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카톨릭이 불교를 인정한다? 과연 그럴까요?

[펌] 카톨릭이 불교를 인정한다? 과연 그럴까요?

비공개 7 2,600 2004.10.07 18:36

 


네이버 지식인에서 퍼온글입니다.
제 주위엔 카톨릭신자도 많고, 저도 세례받고 성당에 다녀본 적은 있는데, 그들을 보면 표현방식이나 겉모습은 개신교인들과는 다르지만
워낙에 개신교와 같이 성경을 기초로 한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개신교도 어짜피 카톨릭에서 나온 것이고,,
맹목적인 믿음에 빠져 있는 신실한 천주교인도 결국 똑같은 개독이더군요..
아래글에 이의제기한 천주교인들 글보니 참.. 개독과 꼭같은 수준인..ㅉㅉ
다만 별 생각없이 그냥 성스러운듯한(?) 분위기가 좋아서 다니는 사람은 그나마 개독보다는 보통사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자세히는 모르므로..쿨럭;
암튼 그런 가톨릭의 관용적인 자세가 그들의 교리와 너무 모순되기에,, 궁금해서 뒤져보다 하나 올려봅니당ㅋㅋ 혹시 중복이거나 신뢰성이 떨어지는 글이 아닐지..제가 아직 잘 몰라서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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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하여 썼으니 제 정성을 봐서라도 읽어 주십시오.

 

2754108 (2003-05-16 17:32 작성)

 

 

카톨릭이 불교를 인정한다? 과연 그럴까요?

크리스트교의 교리 자체는 유일신 신앙이므로 다른 신을 숭배해서는 분명히 구원을 받을 수 없음에도, 카톨릭이 1960년 대 이후부터 불교를 인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카톨릭의 이러한 겉모습에 어떤 다른 숨은 속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은 교황을 수장으로하는 일종의 중앙 집권적 종교 행정부로서 하나의 국가처럼 정책도 짜고 선교 정책도 치밀하게 수립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과 불교처럼 중앙집권적인 조직체계 없이 각자의 자율성에 의지하여 교단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 교단은 철저한 관료주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들어 로마 카톨릭이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관용적 종교로서의 이미지를 굳힐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여러군데에서 보이는 데요.

그리고 거기에 동화된 카톨릭 신자들이 자신들의 종교는 배타적인 개신교와는 차별화 되었다고 일종의 우월감마저 바탕에 깔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데,

정말로 카톨릭이 관용적이고 평화적이며 사랑의 종교일까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우리 모두 중고등학교 시절의 세계사 시간으로 돌아가 봅시다.

로마의 크리스트교 국교 선포로 인한 그리스 로마신들의 철저한 파괴---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신화는 사람들에게 재미로 읽히는 신화가 아니라, 원래 그리스 로마인들의 전통 종교였습니다.--- 와 이교도들에 대한 마녀사냥---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로 인한 철저한 박해. 십자군 전쟁,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후 로마 카톨릭 교도들의 인디언들의 전통 종교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살육---아예 씨가 말라 버렸잖아요--- 프랑스의 베트남 점령 후 로마 카톨릭 신자만을 정부 관료에 등용시키는 편협한 정책---한마디로 너희들 사람 대접 제대로 받고 밥먹고 살려면, 카톨릭으로 바꿔라 그 말이죠. 일종의 우회적이고 지능적인 박해죠.---

이들 예뿐만 아니라 조금만 님께서 주의를 기울여 세계역사를 한 번 들추어 보십시오. 솔직이 추잡할 정도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분명한 역사의 실례들입니다. 카톨릭과 이슬람교에서만 유독스럽게 이러한 현상들이 점철되어 있습니다 .
---참고로 이 부분에 관하여 부연 설명을 드린다면,<역사의 연구>라는 명저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 부분에 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요.

유대교 계열의 카톨릭과 이슬람교의 이러한 폭력적 역사에 비하여 아시아의 불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단 한 번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평화적, 포용적 종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교회가서 회개하고 참회하고 설사 봉사에 전념한다고 하여도, 어쩐지 그녀를 마냥 곱게만 보아 줄 수는 없는 일 아닐까요?

사람은 살아온 인생이 있는 것이고 조직은 엄연히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카톨릭은 상당히 지능적인 수법으로 자신들의 최종 목표 즉, 숫자 늘리기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 이 부분에 관하여 부연 설명드리겠습니다.

