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이여 ‘여성 사제’를 허하라
[한겨레신문 2006.05.29 19:24:00]
[한겨레] 오스트리아에 사는 ‘여성 주교’ 크리스틴 마이어(50)가 한국을 찾았다. 가톨릭 베네딕도수녀회에서 5년 동안 생활한 가톨릭 수도자 출신으로 25년 전 결혼해 중학교 교사로 살아가는 그는 2002년 ‘교황청으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채’ 사제로 서품을 받아 6개월 뒤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했다. 로마 교황청은 아직까지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가 방한한 25일엔 우연히 대한성공회 오인숙 카타리나(66)수녀가 사제의 전단계인 부제로 서품 받는 날이었다. 마이어는 도착하자마자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주교좌성당으로 달려가 오 수녀의 부제 서품을 축하해주었다. 로마 가톨릭과 달리 성공회는 ‘여성 사제’가 수천 명에 달하고, ‘여성 주교’까지 탄생한데 이어 여성수도자(수녀)가 사제 서품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그로서는 부러운 일이었다.
최근 ‘여성 사제’는 소설과 영화 <다빈치코드>를 통해 주유 이슈로 부각했다. <다빈치코드>에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참여한 12사도 중 한명이자, 예수의 신부이자 예수의 가르침을 잇는 ‘최고의 사도’로 묘사되고 있다.
파문 당한 채 가톨릭 안에서 운동
여성사제는 1962~65년 교황청의 ‘2차 바티칸공의회’ 때 독일인 신학자 2명이 도입을 청원하면서 불타 올랐다. 오스트리아에서 1995년 ‘우리가 교회다’라는 운동이 시작된데 이어 99년엔 아일랜드에서 ‘지금이 바로 그 때다’라는 회의가 열렸다. 2002년엔 여성 7명이 아르헨티나 출신의 종파주의 대주교인 루물루 브라스치 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들은 어느 교구에도 속하지 않은 강물을 택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을 흐르는 다뉴브강 위 배에서 서품식을 거행했다. 이들 가운데 마이어 등 3명은 다음해 주교 서품을 받았다. 2005년 7월엔 캐나다와 미국의 접경지역인 세인트 로렌스강 위 배에서 9명이 사제 또는 부제 서품을 받았다. 지금까지 가톨릭의 여성수도자를 비롯해 훨씬 많은 수가 사제 및 부제 서품을 받았지만, 상당수는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온 마이어는 지난 26일 오후 2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수녀 등 70여명이 모인 가운데 ‘교회 여성과 제자 직분’에 대해 강연했다. 이어 이날 오후 7시 인근 품사랑 카페에서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종교 안에서의 여성 지위’에 대해 주관자인 아시아신학연대센터의 황경훈 실장의 사회로 불교 스님, 원불교 교무, 개신교 목사, 신학자 등 이웃종교인들과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 이 대화에선 먼저 마이어에 대해 “왜 출교됐는데도 가톨릭 안에서 그런 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됐다. 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장인 한국염 목사는 “다른 종파를 만들어 할 수 있는데 왜 가톨릭 안에서 하느냐”고 물었다. 한 청년은 “그 에너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쓰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2004년 세계여성불자대회 추진위원장을 했던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은 “나와서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역사와 권위를 가진 가톨릭에서 그런 운동을 하는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부부교수 전임교수 임용 불가’라는 성차별 조항에 의해 감신대의 재임용에서 탈락한 강남순 박사는 “감리교에선 1930년에 여성의 목사 안수를 허용했지만, 이와 달리 남성 중심의 시스템엔 변화가 없다”며 “가톨릭의 (성차별적) 신학·교리 토대가 변화지 않는 상태에서 제도만 도입될 경우 기존 시스템을 더욱 강화시켜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 공동대표이기도 한 원불교 이선종 교무는 교단 출범 부터 남녀 평등인 원불교의 시스템을 소개한 뒤 “우주엔 음양이 있고, 가정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듯이 남녀가 동등하다는 것에 대해 여성 스스로 깨어나는 데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차별적 교리 함께 정비해야
마이어는 결혼과 사목을 겸하는 것에 대해 “유럽의 상황에 따른 선택으로, 유럽에서도 자신이 독신으로 살아갈 지, 결혼과 겸할 지 선택 한 뒤 그 선택에 충실한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인숙 카타리나 부제는 “마이어는 유럽 상황에 맞게 운동을 벌이므로, 한국에선 우리 상황에 맞는 운동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녀들은 여성 사도직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할 기회를 주고, 희망을 준 것에 대해 마이어에게 감사를 표했다.
