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야?기독교대표야?

국가대표야?기독교대표야?

북두閒主 7 2,719 2004.08.30 08:19

국가대표야? 기독교대표야?

 

 기독인 선수 도 넘은‘종교 행위’올림픽 정신 오염

 

769-1-1-2.jpg“저게 올림픽 국가 대표야 교회에서 파견한 기독교 대표야. 경기장이 무슨 선교장인가!”

그리스와의 시차 때문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밤을 지새며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국가 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던 경기도 군포에 사는 이 아무개(35) 불자가「법보신문」기자에게 전화해 던진 볼멘 소리이다. 기자와 평소 알고 지내던 이 불자 외에도 기독교인 선수들의 선교 행위를 문제삼는 지적은 올림픽 경기 내내 이어졌다. 대한올림픽위원회의 민원게시판에는 작성자 박영서의 ‘대한체육회가 기독교 대리인가’ 등 여러 개의 항의의 글이 올라 있다.

눈을 비비며 응원했건만 올림픽에 나선 한국의 기독교인 선수들은 경기장 안이건 밖이건 구분할 것 없이 두 손을 모아 기독교의 절대자를 위해 기도하고 메달을 딴 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며 이웃 종교인이나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대다수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경기장인데도 어찌 그리 똑같이 두 손을 곱게 모아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고 메달 획득 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멘트 내용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거의 모든 기독교인 선수들은 연습이나 한 듯 같은 행동과 말을 반복했다.

기독교인 선수들의 경기 중 혹은 종료 후 선교 행위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역기를 번쩍 들어 성공한 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장미란 선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기도했고 한국 첫 금메달의 주인공인 유도의 이원희 선수 역시 상대를 한판으로 메어친 뒤 곧바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두 팔을 벌여 하늘을 향했다. 그는 기독교계에서 발행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결승에서 승리한 뒤 내가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든 것을 보고 많은 신문이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고 했지만 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역기를 든 힘도, 한판을 따게 한 기술도 기독교인 선수들은 ‘하나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념과 종교, 인종 심지어는 국적도 뛰어 넘어 오직 스포츠로써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 평등을 구현하자’는 올림픽의 정신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스포츠의 숭고한 정신에도 배치된다.

대한체육회의 국제부 황희경 씨는 “그렇지 않아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기독교인 선수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지적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다”면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보고해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입장을 밝혔다.

본지 조사 결과 한국의 기독교계는 제28회 아테네 올림픽을 선교 올림픽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테네 올림픽 선교를 위해 한국올림픽선교회를 꾸렸으며 300여명으로 구성된 선교단을 현지에 급파했다.

이 선교단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란 문구를 5개국어로 인쇄한 선교용 올림픽 기념 스카프 2만장을 올림픽에 참가한 세계 각 국의 선수와 임원에게 마구 살포했다. 2002 한일 월드컵 경기 당시 국내 경기장 출입 규정에는 “종교적인 색채를 띤 인쇄물이나 기구는 반입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올림픽까지 선교의 장으로,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계의 배타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선교 전략이 놀라울 뿐이다.

아테네 올림픽 불자 선수 환송법회를 주관한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일면 스님은 “스포츠를 통해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을 기독교인 선수들이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올림픽까지 선교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기독교계와 기독교인 선수의 후안무치한 선교 행위를 적극 막아야 할 때가 됐다”며 씁쓸해 했다. 일면 스님은 기독교인 김철용감독의 주도로 배구단 전체가 기독교인인 호남정유회사의 생산품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5-03-01 09:34:28 (구)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Comments

동감... 2004.08.30 18:58
금메달 따고 나면 함께 기뻐하다가도, 무릎꿇고 기도들 하는 꼬라지 보면 정내미 뚝 떨어진다는...
우리나라의 맹목적인 개독 숭배... 국가적 망신이지요.
그리고 위의 구룡폭포 쉐리... 개독이 친일한거 도배해줘볼까?
속이후련 2004.08.30 11:13
우연히 들어왔는데 저와 같은 생각 가지신분들 많네요...
태권도 남자 금메달따고 태극기 앞에 놓구 기도하는거 보구 보기 안좋다구 엠파스에 답글달았더니..
개독들이 별 욕지거리 하고 난리데요.. 쩝
※※※ 2004.08.30 09:09
http://www.antichrist.or.kr/index.php?doc=bbs/gnuboard.php&bo_table=gt
개독들 친일한거 일부만 소개해 주께.. 뭐 다른 종교는 새발의 피지...ㅋㅋㅋ^^
※※※ 2004.08.30 09:07
뭐 일제시대때 개독만큼 단체로 친일한 새끼들은 드물꺼여,,^^
그런다고 니들 한 짓거리가 희석되겠냐?
※※※ 2004.08.30 09:05
중놈기사 올려서 뭐하자꼬? 여긴 불교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사이트걸랑... 별 미친새리 다보겠네..^^
※※※ 2004.08.30 09:03
개똥아 또 왔냐?
구룡폭포 2004.08.30 08:43
임시정부 관여하다 총독부 회유로 변절
전쟁물자 조달위해 사찰 범종도 떼 헌납
[특별기획-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18] 친일승려 이종욱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정운현(jwh59) 기자   
 
 
 
우리 역사에서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자리매김돼 있다. 평시에는 속세와 떨어져 구도자로 살다가도 국난(國亂)을 당하면 의연히 일어나 군대를 조직하거나 민족진영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우리 불교계였다. 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그랬고 일제 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그랬다.

 
 
▲ 친일승려 이종욱 
 
 
항일운동을 한 승려 가운데 이종욱(李鍾郁)이라는 사람이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그는 지난 77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고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난 93년 국가보훈처가 재심(再審) 대상자로 발표한 8명 속에 포함됐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지사인 그가 재심 대상에 오른 것은 왜인가. 문제는 그가 임시정부시절 이후의 행적 때문이다.

