) A는 어떤 사람 H가 의도하는(바라는, 뜻하는) 행위이다.
(2) A는 B의 원인이다.
(3) 따라서 B도 H가 의도하는(바라는, 뜻하는) 행위이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한다. 그런데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네가 폐암에 걸리고 싶어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라고 친구를 윽박지르는 것도 의도확대의 오류를 범한 예에 속한다.
27) 원인 오판의 오류(fallacy of false cause)
단순한 사건의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오인하는 오류이다.
"검은 고양이가 내 앞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5분 후에 나는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따라서 내가 자동차 사고를 당한 것은 그 고양이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선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항상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아닌 것이다.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지는 수는 있지만, 까마귀가 날면 항상 배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