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개념 차이인 듯 합니다... 예수의 선포 내용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선포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의 선포는 정말 협의의 선포 개념입니다... 일반적으로 선포라함은 말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실제 우리에게 있어서 선포라는 개념은 말은 물론이고... 기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수단이 다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표정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선포의 광의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가 실제로 실천에 대한 것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실제 삶에 대한 강조점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실제 예수는 많은 비유를 통해 약자를 향한 인간의 당연한 자세에 대한... 강조들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Q문서를 찾아보면 이것이 없었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때의 예수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약자를 향한 관심은... 4복음서 전체에서 묘사된 것보다 적지만...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의 선포(협의)의 내용 속에 약자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의 선포(광의)는 동일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저는 christian이란 christ를 따르는 자들... 혹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 설명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christ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이 필요할 것이며... 이렇게 해석된 예수의 모습이...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때 제가 말씀드린 모습과 가르침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동시에 이것은 사랑의 실천과도 맞다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가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저의 설명의 부족이었는지... 이해차이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제가 분명히 두가지 개념의 하나님 나라를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 개념의 경우는 님 역시 이해하시는 바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두번째의 경우의 하나님 나라는 현세적이라는 단어 속에서...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듯했습니다... 현세적이라 했을 때의 이때의 하나님 나라 역시 아직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파괴를 말씀하셨다고 하셨죠? 종말을 말씀하셨다고 하셨죠? 틀린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창조 - 파괴 - 재창조라는 구조는... 힌두교의 브라마 - 시바 - 비슈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로 세계의 많은 신화 속에서는 종종 등장하는 구조이기도 합니다... 결국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이땅에 임하게 될)의 경우... 파괴 이후의 재창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할 것이라는 사실이며... 우리는 이를 위해 노력해야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에서의 차이입니다... 이때 제가 말한 노력이라는 것은 성화 혹은 신화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화의 개념은 성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사실 성화는 개인적인 측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성화라는 측면에까지 나아갑니다... 감리교에서는 칭의가 구원의 문턱이었다면... 성화는 구원을 위한 방에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완전)을 말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단어가 영화라는 단어입니다... 결국 사회 역시... 인간의 구원의 순차적인 이해와 같이 성화의 완전의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화된 인간들이 사는 사회... 이것이 결국 성화된 사회가 될테니까요... 그렇다면... 이때 성화가 과연 인간의 노력의 결과물이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안됩니다... 단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통해 일어난 것이 성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