유대교,크리스트교,이슬람교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음으로 그 유일신을 통하여서만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다만, 카톨릭에서는 연옥 개념을 내세우며 다른 신을 통하여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연옥이라는 개념이 명확히 쓰여 있지가 않아서 프로테스탄트인들에게 카톨릭이 공격받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설사 카톨릭의 주장대로 연옥이 실제로 사후에 존재한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완전한 구원이 아님은 명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의 문장에 "완전한" 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렇게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이들 한뿌리의 삼부자는 당연히 개종과 믿음,전도 그리고 머리 숫자가 중시됩니다.

그러나,힌두교, 불교, 도교 같은 범신론적 신관을 가진 종교들은 범신론적으로서 범신론이란

---미약한 제 능력으로 범신론을 설명드린다면,< 이 세계 자체가 곧 신이다>라는 개념으로서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 새끼부터 인간 그리고 하느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평등하다는 개념입니다. 모두가 다 신이라는 것입니다.

범신론에서는 절대자 개념이 없습니다. 전능의 신도 범신론적인 신관으로 본다면, 숭배의 대상이 아니고 좋은 친구의 개념 정도입니다.

범신론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 삼라만상 자체가 곧 신이므로 그 구원은 어디에서도 완벽하게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신교의 교리와 대별되는 범신론으로서 대평등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 범신론의 개념을 이해 못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으신데,

우리가 동양인임에도 범신론의 논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전통과 단절되었으며 미국화되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듯 합니다.

범신론을 다시 쉽게 설명드린다면, 힌두교의 천지창조 이야기 속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태초의 어느 날 브라만신-크리스트교의 야훼에 해당하는 전능의 신- 내부에서의 엄청난 폭발로 브라만신의 몸뚱아리가 산산히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는 데, 그 신의 몸뚱아리 파편들이 끝없이 흩어져 나가서 그 파편들이 태양이 되고 지구가 되고 바다가 되고 바위가 되고 개미가 되고 때론 풀잎이 되고 동물이 되고 사람이 되고 .......은하계가 되고.......시간이 되고 .........우주 자체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만물은 곧 전능한 신의 부분들임으로, 파편들임으로 모두가 다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유일신교의 교리와 대별되는 동양의 범신론인 것입니다.

참고로 서구의 과학자들은 이 힌두교의 천지창조 구절을 빅뱅설과 유사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범신론의 입장으로 본다면,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은 반드시 한 개의 신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일신으로 해서 달성할 수도 있고 그 밖의 것에 의해서도 구원은 당연히 성립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말씀드리면, 우리들 자체가 전능의 신이므로 이미 구원 자체가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신성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할 뿐인 데, 그것이 바로 종교의 역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 어디에서도 <구원>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것입니까? 이미 구원은 항상 우리가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 손에 가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다이아몬드가 쥐어져 있건만, 자기 스스로 다이아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신의 충실한 종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신론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특별히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성립하게 된다는 점에 첵크하시기 바랍니다. 이 범신론의 논리가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이 불교의 32응신 사상입니다.

불교의 32응신 사상에 의하면, 관음보살은 모든 이의 신성을 일깨우기 위해 때로는 타종교인들의 다른 신들을 향한 믿음이 깊어지도록, 그들의 종교심을 위하여 그들의 신의 모습으로 화신을 합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는 논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따라서, 동양의 불교 등은 크리스트교 등처럼 외곽으로 뻗어 나가려는 노력이 강하지 않습니다. 즉, 개종, 전도, 선교, 머리 숫자들에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신을 통하여서도 완전한 구원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충돌이 생길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앞서의 표현 중에 로마 카톨릭이 숫자 늘리기에 몰입한다고 말씀드린 부분은 그냥 쓴 표현이 아니라 크리스트교에 있어서 숫자는 절대적 의미를 갖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입니다.

요 한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말이 너무 길어졌군요.

--- 역사적으로 이렇게 잔인했던 카톨릭이 근래에 들어 와서 테레사 수녀님의 선행 등을 내세우며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처럼 똑같이 배타적이었던 카톨릭이 평화적 성향을 내세우며

기존의 강압적 선교 정책에서 포용적 선교 정책으로 전환한 시기는,

대략 1965년 전후의 시기로 판정되고 있는 데,

기존의 선교 정책으로는 더 이상 신도가 늘지 않자 이미지 전환을 꾀하며 평화적 성향으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즉, 크리스트교 교리 자체와는 별개로 세상의 논리에 타협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한 정책의 전환 과정에는 일정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서유럽에 한 번 가 보십시오. 우리 나라 명동성당의 10배나 더 큰 노틀담 성당과 쾰른 성당에는 주일 날 예배보는 신도가 2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대부분은 수녀들의 보호를 받는 장애인들이랍니다.

