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은 님의 말씀이고 - 이후는 저의 반론입니다.
1. 믿음에 대해서
a)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개혁개정)" (중략)
여하간 이때 말하는 믿음에 대한 부분은 결국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내가 경험하지 못한 대상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지도 못했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음에도 이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이것을 언젠가는 경험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때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혹은 이성의 작용이 믿음이라는 측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 허무맹랑한 일이란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 좋습니다. 님의 뜻에 동의하겠습니다. 한 가지, 지금 우리는 기독교의 신앙을 논하고 있는데, 이렇게 정의하면 먼 길을 돌게 됩니다. 님이 말씀하고 계신 믿음의 의미는 기독교 신앙을 염두에 둔다면 저와는 사뭇 다릅니다만, 여기서는 어쨌거나 지금은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간주하는 심리상태 쯤으로 합의해 둡시다.
b)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실증적인 믿음의 대상에 대한 논의 자체가...이미 신이라는 대상은... 과학을 통해서는 논쟁 불가 판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존힉이 말했듯 궁극적인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궁극적인 존재가 과연 인간의 인지 영역 속에서 논리 영역 속에서 이해 가능한 존재일까 하는 질문도 해보면서 말이죠>
- 종교에서 제시하는 궁극적 대상이 과학적 영역을 초월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과학적 증명을 요구하는 안티들에게도 누누이 강조해 온 바입니다.
문제는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왜 있다고 믿는가, 그 이유와 근거를 말하라?"입니다. 조건 없이 믿을 수는 있지만 아무것이나 무작정 믿을 수는 없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믿을만한 근거가 없으면 안됩니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종교의 신비적 요소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습니다. 모든 종교가 신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에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래쪽에서 논의할 것입니다.
c) <각 종교의 궁극적인 존재는 결국 모두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느냐...>하는 님의 이어지는 주장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유교의 천이나 불교의 불성이나, 도교의 도나...모두 기독교의 신과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전혀 동의하기 어려운데, 이를 밝히자면 너무도 광범위한 토론을 해야 합니다. 주제인 기독교의 신에만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님이 말씀하신 범주의 오류에 대해
< 이 부분에서 오류가 생긴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또다시 나오게 되는 범주의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불교, 유교, 도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존양성찰, 좌망과 심재를 통한 제물 이것은 각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중략)
그리고 님께서는 기독교를 예를 들면서... 믿음을 말씀하셨는데. 기독교에서 믿음이 궁극적인 목표일까 하는 질문을 해봅니다. 믿음은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일 뿐이지 이것은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어찌됐건 구원이 되겠죠. 즉, 님께서는 궁극적인 목표라는 범주와 목표를 향한 길이라는 범주. 이 두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며 각종교를 비교했다는 점에 있어서 오류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범주에 대한 오해는 제가 아니라 님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님처럼 말하자면, 불교의 목적은 성불이고, 유교의 목적은 천일합일이며, 도교의 목적은 정신의 절대적 자유인 제물입니다.
불교는 성불을 위해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님처럼 깨달음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 방법은 믿음이 아니라 수행입니다.
유교는 천인합일을 위해 존양성찰을 강조합니다. 천지의 화육에 동참하는 성인이 되기 위해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보존하고 기질적인 것에 이끌리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도교는 제물을 위해 좌망과 심재를 강조합니다. 일체의 편견이나 정신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체를 내버려 두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구원을 위해 믿음을 강조합니다. 구원이라는 것도 내용을 보면 문제투성이이지만 지금의 문제는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의미를 저 위에서 합의한 대로인 것으로 본다면,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깨달음이나 존양성찰이나 좌망과 심재는 님이 말씀하신 바 “내가 경험하지도 못했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음에도 이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이것을 언젠가는 경험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때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혹은 이성의 작용”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런 것으로 목표에 이른다는 것은 황당한 소리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라 합니다. 예수를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요?
다른 종교에서는 가르침의 내용을 확인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가르치는 자를 믿으라고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예수에 대해 “내가 경험하지도 못했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음에도 이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이것을 언젠가는 경험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때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혹은 이성의 작용”을 가지라는 것입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