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언론과 네티즌이 선일이 두 번 죽였다?

비정상적인 개독들의 모습..

[기사] 언론과 네티즌이 선일이 두 번 죽였다?

(ㅡ.ㅡ) 4 2,390 2004.08.02 11:12
레이디경향 2004.8.2 (월) 10:46   itm02_1.gif 레이디경향
“언론과 네티즌이 선일이 두 번 죽였다”
부산을 찾아간 날은 얄미울 정도로 무더웠다. 전날까지만 해도 장맛비로 전국이 몸살을 앓았는데, 그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산 전체가 더위로 헉헉댈 정도로 푹푹 쪘다. 그렇게 장마는 또다시 잊혀져가고 있었다.

4985_1_1_1.jpg 그도 그렇게 잊혀져갈 것이다. 국토에 생채기를 내놓고 사라져버리는 장마처럼, 그는 우리 가슴에 멍을 남겨놓고 갔다. 이라크 무장단체 앞에서 눈을 가리고 무릎을 꿇은 채 울부짖던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장면은 어렴풋한 기억으로 사라지고 있다.

희대의 연쇄 살인범 유영철의 검거 소식은 그에 대한 기억을 더 뿌옇게 만들었다. “아니,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험한 사건들만 일어나는 거야?” 했던 누구의 말처럼,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 사고 속에서 그는 잊혀져간다.

고 김선일씨(34).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이유 없는 죽음을 당한 한국 청년.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그리고 그의 꿈이었던 중동 선교를 미리 체험해보기 위해서 떠난 이라크. 그의 꿈이 영글어가나 싶었는데,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그는 어이없이 죽음을 당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이라크로 갔던 청년은 딱딱하게 굳어진 몸이 되어 고국에 돌아왔다.

그의 죽음과 장례식 이후 그를 애도하는 편지와 격려가 부산 범일동 본가로 쏟아졌다. 초등학생의 삐뚤빼뚤한 편지부터 중국, 미국, 일본 등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외국인들의 편지까지 속속 도착했다. 장례식이 열린 일주일간 전국에서 수천 명의 조문객이 빈소와 본가를 찾았다. 6월 한 달 동안 조국은 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물결로 가득 찼다. 그렇게 그는 잊혀져갈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좋지 않은 소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 김선일씨의 아버지 김종규씨(70), 어머니 신영자씨(63) 그리고 남은 가족들을 보상금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에서 미리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방송과 신문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어머니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래서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고, 무작정 부산 범일동을 찾아갔다. 찾아간 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간 곳을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는 조용해지나 싶더니, 또 찾아왔네. 그때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이 좁은 곳에, 내가 보기에 1백 명도 넘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나도 들었는데, 잘 모르겠어. 동네에서는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 안하는데.”(동네 주민)

노부부가 살고 있는 곳은 범일동 안창마을이다. 에어컨을 켠 택시가 올라가기에 힘이 부칠 정도로 언덕배기에 있다. 마치 서울의 달동네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넉넉지 않은 동네 살림을 말해주는 듯했다. 마을버스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도로는 차들이 한번 엉키면 좀체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이렇게 좁은 곳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니 얼마나 번잡스러웠을까 상상이 된다.

고 김선일씨 가족에 대한 소문은 정말 좋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노부부가 ‘안됐다’는 말보다는 ‘정말 너무 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정도였다. 노부부가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안창마을로 향했다. 부산 날씨는 짜증이 날 정도로 더웠고, 노부부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도 무겁기만 했다.

해명 하나김종규씨는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김종규·신영자씨 부부는 기자를 보자 경계부터 했다. 그동안 언론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듯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기자를 집 안으로 들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도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들의 소문을 알고 있었다. (사투리를 읽기 편한 말투로 바꿨다.)

