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살았는가? - 3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이론으로, 기독교의 진화의 처음 여덟 세기 동안,
기독교 예술에서 그린 것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는 양이었지,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카타콤의 그림들이건 기독교 무덤이건 십자가에 매달린 인간의 형상은 그려지지 않았다.
모든 곳에 양이 기독교의 상징으로서 그려졌다 --
십자가를 운반하는 양, 십자가의 발치에 있는 양, 십자가에 매달린 양의 모습이 그것이다.
어떤 그림들은 양이 인간의 머리와 어깨, 팔을 지니고 있고, 손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
인간의 형태를 취하는 과정에 있는 신의 양이다 --
십자가형 신화가 점점 현실적이 되어가는 것이다.
8세기가 끝나갈 무렵, 교황 하드리안 1세는, 6회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의 칙령을 확정하며,
이후로는 십자가에 매달린 양의 위치에 인간의 형상을 놓을 것을 명했다.
기독교가 고통 받는 구원자의 상징을 발전시키는 데 팔 백 년이나 걸린 것이다.
팔 백 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양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가 실제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면,
어째서 십자가 위의 그의 자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양에게 찬탈 당했던 것일까?
역사와 이성에 비춰볼 때,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 사건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해 보자. 만일 그리스도가 신약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기적들을 행했다면,
만일 그가 눈먼 사람의 눈에 빛을 주었고, 만일 그의 마법적인 손길에 의해 마비된 몸에 젊음의 활력이 생겨났다면,
만일 죽어서 썩어가던 사람이 그의 명령에 되살아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면 --
왜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고 싶어 했을까?
문명화된 사람들이 --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문명화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
선한 일을 하며 돌아다니는, 용서를 설교하며,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깨끗하게 고치고,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향해 그토록 강렬한 살의적인 증오를 가졌다는 사실 --
인류의 가장 고귀한 은인을 십자가형에 처할 때까지 진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다시 묻겠다 -- 이것은 역사인가, 아니면 소설인가?
사실이라고 주장되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설명은 마치 라자로가 되살아났다는 것이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명백한 진실은, 네 복음서들이 역사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그것들에는 모순들, 비현실적인 일들과 기적들, 그리고 터무니없는 일들이 넘쳐난다.
그것들 안에는 진실이라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는 반면, 거짓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은 상당히 많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출생,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일,
나병을 고친 일, 물 위를 걸은 일, 죽은 사람들을 살린 일,
숨이 끊어졌다가 부활한 일 등에 대한 설명은 이 세상에서 전해지는 그 어떤 이야기들보다도 거짓이다.
복음서들의 기적적인 요소들은 그것을 쓴 것이, 역사는 어떻게 써야만 하는지를 몰랐던,
혹은 자신들이 쓰는 것이 진리이건 아니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의 기적들은 고지식함 혹은 교활함에 의해 날조된 것들이고, 만일 기적들이 날조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역사 전체가 상상을 기초로 짜 맞춰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
유럽의 최일류 신학자들 중 한 명으로 스위스 취리히의 신약 해석학 교수인 Dr. Paul W. Schmiedel은
바이블 백과사전에서, 복음서들 안에 있는 것들 중 오직 아홉 구절만이 예수가 한 말로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 그리스도가 신화라는 학설을 주장하는 대표자인 Arthur Drews 교수는
이 구절들을 분석해서 쉽게 날조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보였다.
이들 구절들이 나머지 구절들만큼이나 비역사적이라는 것은 저명한 영문학자이며 예수가 결코 살지 않았다고 하는 John M. Robertson의 주장이기도 하다.
놀랄만한 폭로를 해야겠다.
신약 자체도 복음서들의 그리스도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가장 강력할 수 있는 증거를 담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의 서간들에 있는 증언은 예수의 생활 이야기가 날조된 것임을 증명한다.
물론, 바울이 실제로 살았다는 것도 확신할 수는 없다. 바울에 관한 구절을 바이블 백과사전에서 보자.