마이어는 “비록 공식 주교는 아니지만 (교구 내에서)에서 주교와 사제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자신에게 부탁하는 등 적어도 절반의 사제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있는 게 현실이고, 말은 않지만 많은 바티칸의 고위층들도 자신을 돕고 있다”며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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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교황의 부정과 비리 역사?
여성이 사제가 된든 안되든 달라지는 것이 뭐가 있는데?
이런 교황의 역사를 찾아 보면 뭐가 나올까?
1. 교황 세르지오(Sergius) 3세(904-911) : 교황 직무를 살인이란 방법을 통하여 얻었다.
로마 교회의 역사 기록에서는 사생아를 낳은 마로지아(Marozia)와의 공개적인 죄된 생활상을 말한다.
이후 음녀들의 통치 기간(903-963)이 시작된다.
2. 교황 요한 10세는 라반나 대주교로 파견되었으나 테오도라는 그와의 부정한 관계를 더욱 쉽게 감추기 위하여
요한이 선출 되도록 지지하였던 것이다.
마로지아가 그를 질식사시켜 버린다.
3. 교황 레오 6세 (928-929): 그는 마음을 자기보다 더욱 타락한 여자에게 두고 있는 것을 간파한 마로지아가
그를 암살해 버린다.
4. 마로지아의 10대 아들인 교황 요한 9세: 이전 교황인 세르지오 3세의 서자라고 한다.
당시 로마를 통치한 그의 어머니의 음모로 그는 교황에 앉지만 자기 어머니의 적들과 싸우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투옥되었다가 독살되어 버린다.
5. 마로지아의 18세의 손자인 교황 요한 12세 (955-964): 가톨릭 백과 사전은 그를 추잡하고 부도덕적인 사람으로
원래 교황궁전을 갈보집 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반대파 지도자들에 대해 피의 복수를 하는데 추기경-부제인 요한은 오른 팔을 절단당하였고,
오트가르 주교는 태형을 당하였으며, 궁전의고위 백작은 코와 두 귀를 절단당하였다.
964년 5월 14일 간음을 하다가 중풍병으로 마비당한지 8일 후에 죽었다.
6. 교황 보니파시오 7세(984-985): 도둑질한 돈을 마구 뿌림으로 자기의 직위를 지탱하였다.
가톨릭 백과사전은 요한 14세를 이겨서(984년 4월) 그를 싼토 앙겔로의 지하 감옥에 가두고,
그곳에서 4개월 후 처참하게 죽였다....
일년 이상이나 로마는 자기 선조의 피에 흠뻑 젖은 이 요괴를 견디어 냈다고 한다.
7. 교황 요한 15세 (985-996): 그는 교회 공금을 축내 자기 친척들에게 줌으로써"
그 자신의 모든 행위에서 부정 이득과 뇌물을 탐내는 자" 란 평판을 얻었다.
8. 교황 베네딕 8세 (1012-1024): 그는 공개적인 뇌물로 교황의 직무를 매수하였다.
9. 그 다음 교황 요한 19세도 역시 교황권을 매수하였다.
그는 일개 평신도에 불과했으므로 성직자의 모든 단계를 단 하루만에 통과했던 것이다.
10. 교황 베네딕도 9세 (1033-1045): 로마를 통치하던 막강한 가문들과 금전거래로 말미암아
12살 소년 교황으로 옹립되었다.
그는 백주에 살인과 간음을 자행하였고 순교자들의 무덤들에서 순례 온 사람들을
약탈한 소름끼치는 자여서 사람들이 그를 로마에서 추방시켜 버렸다.
11. 교황 클레멘스 2세 (1046-1047): 왕 헨리 3세가 임명하였는 바
이는 더러운 성직매매나 간통에 물들지 않은 성직자를 로마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2. 교황 인노첸시오 3세 (1198-1216): 많은 교황들이 살인을 저질렀으나
살인하는 데 있어서 전임자들을 능가하였다.
그가 개인적으로는 살인하지 않았다 해도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사악한 것,
즉 종교 재판소를 창설하였다.
이 한 놈의 교황이 죽인 이단자의 수가 어림잡아 백만 명을 넘는다.
이후 500년간, 4000만 명이상...