4985_2_1_2.jpg “우리는 기자들 하나도 안 믿습니다. 진실은 하나도 안 내보내고, 우리 이야기가 너무나 얼토당토않게 나오니까. 계모라고 선일이는 밥도 안 주고 라면만 먹였다고요? 나는 그런 말 들으면 너무 어이가 없어요. 공부한다는 선일이를 말린 적도 없고요. 대학 다닐 때도 없는 돈이라도 얼마씩 선일이한테 보내줬고요. 내 속으로 낳지 않았다고 차별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소연부터 하기 시작했다. 소문의 진상은 이랬다. ‘김종규씨는 결혼을 세 번 했다. 두번째 부인은 도망쳤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과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동거인이다.’

일면 맞고, 일면 틀린 말이다. 김종규씨는 현재 혼인신고가 되어 있는 상태다. 다만, 상대는 신영자씨가 아니라 일본에 살고 있다는 한 여자다. 김선일씨의 친모 우금순씨는 78년 4월에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리고 신영자씨의 전남편은 같은 해 2월에 세상을 떠났다.

“전남편은 육군 중사였어요. 스무 살 때 결혼했는데, 남편이 제대 후 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선일이 친모는 향림이(맏 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죽었어요. 비슷한 시기에 남편과 아내를 떠나보냈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기대게 된 거죠.”

우연히 만나 두 사람은 좋아하게 됐고, 6개월 만에 살림을 합쳤다. 당시 김종규씨에게는 딸 셋과 아들 김선일씨가 있었고, 신영자씨에게는 아들 장진국씨를 포함해 4명의 자식이 있었다.

양쪽 집안에서 모두 반대를 했지만, 혼인신고도 안 한 채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음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김종규씨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왔다갔다해야 했다. 91년 부부가 함께 아이들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돈을 벌러 나갔다.

불법체류가 뭔지도 모르던 부부는 일본에 있던 한 친척이 “위장결혼을 하면 일하기 편하다”는 말을 듣고 김종규씨가 일본 여자와 위장으로 혼인신고를 했다. 신영자씨도 위장결혼을 하려 했으나 한 한국인 불법체류자가 “그런 것 안 해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고 말해 위장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후 두 사람은 도쿄에서 30개월간 일을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때 번 돈으로 이 집(범일동 본가)을 샀습니다. 우리 두사람이 혼인신고를 안 했다는데, 할 수가 없었어요. 남편은 벌써 다른 여자랑 혼인신고가 되어 있어요. 선일이 일만 해결되면 바로 이 부분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주 미치겠어요. 남편도 이렇게 일이 꼬일 줄 몰랐어요. 우리 두 사람만 잘 살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아직도 동거인 관계다. 이런 사실은 쏙 빠진 채 김종규씨가 ‘여자를 좋아하는 바람둥이다’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등의 이야기가 퍼져버린 것. 이번 일이 없었다면 노부부는 예전처럼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았을 것이다.

해명 둘조의금이 14억이나 들어왔다는데…
“아이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조의금이 14억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선일이 조문 온 사람이 4천여 명 됩니다. 그리고 조의금을 낸 사람이 약 1천 명 되고요. 제가 조의금 봉투를 다 모아놨어요.”

김종규씨는 주섬주섬 모아놓은 조의금 봉투와 통장을 내왔다. 조의금은 고 김선일씨의 매형인 박갑상씨가 관리를 했다. 통장 2개에 들어 있는 조의금은 8천여 만원. 인터넷에서 떠도는 14억이라는 말은 가족들조차 출처를 모르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다.

“가족끼리 모여서 조의금에 대해 합의를 봤어요. 부모님들 노후 생활하는 데 사용하기로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부산 본가가 얼마나 작습니까! 수십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장례식 마치고 집에 가서 밥을 해 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가족들이 밖에서 밥을 먹은 것 가지고, 조의금을 마음대로 쓴다느니  하는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매형 박갑상)

노부부는 조의금이 들어온 통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만 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증거 자료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해명 셋정부에 보상금 50억과 교회 건물 요구했다?
이 소문 때문에 노부부와 남은 가족들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노부부는 이 소문에 대해서 기억 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시 장례와 조문으로 정신없을 때, 집으로 한 목사가 조문을 왔다. 아들이 기독교 신자였기에, 김종규씨는 그 목사에게 일 처리를 일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목사가 시청 관계자와 보상 문제를 상의했던 것.

