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유대인이었다고 생각되며,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 어부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사용한 언어,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사용한 언어는, 따라서, 아람어였을 것이다 --
그것이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사용된 언어이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 모두가 그렇다.
다른 언어로부터 번역된 것도 아니었다.
사 백년 전의 에라스무스(Erasmus) 이래로 모든 선도적인 기독교 학자들은 그것들이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졌음을 주장해 왔다.
이는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혹은 초기 기독교도들 중 어떤 인물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외국어로, 사실을 알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죽은 후 몇 세대가 지난 후에 쓰여진 외국의 복음서들인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예수가 살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증거인 것이다.
게다가 복음서들이 근거가 되기에는 너무 오랜 세대가 지난 후에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쓰여졌을 원래의 문헌들은 보존되지도 않았다.
이 세기에 쓰여진 복음서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유실되었거나 파괴되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복음서들은 그런 복음서들로부터 만든 복사본들의 복사본들의 복사본들일 것이다.
우리는 누가 이 복사본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며, 또한 정직하게 만들어진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가장 초기의 복음서들과 신약의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원고들 사이에는 삼백 년이라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원래의 복음서들이 담겨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 몇 세기 동안은 많은 복음서들이 유통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수는 위작들이었다.
이런 것들 가운데에는, “바울의 복음,” “바르톨로메오의 복음,” “유다 이스가리옷의 복음,” “이집트인들의 복음,” “베드로의 복음 혹은 회상,” “그리스도의 신탁 혹은 금언” 등, 기타 수십여 가지의 훌륭한 작품들이 있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신약 위경”에서 읽을 수 있다.
무명의 사람들이 복음서를 쓰고서 거기에 저명한 기독교 인물들의 이름을 달아서 마치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한 것이다.
사도들의 이름으로,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작품들이 날조되었다.
가장 위대한 기독교의 교사들은 신앙의 영광을 위하여 속이고 거짓말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쳤다.
일류 기독교 역사가인 Dean 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건한 사기는 인정되었고 공언되었다.”
Dr. Giles 목사는 다음과 같이 쓴다.
“당시 엄청난 수의 책들이 속이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Robertson Smith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벌의 견해에 맞게 창조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위조 문헌이 떠돌았다.”
초기 교회는 위조된 종교 저작들로 넘쳐났다.
이렇게 많은 양의 문헌들 가운데에서, 우리의 복음서들은 사제들에 의해 선택되었고 신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불려졌다. 이 복음서들도 역시 위조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확실한 보장은 없다. 이렇게 물어보자.
만일 그리스도가 역사적 인물이었다면, 그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문헌들을 위조해낼 필요가 있었을까?
실제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문헌을 위조해 낼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초기 기독교 위작자들은 기독교 주장의 근거가 약한 것임을 멋지게 증언하는 것이다.
위조된 것이든 진짜이든, 복음서들이 예수의 삶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살펴보자.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그의 계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치하는가?
마태오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 사십 한 세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루가는 오십 여섯 세대라고 한다.
그럼에도 둘 다 요셉의 계보를 일러주는 체 하며, 둘 다 세대들을 세어 나간다!
이것만인 것도 아니다. 복음사가들은 다윗과 그리스도 사이의 이름들에서, 두 개를 제외한 전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가치한 계보는 신약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영웅의 조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는지를 드러내준다.
만일 예수가 살았다면, 그는 반드시 태어났어야만 한다.
그는 언제 태어났는가?
마태오는 그가 헤로데가 유대아의 왕이었을 때 태어났다고 전한다.
루가는 퀴리노가 시리아의 총독일 때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이들 두 지배자들이 다스리는 동안 태어났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헤로데는 기원전 4년에 죽었고, 로마 역사에 퀴리니우스로 나오는 퀴리노는 그로부터 십 년 후에 이르러서야 시리아의 총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헤로데와 퀴리니우스 사이에는 헤로데의 아들인 아르켈라우스의 통치 기간이 고스란히 놓여져 있다.
마태오와 루가 사이에는, 따라서, 그리스도의 출생 시기에 대해, 최소한 십 년의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언제 그리스도가 태어났는가에 대해 전적으로 아는 바가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기독교들은 메시아가 지구에 나타났던 해에 관해, 서로 다른 근거로 백서른세 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의견들을 추측한다.”