우리가 보통 서유럽 각국의 종교 인구 통계를 보면, 카톨릭 95퍼센트,98퍼센트,개신교 99퍼센트 뭐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상당 부분 허수입니다.

지금 유럽의 각국들은 종교 인구 센서스 조사를 하지 않은 지가 벌써 수십 년이 넘었습니다. 수십 년 전의 통계를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고 실제로 서유럽에서 크리스트교 신자는 우리가 넘겨 짚어 생각하듯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물론, 유럽인들은 태어나자마자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결혼을 성당이나 교회에서 하며 죽으면 카톨릭의 종교 사제인 신부님이 장례를 집전하지만,

문제는 유럽인들이 이 세 번의 경우말고는 평생 동안 성당과 교회에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유교의 자취와 비슷한데요.

우리 나라 사람들의 8,90퍼센트가 제사를 지내지만, 정작 유교 신자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은 똑같은 현상이 지금 서유럽의 선진국들에게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프랑스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사랑하던 애인이 죽자 슬픔으로 울부짖으며

< 저는 일 년에 두 번씩이나 교회에 나가는 데 왜 저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나이까?> 하고

신을 원망하는 장면이 지금의 유럽의 크리스트교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서유럽에서 1년에 성당과 교회를 두 번씩이나 다닌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이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카톨릭 내부에서는 교회 공동화 현상이라고 부르며

< 유럽인들의 크리스트교에 대한 믿음은 변함없다. 다만, 성당을 신자들이 안 나가는 것뿐이다> 하고 태연한 척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사실 초조한 것은 카톨릭 교황청입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서유럽인들은

이제 더 이상 크리스트교를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어리석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

리스트교는 우수한 현대적 감각의 인테리어를 보유하고 있지만,

교리면으로 보면, 과학과 합리적 이성과 진정한 사랑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남을 미워할 수 있는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남을 미워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주적인 크기로 세상을 관조해 본다면, 사랑과 증오는 똑같은 하나가 아닐까요? 그래서, 샤아카무니는 사랑이라는 손쉬운 표현 대신, 사랑과 미움의 상대성을 넘어선 사랑의 의미로서 ".자비." 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서유럽인들은 단순한 크리스트교의 인간 사랑을 넘어서서 채식주의라던가 환경문제, 그리고 동물 보호 단체 등으로까지 파고 들 정도로 사랑의 의미를 크리스트교의 것을 넘어서서 확장 사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는 너무 거리가 먼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야 사람들이 무지 했으니까 크리스트교가 먹혀 들어 갔지만,

이제는 유럽인들에게 안 통하거든요.

이러한 현상을 똑똑한 로마 카톨릭은 이미 1960년 대부터 그 조짐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의 잃은 교세를 마련하기 위해 카톨릭이 선택한 방안이 아시아 공략이었습니다.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는 공산화라던가 개발도상국 하에 있었기 때문에 전통과 단절된 상태에 있었으며

개중에는 우리 나라와 필리핀처럼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국가들도 존재하였기 때문이죠.

또한 경제적으로 다들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까

기존의 심도 깊은 사유를 필요로하는 힌두나 불교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아시아인들에게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카톨릭이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요.

그 나라가 베트남과 한국입니다.

이 때 로마 카톨릭의 불교 국가 개종을 위한 방법과 정책은 무척 치밀한 방법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치밀하냐면요,

 아시안인들에게 부처의 존재를 신의 존재가 아닌 최고의 존경할 위인으로 각인시켜라.

그럼으로써 외부적으로는 부처를 칭송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동양인들에게 불교의 종교력을 감퇴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카톨릭이 다른 불교 성인들의 명언들을 자주 인용함으로써 평화적인 면을 강조하여 동양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한다.

특히 " 그 지역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가 결정한다 "는 원리하에

로마 카톨릭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하여 정치적 지배력을 확충하고자 의도한다 등등

100여 항목에 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아주 세세히 계획한 것입니다.

그 정책의 효과로 많은 아시안인들이 카톨릭의 배를 불려 주었죠.

그리고는 멋도 모르고 우리 카톨릭은 불교도 인정하는 관용적 종교이다 하는 착각의 자부심을

아시아의 로마 카톨릭인들에게 심어 주었죠.

결국 크리스트교 자체의 교리에서 파생하는 포용성이 아닌, 그저 선교의 기술이었을 뿐인데도,

정작 당사자인 신부들과 수녀들 자신들도 그것을 감지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좀 더 상세한 카톨릭의 아시아 선교 방법은 <불교 국가는 이렇게 공략하라>라는 책에서 참조해 보십시오. 상세히 나와 있을 것입니다.