“그때 그 목사가 시청 관계자에게 돈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돈이 문제입니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남편이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50억 가져와라. 그러면 합의해준다’고 했나 봐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50억 요구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정신없는 상태에서 한 말이 그렇게 소문이 난 거죠.”

유족 대표인 큰아들 장진국씨는 정부 관계자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단돈 1원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가족 어느 누구도 보상금 문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교회 건물을 요구했다는 소문에 대해 유족측 자문변호사 이은경씨는 “어떻게 교회를 지어달라고 정부에 요구합니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어느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라고 일축했다.

아버지 김종규씨는 이에 대해 “아들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니까 죽은 후에라도 아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는 했던 것 같아요.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가 교회 건물을 지어달라는 이야기로 와전된 듯하다. 유가족은 현재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중이다. 보상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소송 변호인단이 구성되면 보상 내용이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변호인단 구성은 현재 이은경 변호사가 추진중이다.

해명 넷밥도 안 해주고, 라면만 먹인 악독한 계모?
고 김선일씨가 가나무역에 지원하면서 제출한 자기소개서에는 자신의 불우한 가정환경사를 적은 부분이 있다.

“저는 남들과 다름없이 1남 3녀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무난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조금씩 불안정한 심리를 가지고 살게 되었고, 약 6개월 후 아버지께서는 새어머니를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새어머니와 잘 융화되지 못해서 갈등이 참 많았습니다. 괜히 비뚤어진 마음에 반항심을 가져 말을 듣지 않았고, 자랄수록 점점 더 심하게 비뚤어져갔습니다.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을 앞둔 무렵, 당시에 아버지께서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아버지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재수를 하여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큰누나, 작은누나, 여동생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 살게 되었습니다….”

김종규씨와 신영자씨가 같이 살게 됐을 당시 형편이 많이 어려웠다. 그래서 김종규씨 가족과 신영자씨 가족은 서로 떨어져 살았다가 합쳤다가를 3~4차례 반복했다고 한다. 더구나  중풍으로 고생하는 할머니도 계셔서 가족들의 고생은 무척 심했다고. 손자(선일씨)의 성격이 비뚤어지자 할머니는 서로 분가해서 살아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선일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남편한테 나가 돈 좀 구해오라고 했지만 밤에 빈손으로 왔어요. 당시에 선일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쯤, 등록금 해주려고 화병에다 5천원씩 넣어둔 것이 있었죠. 부엌으로 가서 화병을 깨고 선일이한테 돈을 줬어요. 첫번째 등록금을 분명히 줬는데! 왜 재수를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때 신영자씨는 너무 화가 나서 서울로 도망가버렸다. 구질구질한 삶이 싫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고깃집에서 2개월 일도 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고 김선일씨가 자기소개서에 썼던 가족사를 확인하기 위해 큰누나인 향림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큰누나 대신 매형 박갑상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박씨 역시 인터넷에 떠도는 ‘악독한 계모’라는 이야기에 “절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장모가 자식들에게 소홀히 했던 것이 아닙니다. 장모가 자식들 학교 보낼 때 교복이나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사실을 알고 있어요. 가족들이 모두 잘 지냈어요. 선일이도 형님(장진국) 말을 잘 들었고.”

고 김선일씨가 자기소개서에 써놓은 것처럼 어렸을 때는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다고 한다. 계모니까 반항심도 많았고, 말도 잘 듣지 않은 것은 사실이란다. 하지만 교회에 다닌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일이가 여덟 살 때부터 제가 길렀어요. 공부한다면 말리지 않았고, 가난하지만 등록금을 대주면서 시켰어요. 비록 용돈은 선일이가 벌어서 썼지만. 공부를 하니까 집에도 자주 못 오고, 명절 이나 아버지 생신에 잠깐씩 집에 왔어요. 집도 좁고 그러니까 잠도 잘 안 자고 바로 올라가고 그랬죠. 제 속으로 안 낳았다고 아이를 싫어하고 차별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어이가 없어요. 왜 남의 가족을 그렇게 모함 하는지!”

