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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 - 잠새
거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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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9 10:47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인간 행동 양식이 아닐까 합니다...
이부분에 있어서는 저 역시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믿으라는 말을 합니다...
성경에서 제가 봤을 때 믿음에 대해 구체적인 표현으로 가장 잘 이뤄진 구절을 찾자면...
기독교인이라면 많이 들어봤음직한... 소위말하는 믿음장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믿음의 형태에 대한 설명이 계속해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집중하고 싶은 구절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첫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개혁개정)"
표준새번역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실상이라는 단어만 바탕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있고...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번역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을 뿐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이라는 부분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여하간 이때 말하는 믿음에 대한 부분은 결국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내가 경험하지 못한 대상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지도 못했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음에도...
이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이것을 언젠가는 경험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때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혹은 이성의 작용이 믿음이라는 측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 허무맹랑한 일이란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실증적인... 믿음의 대상에 대한... 논의 자체가...
이미 신이라는 대상은... 과학을 통해서는 논쟁 불가 판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존힉이 말했듯... 궁극적인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궁극적인 존재가 과연 인간의 인지 영역 속에서... 논리 영역 속에서...
이해 가능한 존재일까 하는 질문도 해보면서 말이죠...
그 뿐 아니라... 개종교에 들어가... 기독교의 경전에 나타나는 많은 신화적인 요소...
많은 설화들 속에 등장하는 비과학적인 이야기...
솔직히 말해서... 과학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기독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신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불교 뿐 아니라 유교, 도교와 같은 동양 종교는 물론이고...
힌두교, 이슬람교를 망론하고 신화적인 요소를 빼고는 더이상 종교라는 것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님께서 불교와 유교, 도교를 말씀하셨는데...
사실... 도교의 경우는 중국 샤머니즘의 이후 유교의 득세와 불교의 도입으로...
형태화됐을 가능성이 큰 종교였고...
유교의 경우도... 유학에서 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영향이 컸음을 무시할 수 없음을 기억할 때...
사실 종교사적인 뿌리를 찾자고 한다면... 불교가 가장 오래됐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존양성찰이라는 부분 역시...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의 부분과 많은 부분에서 상통하는 부분도 있고요...
도교의 부분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요... 쉽게 말해... 처음의 그것을 찾자는 것이 도교라고 한다면...
불교에서는 불성에 대한 성찰을 중히 여기는데... 이때 불성이야 말로... 태초의 그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는 도덕경의 문구 역시...
불교식으로 이해가 가능하겠죠... 도라는 문구를 불성으로 바꾼다면요...
공의 부분에서도 불교와 도교는 많은 부분 연결이 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이해되는 공과 도교에서 이해하는 무... 이 둘은 비슷한 모양을 띄고있기도 합니다...
어찌됐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상호 연관과 영향의 시작점이 어디였을까 하는 것을 생각했을 때는...
불교가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시작점이라 생각하고... 깨달음에 대해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는 깨달음이 불교의 궁극적 가치임을 충분히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길에는 많은 것이 있음을 님 역시 모르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법화경(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불경입니다... ^^;;)을 예를 들면...
약초유품에서...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달라지는 깨달음의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믿음과 유사한 형태의 깨달음을 길 역시 다른 부분에서 언급이 됩니다...
불교의 믿음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다른 것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나무 아비타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비타불(서방정토라는 낙원을 다스리는 부처)에게 귀의한다는 뜻으로... 쉽게 말하면... 아비타불을 믿고 따른다... 이런 의미이고...
많은 불경의 첫문장이라 할 수 있는... 여시아문이라는 문장 역시...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표현으로서... 불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밖에 없는 구조로의 참여를 유도합니다...
제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언급하며... 힌두나 이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기독교나 이슬람의 경우는 거의 유사한 형태의 종교라는 점에서 그러했고...
힌두교는 윤회라는 현대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신비가 핵심이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음을 기억했을 때...
동양에서 발생한(농사짓기 좋은 땅에서)... 불교, 유교, 도교의 경우는...
깨달음과 자아성찰이 중심이 되는 내용이기에... 믿음이 없다는 설명이 가능할 수 있어...
다음과 같은 믿음에 대한 설명을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종교에는... 각 종교의 대표할만한 이야기 구조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구조는 대부분... 신화적인 요소로서... 인간의 인지영역을 뛰어 넘은...
결국 믿음을 최종적으로는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한 포에르바하와 같은 비판을 하신다면... 이것에 대해서는...
사회학적인 새로운 이해를 논의해야겠지만...
종교 자체만을 놓고... 비교종교학(요즘은 이말도 잘 안씁니다... 종교간의 대화라는 말을 더 자주 쓰죠...)적인 입장에서 설명을 하고자 한다면...
종교의 본성은 어쩔 수 없는 믿음에 기인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님께서는 이 부분에서 오류가 생긴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또다시 나오게 되는 범주의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불교, 유교, 도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존양성찰, 좌망과 심재를 통한 제물...
이것은 각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물론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이 이뤄야 할 각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기독교를 예를 들면서... 믿음을 말씀하셨는데...
기독교에서 믿음이 궁극적인 목표일까 하는 질문을 해봅니다...
믿음은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일 뿐이지... 이것은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어찌됐건... 구원이 되겠죠...
즉... 님께서는 궁극적인 목표라는 범주와... 목표를 향한 길이라는 범주...
이 두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며... 각종교를 비교했다는 점에 있어서 오류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누미노제의 종교와 니르바나의 종교... 이 두 종교의 존재방식과... 구원방식의 차이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둘의 차이를 너무 잘 알기에... 궁극적 목표를 향한 두 길이 차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 궁극적인 목표와 목표를 향한 길의 차이는 더욱 확실히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