“나중에 그려진 바울의 그림은 그 세부 묘사에서 원본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용모는 전설에 의해 완성되어졌다. 명백한 사실은 날조에 의해 뒤섞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보다 고도로 발달된 기독교도들로 이루어진 찬양하는 무리들의 영웅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권위자가 바울의 생을 만드는 작업에, 최소한 부분으로나마, 날조가 행해졌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가장 유능한 기독교 학자들은 바울의 서간들 중 하나를 제외한 모두를 위작이라며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그것들의 작가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울의 존재 자체가 의심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논쟁의 목적을 위해, 바울이 정말로 살았음을, 그가 열성적인 사도였으며, 서간문 전체를 쓴 것이 그였음을 인정하려고 한다.
그러한 서간문들은 열 세 편이 있다.
그들 중 어떤 것들은 길다.
그것들은 가장 오래된 기독교 저술물로 인정되고 있다.
그것들은 복음서들보다도 훨씬 이전에 쓰여졌다.
만일 바울이 실제로 그것들을 썼다면,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가르침을 폈다고 되어 있는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이제, 만일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사실들이 기독교의 첫 번째 세기에 알려졌다면, 바울은 그것들을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 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음을 시인한다.
그리고 그의 서간문들은 그가 예수의 생애, 업적, 혹은 가르침 등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바울의 모든 서간문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출생에 관한 것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 사도는 예수가 세상에 온 방식이라 전해지는 경이로운 방식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 침묵에 대해, 정직한 설명은 단 한 가지만이 있을 수 있다 -- 바울이 글을 쓸 때에는 동정녀 출생 이야기가 아직 날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의 상당 부분들이 그리스도가 행했다고 전해지는 기적들에 대한 설명에 할애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의 열세 편 서간문들을 아무리 뒤진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그 어떠한 기적이라도 행했다는 아주 조그마한 단서조차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기적들에 익숙했으면서 -- 그리스도가 나병을 치유하고, 말할 수 있는 악령들을 쫓아내고, 눈 먼 사람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고, 벙어리들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심지어는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기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 바울이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것들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 상상이나 가는 일인가?
다시 한 번, 유일한 해결책은 바울의 서간문들이 쓰여지던 때에 예수가 행했다는 기적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직 날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과 기적들에 대해 침묵할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전혀 지식이 없다.
복음서들의 그리스도는 그 유명한 산상설교를 행한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 암송되고 있는 기도문을 알려 주었다.
바울은 그것도 전혀 들은 바가 없다.
그리스도는 비유로 가르쳤다.
바울은 그런 것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놀랍지 않은가?
초기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작가이며, 세계에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는데 그 누구보다도 공헌을 한 사람인 바울이 -- 물론, 만일 서간문들의 진위를 믿을 수 있다면 --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철저하게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열세 편의 서간문에서 그는 예수가 한 말을 단 한 마디도 인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전도사였다.
그는 개종자들을 모으러 다녔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으면서 선전에는 그것들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기독교 전도사가 중국에 가서 그리스도의 종교로 개종자를 모으기 위해 수 년 동안 힘들여 고생하면서, 단 한 번도 산상 설교를 언급하지 않고, 주의 기도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비유들 중 하나라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가르침에 대해 무덤과 같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기독교 교회가 수 세기 동안 가르치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인가?
오늘날의 교회는 동정녀 출생, 기적들, 비유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들에 대해 끊임없이 설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째서 바울은 그것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을까?
하나의 답만이 있을 뿐이다.
동정녀 출생, 기적을 행한 일, 그리스도의 설교는 바울의 시대에는 세계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직 날조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와 복음서들의 예수는 전적으로 다른 두 명의 존재들이다.
바울의 그리스도는 이상과도 거의 같다.
그는 생활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군중들의 추종을 받지 않았다.
그는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설교도 하지 않았다.
바울이 알았던 그리스도는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환영에서 본 그리스도였다 -- 사람들 가운데에서 설교하고 일한,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귀신이자 유령이었던 것이다. 이 환영-그리스도, 이 유령과도 같은 단어가, 복음서를 쓴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지상에 도래하게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로는 성령이 주어졌고 어머니로는 동정녀가 주어졌다.
그는 설교하고, 경이로운 기적들을 행하고, 무고함에도 격렬한 죽음을 맞이했고, 무덤에서 영광스럽게 되살아나 하늘로 승천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신약의 그리스도가 바로 그렇다 -- 처음에는 영이었다가 나중에는 기적적으로 태어나서, 기적을 행한, 죽음의 지배자이며 죽음이 정복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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