13. 교황 보니파시오 8세 (1294-1303): 가능한 것이면 어떤 범죄, 예컨데 불신앙, 이단, 성직매매,
저속하고 파렴치한 부도덕성, 우상숭배, 마술, 성지 상실, 첼레스티노 5세의 죽음 등등,,, 범치 않은 죄가 없다.
그는 "혼자서 향락하고 여자들 혹은 소년들과 육욕적인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사람의 손을 비비는 것보다는 죄가 안된다" 라고 진술했으며
그러나 거의 믿을 수 없게 들릴 것이지만 1302년에 우남상툼을 발표하여
로마 가톨릭만이 유일한 참 교회이고 이 교회밖에서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공적선언을 핸 놈이 요 놈의 교황이다.
14. 교황 궁궐은 1305년에서 1377년까지 프랑스의 아비뇽에 있었는데
이 기간 중에 페트라르카는 교황청을 강간, 간음 및 모든 종류의 음란
복마전으로 탄핵하였다. 많은 교구의 사제들은 첩들을 데리고 있었다.
15. 교황 요한 23세 (1410-1415): 37명의 증인이 그를 사통, 간음, 근친
상간, 남색, 성직매매, 도적질, 살인한 자로 몰아 부쳤다.
한 지역의 증인들이 이 교황이 300명의 수녀들을 유혹해서 범했다고
입증했으며 이 교황의 비서 니엠은 교황이 불로그네에서 규방을 두어
거기서 200명 이상의 소녀들을 자기 음욕의 희생 제물로 삼았다고
실토했다.
바티칸의 기록도 교황 요한은 자기 형제의 부인과 변태 성욕을 자행하였
고 수녀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고 처녀들과 관계를 가졌고, 결혼한 여자
들과 간음을 하였고,,,, 그는 공개적으로 악마의 화신으로 칭한다.
16. 교황 비오 2세 (1458-1464): 많은 사생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여자들을 유혹할 때 썼던 방법들을 공개적으로 털어놨고 젊은 남자
들로 이같이 하도록 부채질하였으며 심지어는 방종하는 방법까지 그들에
게 가르쳤다.
17. 교황 바오로 2세 (1464-1471): 비오를 본받아 집에 첩을 가득 채웠다.
18. 교황 식스도 (1471-1484): 교회 직분을 팔아 전쟁 자금을 충당하고
교황권을 자기 자신과 친척들을 치부하는데 사용하고 사치스러운 연회로
로마 가문들을 능가하였다.
19. 교황 인노첸시오 8세 (1484-1492): 여러 여인들에게 16자녀를 둔
아버지였다. 이 자녀 중 몇은 바티칸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또 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투우 경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많은 교황들처럼 그도 교회직분을 늘려서 거액에 팔았다.
20. 교황 알렉산데르 6세 (1492-1503): 추기경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교황이 되었다.
로마의 여인 바노자 데이 카타네이와 죄 가운데 생활하였고 그 후 그녀의
딸 로사와 놀아나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는 자기 두 자매와 자기 자신의 딸 루크레티아에게서도 한 자녀를 두었다.
1501년 10월 31일 바티칸에서 드디어 섹스 잔치를 열었는데 인류 역사상
이렇게 혐오할만한 것이 두 번 다시 결코 반복되지 아니한 것이었다.
21. 교황 바오로 3세 (1534-1549): 추기경 시절에 세 아들과 한 딸의 아버지
였다. 자기의 대관식날 그는 증손자 두 명의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십대인 두 조카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며 축제시 가수와 무희들과
어릿 광대들을 동워하였고 점성술자들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22. 교황 레오 10세 (1513-1521): 그는 무한대의 쾌락에 무제한하게 자기
자신을 바쳤다. 그는 물릴줄 모르는 쾌락적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환락과 진탕 놀아나는 주연이 들어 있는 잔치와 엄청난 돈이 드는
연회를 베풀기를 좋아했다.
미사 중에라도 사제들이 외설적인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고, 두려운 신성
모독을 자행하였다. 12명의 나체 소녀들이 교황 궁전에서 저녁 식사 때
시중들었다고 루터는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루터는 파렴치한 죄들이 어떻게 자행하는지는 상상을 초월하며
이 죄악상들을 보고 들어 보아야만 믿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23.교황 레오 4세(847-855) 후 마인츠의 영국인이 2년 7개월 4일 동안
여자 교황으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