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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병철 회장의 종교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에 대한 반론
블루칼라
삼성 그룹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은 죽기 한 달 전 자신의 종교적 의문을 24개의 항목으로 정리해 성직자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이 질문의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이십여 년이 흐른 후 이병철 회장의 질문을 담은 문서는 인천 가톨릭대 교수인 차동엽 신부에게 전해졌습니다. 차 신부는 가톨릭 성직자 입장에서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을 썼고 그 내용을 모아 조만간 '잊혀진 질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한다고 합니다.
아래 내용은 차동엽 신부의 답변에 무신론자인 제가 반론을 달아본 것입니다. 원문이 중앙일보에 실렸는데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그대로 옮겨왔고, 차 신부의 대답은 최대한 원문을 살리면서 요약했습니다.
(원문기사는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숫자가 매겨진 질문은 이병철 회장의 질문이며 A1은 차 신부의 답변, A2는 무신론자로서 제가 쓴 반론입니다.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A1.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가청 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소리를 못 듣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문제가 아니다.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나?
A2. 공기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간단한 실험과 측정을 통해 얼마든지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그러나 신의 존재는 수천 년 전 경전 속에 기록된 내용 말고는 그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차 신부의 답변처럼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지 신의 한계가 아닐지도 모른다.그런데 누군가 당신에게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lying Spaghetti Monster)이 우주의 창조주라고 주장하며 당신이 FSM을 의심하는 건11차원적 스파게티 괴물을 인식할 수 없는 3차원적 인간이라서 그렇다고 한다면 수긍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종교인들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거나 심지어 죄악시하지만 삼위일체이신 스파게티 면발의 축복과 미트볼의 감동과 토마토 소스의 충만하신 은혜를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는 건 당신에게 이성(理性)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난 종교인들이 그 이성의 눈으로 자신의 종교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A1.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의 문제다. 만나면 증명이 되는 거니까.
A2. 지구상의 여러 종교를 믿는 각각의 종교인들도 저마다 ‘체험’이라는 것을 한다. 심지어 일본에서 지하철 독가스 테러를 일으킨 옴진리교 신도들도 자신이 믿는 신을 체험했기에 그런 테러를 저지른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도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며 특정 날짜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실제 직장과 학교, 재산을 내팽개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 체험들은 다 거짓이며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진실된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사도 바울이 예수를 체험함으로 탄생한 종교이며 이슬람교는 무함마드가 알라(=기독교의 야훼를 부르는 다른 이름)를 체험하고 창시한 종교이다. 세계적으로 무슬림 인구가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보다 몇 억 명이나 더 많은데 가톨릭 신자들이 무슬림의 ‘체험’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결국 자신의 체험만이 옳다는 아집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들을 따르는 광신도들 역시 저마다 자신의 체험을 주장한다. 그렇듯 모든 종교인들이 자신의 체험을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착시 사진 몇 장만 늘어놔도 인간의 감각이나 경험이란 것이 얼마나 속기 쉬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체험’은 증거가 될 수 없다. 타종교인의 종교적 체험을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면 자신이 경험한 종교적 체험 역시 망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선 안 된다.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A1. 하나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방식은 3차원적인 사고에 갇힌 것이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것은 은유적 표현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었다’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진화론은 창조론이라는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A2. 일단 개신교와 달리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종교의 폐해 중 하나가 명확히 증명된 과학적 사실까지도 종교 경전에 적힌 내용과 다르다고 해서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를 거부하도록 세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 역시 창조론의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이라는 인식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바이블에 기록된 '창조'는 이 우주의 탄생과 지구상 생명체들의 등장에 대해 석기 시대 고대인들이 꾸며낸 허황된 신화만을 보여줄 뿐이다.
진화도 창조의 일부라는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조사하고 밝혀낸 노력에 멋대로 종교가 숟가락을 얹는 행위다. 진화도 창조론의 일부라고 주장하려면 먼저 신의 창조행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앞선 2번 질문에 대한 답과 마찬가지로 각 종교의 경전은 ‘창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세상의 혼돈을 내려다보던 세 신령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남신(男神) 이자나기와 여신(女神) 이자나미를 창조했다.그런데 이자나미가 불의 신을 낳다가 죽게 되자 남편인 이자나기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저승세계(黃泉國)까지 쫓아갔다가 무섭게 변한 아내의 모습을 보고 도망쳐 나오게 된다.