교황청 내부 문서가 한 양심가의 손에 의해 유출된 것으로서 많은 서구인들에게도 충격을 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카톨릭이 그간 1500년 동안의 파괴적인 역사의 이미지를 재고하고

늦게 나마 사회 봉사에 열중하며 종교 다원화에 기여하는 작금의 모습은 바람직하며 아름답고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 대답이 때론 생소하고 거부감마저도 들 수 있겠으나,

세상의 일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르게도 한 번 바라 볼 수 있는 계기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일 님께서 저에게 사람에게 가장 존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그것은 < 정신의 자유 >이다라고 서슴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분명히 하나입니다. 정신도 분명 하나입니다.

그런데, 100세를 살아도 세상의 일반적인 인식과 논리, 유행, 사조, 통념 등에 휩쓸리어,

자기가 자라오고 교육받아오고 경험해온 세계말고는,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천지간에 가득합니다.

우리가 과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다면, 이슬람교 신자가 아닐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만일 필리핀에서 태어났다면, 카톨릭 신자가 아닐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만일 태국에서 태어났다면, 불교 신자가 아닐 수가 있을까요?

그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일 정도로 정말 희박하지 않을까요? 왜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까요?

이슬람이 옳아서 크리스트교가 옳아서 불교가 옳아서 ....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교육받아 왔으며 자라온 세상의 환경이 그러하였기에, 그 세상의 생각이 그들 개개인들에게 그대로 복사된 것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제가 님께 답변드린 위의 글들은 현재 한국사회 속에서 당연하게 인식되어져온 통념들에 대한 도전입니다.

현재의 한국 사회, 특히 우리 같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세상을 인식하는 시스템이 사실 너무나 크리스트교에 경도되어있고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전혀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도전한 것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존귀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정신의 자유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지금의 생각들도 또 언젠가는 버리고 떠날 것입니다.

--- 눈이 많이 아프시겠지요? ㅎㅎ 그러나 저도 눈이 아프네요. 저는 독수리거든요. 이 글 쓰는 데 지금 2시간 30분이나 걸렸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출처 ☞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0302&docid=132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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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케찰코아틀 2004.10.08 09:46
대단하십니다.
쥐뿔! 2004.10.08 01:28
1987년도 쯤에 제가 저 자료를 번역해서 모 불교잡지에 몇달간 연재했었습니다.
그때 200자 원고지 1매에 3천원씩 받았으니까......매달 수십만원씩 벌었는데.....ㅋㅋㅋ
태국에서 유출된 가톨릭 고위사제의 비밀문서가 유출되었던 것입니다.
KiKi 2004.10.08 00:29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제삼자 2004.10.07 22:57
참으로 정성들여 쓰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ㅐㅐㅐ 2004.10.07 22:21
2시간 30분이면 엄청 짧은 시간에 쓰신건데요 너무 잘 쓰셨네요. 저는 위와 같은 글을 스라고 하면 평생 걸려도 못 쓸겁니다.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이 이글을 읽고 뭔가 느끼고 해야 하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너무 선입관을 앞세워서 생각 하다보니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충고를 곱게 안받아 주더군요. 생각 자체를 달리하면 뭔가 큰일이 날것 같은, 아니 생각을 달리한다는 자체를 아예부정해 버립니다. 흔히 일컫는 사이비 종교에 그렇게 당하고도 거기에 목을 메어다니는 광신도들을 보왔을겁니다. 기독교인도 일반인이 봤을때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는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처럼 안티 사이트가 차츰차츰 늘어가는것을 보니 한극에서의 기독교도 점점 쇠퇴의 길을 가고 있는거 같습니다. 과학과는 동떨어진 종교는 결국은 쇠퇴하고 말것입니다.
wrakwrak 2004.10.07 21:45
그래도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교하자면 가톨릭이 훨 낫습니다. 오죽하면 그 개신교들의 아집 때문에 가톨릭이 불교랑 더 친하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께서 실제로 호스피스 하시면서 저한테 하신 말씀입니다.
가시 2004.10.07 20:10
눈이 아프긴요.  계속 더 읽고 싶어집니다.  좋은 글들이 많은 반기련  개독들은 정신적 자유가 아니라,  정신적 속박에서 스스로 죄인으로 살고 있으면서  그 사실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 ...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 점점 작은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자들...    이성은 말라가고 유일신에 대한 맹신으로 고정되버린 사람들에게
정신적 자유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정신적 미숙아를 대량 생산하는 곳이죠.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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