생각해보라 -- 백서른셋의 서로 다른 해들, 그 각각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온 해로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장엄한 확실성인가!
18세기 후반이 되어갈 무렵, 학식 있는 예수회 수사 Antonmaria Lupi는 그리스도의 출생이 일 년의 모든 달에 할당되었음을 보이는 책을 썼다.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는 습관적으로 “나자렛 예수”라 불렸다.
신약의 작가들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이 그의 고향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했다.
공관복음들은 그가 생의 삼십 년을 그 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태오는 그가 미가서의 예언을 충족시키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그렇지만 미가의 예언은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것은 군사적 지도자의 도래를 예언한 것이지, 신성한 설교자를 예언한 것이 아니다.
마태오가 이 예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은 그의 복음이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의심을 강화시켜 준다.
루가는 그의 출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지게 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아우구스투스 시저가 명한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그 곳으로 갔다고 했다.
루가가 언급한 전국적인 인구조사에 대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로마 역사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인구조사가 정말로 있었다고 치자.
로마의 풍습은, 호구조사가 행해지면, 모든 남성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가장 혼자만이 보고를 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의 아내나, 혹은 다른 피부양인들이 그와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확립된 풍습 앞에서, 루가는 요셉이 호구조사를 위해 나자렛에 있는 자신의 집을 떠나서 두 지역을 건너 베들레헴까지 갔다고 선언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얼마 있지 않으면 아기를 출산할 자신의 아내 마리아를 대동해야만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분명 역사가 아니라 설화이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이야기는 그를 메시아로 삼고 다윗 왕의 후손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었다.
메시아는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Renan이 둘러가는 방식이라 했던 것에 의해, 그의 출생이 그 장소에서 있었던 것으로 해야만 했던 것이다.
왕도에서의 그의 출생은 명백히 소설적이다.
그의 집은 나자렛이었다. 그는 “나자렛 예수”라 불렸고 생의 마지막 해에 이를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제 의문이 생긴다 -- 그 시대에 나자렛이라는 고을이 있었을까?
신학자들이 쓴, 영어권에서 행해진 가장 훌륭한 바이블 참고 문헌인 바이블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예수의 시대에 나자렛이라는 고을이 존재했는지를 확실하게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나자렛이라는 고을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생에 관해 가정되는 사실들이 상상에 의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과 성인기를 보낸 고을이, 우리가 아는 한,
신화의 지도 위에만 존재했던 것이다.
신성한 인간의 실재를 증명하는, 이 얼마나 경이로운 증거인가!
그의 조상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고, 그의 출생 시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그가 태어난 고을의 존재마저도 심각한 의문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는 태어난 후, 루가복음에 기록된 단 하나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고,
그가 서른의 나이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그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다.
그가 열 두 살의 나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을 하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루가에 의해서만 전해진다.
다른 복음들은 그 토론에 대해 전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이 단일한 사건을 제외하면, 네 복음서들은 자신들의 영웅의 삼십 년에 이르는 삶에 대해 깨지지 않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만일 복음서들의 작가들이 그리스도의 삶의 사실들을 알았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 삼십 년에 이르는 삶에 대해 전혀 아무 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것일까?
어떤 역사적 인물의 삶이 삼십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진 게 전혀 없을 수 있을까?
만일 그리스도가 신의 화신이라면, 만일 그가 세상에 알려졌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면,
만일 그가 인류를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끄집어내기 위해 온 것이라면 --
사람들 가운데에서 보낸 처음 삼십 년 동안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었을까?
사실은 복음사가들이 전도 전 예수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아기 시절과 어린 시절, 그리고 청년기를 창안해 낼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에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가는 성전 사건을 씀으로써 침묵의 규칙으로부터 오래전에 벗어났다.
성전 학자들과 토론 이야기는 그와 관련된 모든 상황에 의해 신화적임이 증명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가 함께 있는 것으로 믿고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진술,
그가 자신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하루 동안 여행을 했다는 진술,
사흘 동안 찾아 헤맨 후, 그가 학식 있는 학자들에게 질문을 하고 질문에 답변을 하며 성전에 있는 것을 찾아냈다는 진술은 있었을법하지 않은 점이 어마어마하게 포함되어져 있다.