이자나기는 저승에서 도망쳐 나와 부정해진 자신의 몸을 씻는데 왼쪽 눈을 씻을 때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이 태어났고 오른쪽 눈을 씻을 때 츠쿠요미 노미코토(月讀命)라는 달의 여신이, 코를 씻을 때 스사노오 노미코노(須佐之男命)라는 바다의 남신이 태어났다고 한다.
기독교인은 이런 일본의 창조신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일본의 창조 신화 역시 은유적인 표현이며 그 안에 진정한 창조의 질서가 기록되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그나마 차 신부는 진화론을 억지로 바이블의 창조와 끼워맞추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개신교인은 진화론을 '검증되지 않은 잘못된 이론'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진화론은 이미 생명체의 유전자 족보까지 샅샅이 밝혀내 검증이 끝난 상태다. (미싱링크니 뭐니 하는 딴지를 걸고 싶은 종교인이 있다면 제발 현대 과학이 밝혀낸 진화에 관한 책을 몇 권이라도 읽어본 뒤에 나서주길 바란다.)
기독교인의 스스로 바이블에 기록된 야훼의 창조를 증명할 수 없다면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섹스를 해서 만들어낸 것이 현재의 일본 열도라는 신화를 믿는 사람들이 '진화도 이자나기 신의 섭리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 당신 말이 다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한 번 기독교의 신을 체험하면 무엇이 진리인지 알게 될 것]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겠지만 앞서 말했지만 그 체험이란 것은 옴진리교의 테러리스트도 경험하는 것이다. 남의 체험은 망상이고 나의 체험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게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A1. 과학이 발달할수록 무신론자가 늘어날까? 1916년 미국 과학자 중 40%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를 했던 제임스 류바는 미래의 과학자는 무신론자 비율이 크게 늘어날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딴판이다. 8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미국 과학자의 40%가 여전히 무신론자라고 나왔다. 그 81년 간 과학 발전의 총량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약간의 과학은 사람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그러나 더 많은 과학은 인간을 다시 신에게 돌아가게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쾌하게 증명될 것이다.
A2. 종교인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자료는 왜곡된 것이 너무 많다. 1998년 E.J 라슨과 L.위덤은 종교에 대한 과학자들의 생각을 조사해 최고의 학술지인 네이쳐(Natuer)에 발표했다. (Leading scientists still reject God.
Nature, Vol. 394, No. 6691, p. 313 1998)
그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저명한 미국 과학자들 중에 인격신을 믿는 비율은 겨우 7%퍼센트에 불과하다.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90% 이상의 미국인들과는 전혀 다른 결과인 것이다.
영국 왕립학회의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왕립학회 소속 과학자들은 3.3%만이 인격신의 존재를 확신했으며 78.8%의 과학자들은 인격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했다. 해마다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3류 가십지에 실리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사기꾼들의 거짓말이었다. 노아의 방주는 발견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발견될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지질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그렇게 꾸며낸 자료를 믿고 실제로 노아의 방주가 발견된 것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인격신을 믿는다는 통계 역시 종교인들의 기대일 뿐이다. 네이처지에 실린 정확한 통계자료를 확인하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www.nature.com/nature/journal/v394/n6691/full/394313a0.html
답변을 내놓은 차 신부의 기대와는 다르게,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신이라는 망상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건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 베이컨의 헛된 기대였을 뿐이다.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A1.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고통은 주로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 온다.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은 일종의 ‘경고 사인’이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올바른 궤도를 찾기 위한 신호다.
A2.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은 세상에 무관심한 신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거리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감추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아래 사진은 굶주림에 지쳐 죽기 직전인 한 아이와 그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찍은 사진이다. 저 아이의 어떤 자유의지가 저런 처참한 상황을 만들었는가?
저것은 저 아이의 자유의지가 아닌 독재자와 전쟁과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신은 독재자와 전쟁을 일으키는 권력자의 자유의지를 침해할 수 없으니 독재자 밑에서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할까?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불쌍한 엄마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없는 살림에 십일조도 꼬박꼬박 냈지만, 젊은 시절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힘겹게 살아왔지만, 몇 달 뒤면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녀는 어린 자식들만 남겨놓고 차마 죽을 수가 없어서 신에게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기도한다.
