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스테어님의 개독교 멸절론 (1996년에 쓴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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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0:56
저는 사랑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사랑을 희구하고 그것을 소중히 지키며 주위로 확산시키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기독교 문화권과 비기독교 문화권에 공통된, 전인류의 본능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독점할 자격이 없습니다. 헵시바님께서 올리신 세계를 품은 금주의 기도 중 첫 글을 읽어 보셨습니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언급함으로써 이슬람 특유의 형제애 개념에 대해 의문을 품도록 유도한다라는 그들의 섬뜩한 강령을 보셨습니까?
이슬람교의 형제애는 이름을 달리한 것일 뿐 기독교적 사랑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슬림들은 남의 종교에서 말하는 그 나름의 사랑을 깎아내리려는 비열한 의도를 품고 있지 않다는 정도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류는 기독교를 알기 이전에 이미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르시던 저의 할아버지께서도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었습니다.
이놈저놈 다 나서서 좋은 말은 앞다투어 독점하려는 풍토 속에 기독교회가 우리에겐 사랑이 있다!고 외쳐 본댔자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거기에 답해줄 수 있는 말은 사랑 없는 놈이 어딨냐?라는 정도일 뿐입니다. 기우이기를 바랍니다만 만에 하나 기독교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사랑마저도 부정한다는 비약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사랑은 기독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본능에 가까운 덕목이며 인류가 기독교로부터 사랑을 배운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보잘것 없는 인간들로부터 사랑을 배웠을 뿐입니다.
기독교가 멸절된다면 어떤 지고한 가치가 살아남을 것이냐... 라는 구절 역시 저로서는 그다지 설득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독교가 세력을 얻기 이전에도 지고한 것은 존재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끼니를 걱정하지만 끼니 이외의 진실에도 눈을 뜨고 있습니다.
우리는 코앞의 먹거리와 입성을 추구하듯이, 아니 그보다 더 절박하게 영원한 것을 희구합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마찬가지 입니다. 기독교가 멸절되면 모든 지고한 것이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발상은 그 모든 지고함이 기독교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세계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것은 기독교의 테두리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치 있고 행복하며 도덕적이고 경건하며 더우기 종교적으로 살고 있는 수많은 비기독교인에 대한 모욕에 불과합니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동기로 인해 기독교를 혐오하는가... 저에게 이렇다할 동기는 없습니다. 기독교를 알고 싶었고 그래서 교회를 다녔지요.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읽고 토론하고 때로는 가르치기도 하며 느꼈을 따름입니다. 어느날 돌아보았더니 저는 기독교를 혐오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의 무엇을 싫어하는가라는 질문이겠지요.
동기라는 어휘를 빌어 부적절하게 표현되긴 했지만 Gatsbi님께서 진정으로 의문스러워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권력 지향이 싫습니다.
2000년의 역사 속에서 늘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힘 없는 자를 핍박해 온 교회가 싫습니다. 그것에 대한 진지한 반성으로 일어난 민중신학마저 사갈시하는 그들의 이기는 편이 우리편 식의 처세술이 싫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유치한 세계관이 싫습니다.
유한 아니면 무한이죠? 분명히 무한은 아니죠? 그러니 유한입니다라는 투의 설익은 논리마저도 결론적으로 신앙을 지지하기만 하면 옹호하려 들고 허점이 많은 이론을 숙고해 보지도 않고서 진화론을 공격하는 데에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끌어들이는 결론 먼저, 검증은 그 다음 이라는 허접한 사변 철학이 싫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인간 모독이 싫습니다.
신의 영광을 더해주기 위한 존재로서의 가치부터 생각하는 인간관, 옹기장이의 변덕에 의해 맥없이 깨뜨려져야만 하는 질그릇 인간관, 그러면서도 너희들은 애초에 죄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내게 손을 내밀지 않으면 어디에도 구원은 없어라고 말하는 오만방자한 신과 그의 아들, 그로 인해 질박하게 살아가는 뭇 인간들에게 참아서 해결될 수 없는 죄의식을 덮어씌우는 인간관이 싫습니다. 인간은 신 없이도 존엄하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해악입니다.
저는 결코 기독교의 주변적인 해악을 때리지 않습니다. 기독교 보드에서건 어디에서건 저는 목사의 아들이 행패를 부렸다고 해서, 성직자가 부정 축재를 한다고 해서, 교황이 마약 장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기독교의 멸절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테두리 밖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기독교의 일부의 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기독교를 경계하는 이유는 그것이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깊은 숙고 없이도 확신할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서운 마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에 있다고 하는 근거 박약한 확신이 신앙인의 그릇됨을 부채질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선하고 또 어느 정도 악합니다. 모두가 지고지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으며 또한 그것을 감싸고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약하면서도 존엄한 존재입니다. 나는 이미 정결하니 이제 너희를 정결하게 해 주마라는 식의 세례 요한적인 오만한 확신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인간은 확신을 감히 내릴 역량이 없는, 불완전한 지성과 불완전한 덕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존엄합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끊임없이 반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반성의 능력마저 앗아가는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사소한 예를 보여드리지요.
십자군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창 끝을 돌려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방의 이단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단들이란 지상의 성 유물과 유적에 무관심하며 따라서 살육과 약탈로 점철되던 부도덕한 십자군 전쟁을 혐오하던 카타리 파입니다. 1209년 시토 대수도원의 아르노 아말릭 수도원장은 카타리 파의 도시 베지르를 침공했습니다. 베지르 시는 약탈을 피하기 위해 십자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지요.
군인들은 자신들의 주목적인 약탈을 못 하게 되었고 아말릭 수도원장은 그들에게 무언가 보상하기 위해 항복했다고 하지만 선량한 시민들 사이에 숨어 있을 이교도를 색출하여 죽여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군인들이 참된 기독교인과 이단을 구별하는 방법을 묻자 아말릭은 오늘날까지도 명성을 잃지 않고 있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모두 죽여라. 참된 기독교인은 하느님께서 알아보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의 평소의 모습과 기독교 보드의 글에서 괴리감을 느낀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착각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엇이 저의 평소의 모습인가요? 혹시 의대 시리즈를 비롯한 간지러운 글들이 스테어라는 실존의 전부를 표상한다고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더우기... 의대 시리즈 전체를 흐르는 주제가 무엇이던가요?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신에게 굴종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좋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실험용 생쥐나 이미 죽어 썩어가는 시체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권위에 대한 분노를 저는 의대 시리즈에서도 감추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는 폭력 구조(물리적 폭력과 철학적 폭력, 정서적 폭력 모두를 포함하는)에 대한 분노를 이곳에서 감추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인간들 나름의 사랑을 추구하는 저같은 못된 사람은 의대 시리즈를 쓴 사람과 같은 인간일 수 없다고 여기셨다면 그것 역시 당신의 기묘한 세계관일 뿐입니다.
기독교만이 사랑을 독점한다고 믿는 이들의 협애한 시각일 뿐입니다.
인간은 기독교의 테두리 밖에서도 사랑할 줄 압니다. 서울대의대 83학번이시고
서울대 공대를 또 다시 다니시고
뒤이어 카이스트를 졸업하시고
벤쳐기업 사장을 이끄시고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역임하시고...
음악반을 이끄시고
반기독운동에 10여년을 앞장서시고
더 더욱 반기독 저희에게는...
1994년부터 "개독박멸"을 외로히 외치신 분입니다.
듣기로는 "개독개혁"이 왠말이냐
"개독박멸"일 뿐이다 라시며
처음(?)으로 개독박멸을 외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