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 서명한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변절하지 않았다
1. 3.1운동에 서명한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변절하지 않았다
3.1운동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최 린
그중 손병희, 이필주, 김병조, 김창준,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최성모,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등 19명은
끝까지 독립운동에 매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나머지 10명은 주로 종교활동이나 문화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희도, 이갑성, 정춘수,최린등 4명은 친일로
변절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2. 신사참배에 대하여,,,
신사를 중심으로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하였다.
한국에도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
경제적 ·문화적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신사는 1910년 전에는 일본 거류민들을 위해서 민간에서 건립과
유지를 주도하였지만, 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신사의 관 ·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까지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座祭)를 고비로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일단 사립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강제로 신사에 참배시키는 정책의 실제 시행은
보류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대륙침략을 재개한 일제는,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다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기독교계는 이를 거부하고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총독부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는
분열되었으며, 1937년부터 기독교계 학교의 일부는 폐교되고
일부는 ‘순응’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皇民化)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에서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되어가자, 이제 그 강요의 마수를 일반인들은 물론
교회에까지 뻗치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일반신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하여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노회 ·총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기독교계도 이러한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고비로 굴복하여
급격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나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어느 교파에나 있었다.
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계속 장려하여 19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이 세워졌다.
이것도 부족하여 각급학교 등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에
약 215만 9000명, 19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무력과 고문과 처절한 죽음 앞에서 끝까지
신사참배에 저항하지 못한 죄책을 민족 앞에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일반인들은 너무 쉽게 신사참배에
굴복했었다는 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압에 저항하다가 굴복하기는 해였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어느 교파에나 있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3.그리스도인 독립운동가
목숨을 희생하며 무장 독립투쟁가 또는 그들을 도운 사상가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살펴보면 백범 김구, 김규식,
안중근, 도산 안창호, 월남 이상재, 시인 윤동주,,,등등
참혹한 식민 통치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궁극적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러한 민족적 운동에
앞장서서 참여하였다.
정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저들로 하여금
민족적 과제인 독립에 대해 외면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역사적, 민족적인 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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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중 대부분이 변절 혹은......야릇한(?) 분위기로 바뀐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너명을 제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