'재심' 대상에 오른 독립유공자

일제 말기 그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1급 친일승려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종교인 출신이었음에도 그는 해방 후 참회나 자숙은커녕 도리어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불교계의 거물로 행세하였다.

이종욱(1884∼1969, 창씨명 廣田鍾郁)은 강원도 평창 사람이다. 일찍 출가하여 월정사(月精寺) 승려로 있다가 3·1의거가 일어나자 고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틀 뒤인 3월 3일에는 이탁(李鐸·건국훈장 독립장) 등 27명으로 구성된 ‘27결사대’ 대원으로 매국역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의거’를 계기로 서울에서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한성(漢城)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그는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3월 임시의정원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임정의 국내 비밀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조직을 위해 국내로 파견돼 활동하기도 했다. 이 무렵까지 그가 독립진영에서 활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5권)에 따르면, 그는 1920년 6월 29일 청년외교단 운동으로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그 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무슨 사건에 관련돼 일경에 체포됐는지가 분명치 않아 현재 이 부분은 일단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다.

다시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출옥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건국훈장 애국장)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그가 ‘은거’하면서 지하활동을 했다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불교계에 복귀하여 공공연히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역전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친일대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월정사의 사채 정리위원으로 얼굴을 드러낸 그는 26년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을 거쳐 27년부터 월정사의 감무(監務)로 취임하였다. 29년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개최된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 이종욱이 주도한 조선불교에서 전국 사찰과 승려들의 헌금으로 구입해 일본군에 헌납한 비행기. 이들은 태평양전쟁 기간동안 모두 다섯 대의 비행기를 일본 군부에 헌납했다. 
 
 
 

이듬해 그는 31본사(本寺)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僧職)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무렵 그는 총독부측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36년 8월 ‘황민화 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南次郞)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오자 그는 마침내 친일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종회(宗會) 의장 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가 미나미를 환영하였다. 이듬해 37년 그는 31본사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 선출돼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사 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종권(宗權)을 장악, 당대 불교계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총독부가 있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 발발 1주일 만인 7월 15일 서울 남산 중턱에 위치한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는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하였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개국신 등을 모신 일본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 독려

이틀 뒤 그는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金大羽, 일제 말기 경북도지사 역임)를 찾아가 조선 내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는 문제를 상의하고는 며칠 뒤 조선내 각 사찰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하달하였다.

이어 8월 5일에는 개운사에서 중앙교무원 주최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회'를 개최하였으며 다음날에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그의 사회로 친일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송영(送迎)행사에 조선승려들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하였다.

1940년 2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그는 일본 고노에(近衛)내각의 외무대신 히로다(廣田弘毅)의 성을 따서 히로다 쇼우익(廣田鍾郁)로 창씨하였다. 같은 창씨라도 그의 창씨는 친일성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흔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총독부의 강요로 할 수 없이 창씨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래) 김(金)씨였다는 의미에서 ‘김(金)’을 ‘김원(金原)’ 또는 김본(金本) 등으로 창씨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당시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의 총본산 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 현 曹溪寺), 종명(宗名)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고치고 그 자신이 종무총장(현 총무원장)에 취임(1941년 8월 18일)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

 
 
▲ 이종욱은 일제의 징병제 실시와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친일문장 10여 편을 불교잡지에 남겼다. 사진은 <신불교> <불교시보> 등에 그가 쓴 친일논설들. 
 
 
 
그는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지난날 이조(李朝)의 압정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병합(日韓倂合) 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신불교』 제31집, 1941월 12월호)며 총독부의 ‘황도(皇道)불교’ 건설을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시(戰時)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하여 길거리에서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등 일제의 전쟁비 조달에도 앞장섰다. 또 조선 내 사찰과 승려들을 쥐어짜 5만3천 원을 갹출,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투기 1대 구입대금으로 헌금하였다.

1941년 12월 8일 ‘대동아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조선 내 1500여 사찰에 12월 15일부터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라고 전국 사찰에 명하였다.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그는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종회를 소집, 국방자재 헌납을 결의하고는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 불구(佛具)를 거두어 일제 당국에 헌납하였다.

전쟁물자 조달 위해 사찰 범종, 쇠붙이 거둬 일제에 헌납

또 1942년 5월에는 일본어 상용(常用)을 종용하는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국어(國語, 일본어) 전해(全解)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本寺)에 하달하였다.

1943년 8월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법요식에서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신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7천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 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성를 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학병권유 대열에서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이밖에도 그는 불교관련 매체에 10여 편의 친일문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그는 8월 17일 후 그는 종무원 3부장과 함께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였다. 이어 9월 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그는 ‘친일승려 제1호’로 지목돼 승권(僧權)정지 3년의 중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승권 정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47년 1월 강원도 교구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반탁세력과 연계, 자신의 친일경력을 위장하였다.

1950년 5월 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강원도 평창에서 당선되었으며, 51년 동국대 재단이사장, 52년 7월에는 제4대 조계종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7년 만에 그는 일제 때의 ‘위상’을 완전 회복하였다. 사후에는 건국훈장과 국립묘지 안장의 예우까지 받았다. 이제는 그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2004/08/24 오전 11:47
ⓒ 2004 OhmyNews 
 
 오탈자신고  정운현 기자

Total 2,409 Posts, Now 101 Page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100 명
  • 오늘 방문자 5,981 명
  • 어제 방문자 7,645 명
  • 최대 방문자 7,815 명
  • 전체 방문자 1,713,321 명
  • 전체 게시물 14,416 개
  • 전체 댓글수 38,044 개
  • 전체 회원수 1,668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