이에 더하여, 그 사건이 삼십 년에 이르는 침묵의 기간에 둘러 싸인 채 루가복음에만 유일하게 나온다는 사실도 있고,
거기에 더 더하자면 다른 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국가의 학자들과 토론을 한 어린 예수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있으며,
다시 더하자면 지적으로 가장 우수한 사람의 역할을 하는 진지한 사람의 앞에 아기가 나타났다는 있을법하지 않은 사실을 더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완벽하게 분명해진다.
복음서들은 그리스도의 생에서 삼십 년 동안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그 생의 말년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전도, 즉 그리스도의 공생활은 얼마나 오랫동안 행해졌을까?
마태오, 마르코, 루가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공생활은 약 일 년 동안 계속되었다.
만일 요한복음이 믿을만하다면,
그의 전도는 삼 년에 걸쳐 행해졌다. 공관복음들은 그리스도의 공생활이 거의 전적으로 갈릴래아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루살렘에는 딱 한 번, 죽기 얼마 전에 갔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노동의 장면이라는 면에서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절망적일 정도로 의견을 달리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공생활의 대부분이 유대아에서 행해졌으며, 그리스도가 여러 번에 걸쳐 예루살렘에 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갈릴래아와 유대아 사이에는 사마리아 지방이 놓여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전도 중 마지막 몇 주를 뺀 전부가 그의 고향 갈릴래아 지방에서 수행되었다면,
그 전도의 상당 부분이 두 지방이나 떨어져 있는 유대아에서 행해지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요한은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쫓아 낸 것이 그리스도의 전도 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는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전혀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성전 정화가 그의 전도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으며,
이 행위로 인해 그에게 사제들의 분노가 쏟아졌고, 그래서 그들이 그를 파멸시킬 방법을 찾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바이블 백과사전은 그리스도의 생에 발생한 사건들의 순서에 대해 복음사가들이 제시한 것은 모순적이고 믿을만하지 않으며,
복음서들의 연대기적 구조는 가치가 없고, 그 사실들은 “복음사가들이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관심이 부재한 채 쓴 것임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일 뿐이다”라고 확인해 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은, 그들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상상한 것을 쓴 것이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여러 번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성전에서 매일같이 설교했다고 한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으며,
열광적인 남자와 여자들의 무리도 역시 그러하였다. 한 편에서 사람들은 그를 위해 호산나를 외쳐댔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제들이 그와 토론에 임했으며 그의 목숨을 취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그가 권력층에 잘 알려져 있었음에 분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중 하나였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사제들이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에게 그를 배반하도록 뇌물을 주어야 할 필요는 어째서 생겨났던 것일까?
누군지 모르는 사람, 즉 신분이 불명확한 사람이나 숨어 있는 사람만이 배신을 당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매일같이 거리에 나서고, 매일같이 성전에서 설교하는 사람,
계속해서 대중의 눈에 노출이 된 사람은 어느 때라도 체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아는 선생을 배신하라고 사제들이 뇌물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배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공적인 형세에 대한 모든 주장들은 거짓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이야기보다도 더 있을법하지 않은 것은 없다.
로마 문명은 세계 제일이었다.
로마인들은 지금까지 알려졌던 세계의 변호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들이었다.
그들의 법정은 질서와 공정함의 전형이었다.
재판도 없이 형이 선고되는 경우는 없었으며,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집행자에게 건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는 무고한 사람이 본시오 빌라도가 판사로 있는 로마 법정에 불려왔으며,
그에 대해 그 어떠한 잘못의 혐의도 제시되지 않았고, 판사가 그를 무고하다고 선언했는데,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쳤기 때문에,
구경꾼들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빌라도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도 무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채찍질 하라고 내어주었고,
다시 십자가형에 처할 수 있도록 집행자에게 건네주었다는 말을 믿으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다!
티베리우스 시저의 시대에 로마 법정의 책임자가 어떤 사람이 무고한 것을 알게 되어 그렇게 선언하고,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가,
스스로 그를 고문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소리쳐대는 군중들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로마 법정에서 무고한 것이 드러났는데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것이 문명화된 로마의 그림인가?
그것이 온 세계가 그 법률을 본받은 로마란 말인가?
십자가형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역사를 읽는 것인가 아니면 종교 소설을 읽는 것인가?
역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3번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