노부부는 기자를 붙들고 1시간 반 정도 이야기했다. 그동안 그들이 살아왔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유는, 잘못 알려진 가족사를 해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은 가족들은 가슴에 큰 상처를 두 번이나 남겼다. 한 번은 사랑스런 가족을 이라크 땅에서 잃은 것이고, 또 하나는 실제 있지도 않은 일이 부풀려져서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누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울분을 터뜨린다.

소문과 당사자인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달랐다. 누구의 이야기가 옳은지는 이제 독자들이 판단할 몫인 것같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4985_3_1_3.jpg 고 김선일씨 피랍 사건 날짜별 경위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이 진술한 내용)

5월 31일 오전 11시경 이라크 직원과 함께 가나무역이 운영중인 매장의 물품을 운반하러 팔루자 쪽에 있는 리지웨이 부대로 떠남.
6월 1~2일 김씨의 행방이 묘연.
6월 4~9일 가나무역 사장은 현지인 직원을 통해 김씨의 행방을 조사. 약 일주일간 팔루자 지역에서 수소문하던 중 주민들로부터 무장세력에 잡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를 들음.
6월 11~17일 가나무역 사장은 현지인 변호사를 통해 팔루자의 무장세력들과 접촉 시도. 김씨가 억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됨.
6월 18일 무장세력 고위층에게 김씨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
6월 20일 알 자지라 방송에서 김선일씨 피랍 사실이 공개.
6월 21일 최영진 외교차관이 ‘파병 원칙 변함없다’고 천명.
6월 22일 오후 10시 20분, 바그다드 팔루자 방향 35km 지역에서 시신 발견.
6월 23일 오전 2시 알 자지라 방송에서 참수 관련 비디오 테이프 방영.
6월 26일 오후 5시 30분 시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
6월 30일 오전 10시,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고 김선일씨 장례식이 범기독교장으로 거행됨.


고 김선일씨가 처형되기 전에 남긴 유언
김씨는 처형되기 직전 납치범들 앞에서 눈이 가려진 채 무릎을 꿇고 이 같은 내용을 울부짖었다.
4985_4_1_4.jpg
To President Roh, move  노무현 대통령에게, 나가주세요
I want to live 나는 살고 싶습니다.
I want to go to Korea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Please, don’t send to Iraq Korean soldiers
제발 이라크에 한국 군인들을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Please, this is your mistake 제발!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This is your mistake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Many Korean people don’t like their to send to Iraq
많은 한국인들은 동포를 이라크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All Korean soldier must out of Iraq
모든 한국 군인들은 이라크에서 나가야 합니다.
4985_5_1_5.jpg
Please, please this is your mistake
제발, 제발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Why do you send why do you send Korean soldiers to Iraq
왜 당신은, 왜 당신은 한국군을 이라크에 보냈나요?
To my all people all Korean people please support me
고국에 계신 한국 동포에게.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please * President please Bush to President Roh move Iraq
제발, 대통령님! 제발 부시! 제발, 노무현 대통령! 제발 이라크에서 나가 주십시오.
Please I want to live, I want to go to Korea.
제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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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김현민 2004.08.03 12:43
한사람의 죽음이 너무 잔인하고비정한 언론과 편견속에서 잊혀져가는것 같습니다 그는 원하지않는 죽음을 맞이헷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각오하긴헷어야 합니다 그의 마지막절규가 너무나 측은하게 여겨집니다
레인져 2004.08.02 12:52
하여튼 그상황에서도 돈 밝히는 먹사 놈이란,.,쯧쯧..
(ㅡ.ㅡ) 2004.08.02 11:38
개독들이 죽인걸 가지고 왜 언론하고 네티즌을 탓해~!! 웃기는 짜장들...
순박한나그네 2004.08.02 11:35
추잡스러운 과정을 보여놓구는......뭘 믿으라는건지......
언론과 네티즌이......김군을 두번 죽였다면
가족년놈들은 수십번도 넘게 죽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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