살고 싶다는 마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지만, 의사도 포기한 그녀의 남은 수명을 결정하는 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신의 영역이다. 그녀를 살리거나 죽이는 건 신의 의지일 뿐,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게 아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로 어쩔 수 없는 그 부분이 바로 신이 일하는 영역이란 얘기다.
그러나 신은 자신이 일해야 하는 그 영역에서조차 일하지 않는다. 굶어죽어가는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나 쓰나미로 죽어간 수십만 명의 동남아인들에게 ‘그건 너희들의 자유의지로 인한 고통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6. 신은 왜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악인을 만들었나?
A1. 신이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이다. 최고의 사랑은 결국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엉뚱하게 쓰는 이들이 악인이 될 뿐이다.
A2. 자유의지 때문에 신은 독재자들의 만행마저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종교인들의 해석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엔 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간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겠다는 야망을 품는 건 개인의 자유의지지만, 그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는 건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악한 생각을 품는 건 인간의 자유의지지만, 그 생각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하는 건 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가스실에 몰아넣고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그때 신이 한 번만 국지적인 지진을 일으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장을 무너뜨렸다면 유대인이 탈출하도록 도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신은 어느 누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고도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단 얘기다.
죄 없는 아이티 주민 수십만 명을 지진으로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은 신이 히틀러의 인종 학살을 막기 위해 그런 작은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단 말인가? 그건 존재하지 않는 신을 변호하기 위한 서글픈 핑계일 뿐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야훼는 자신이 총애하던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삭에게 너무나 애정을 쏟자 그것을 질투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번제는 신에게 산 제물을 바칠 때 목을 자르고 팔다리를 잘라낸 뒤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몸통을 불에 태워 그 냄새를 신에게 드리는 제사 방법을 말한다. 즉 신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른 뒤 배를 칼로 갈라 내장을 꺼내고 불에 태워 그 냄새를 맡고 싶다고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광기 어린 명령에 한 마디도 토를 달지 않고 순종한다. 자신의 질투 때문에 아비에게 자식을 죽이라는 시험을 내리는 신. 그 모습에 어떤 사랑이 담겨 있을까?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죄일까? 인간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걸 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자신이 더 사랑 받지 못하면 죄악이라 치부하고 분노하는 존재다.
그런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다고? 그렇다면 그 자유는 자식도 맘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유가 아닌가?
결국 기독교는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게 아니라 끊임없이 신의 눈치를 보며 행여나 신의 뜻을 어긴 건 아닐까 죄책감에 억눌리게 만들었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녀를 그런 죄책감에 억눌리게 하고 끊임없이 부모 눈치를 보게 만들까? 그런 부모가 있다면 그들은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장난감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사야」 43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7 그들은 다 내 백성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자들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모든 것을 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나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라고?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가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슬퍼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A1.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는 하마르티아(Hamartia)인데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난 것이 죄다. 그럼 신은 왜 우리가 죄를 짓게 내버려 두실까? 그 역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A2. 자유의지에 대해 한 번 더 설명을 하겠다. 차 신부는 기준에서 벗어난 상태가 죄라고 말하며 그 기준을 신에게 두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기준으로는 죄지만 신의 기준에선 오히려 선한 행위일 수가 있고 반대로 인간의 이성이나 윤리로는 죄가 아닌데도 신의 기준에선 죄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불상이나 단군상을 파괴하는 것은 현행법상 타인의 재물과 문화재를 파괴하는 범법 행위지만 [너희는 그들의 신들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여 섬기지 말 것이며, 그들의 종교적인 관습을 본받지 말아라. 신상들을 다 부수고,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돌기둥들을 깨뜨려 버려라.]라는 신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것은 선한 행위이다. 다만 현대인들은 현행법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에 타종교의 신상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부추기지 않을 뿐이다.
반대로 동성애자 같은 성적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 많은 사회에서는 그것이 개인의 성적취향일 뿐, 죄가 되거나 반드시 고쳐야할 병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바이블의 가르침에 따르면 동성애자는 반드시 죽여야 할 죄인이다.
차 신부가 말하는 ‘죄악의 기준’이란 여성을 차별하고, 장애인을 차별하고, 성적소수자를 차별하고, 타민족을 차별하던 바로 그 야훼라는 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성과 인간의 인권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신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알 수 있다고 본다.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A1. 구약성경은 1000년 동안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것을 짜맞추고, 모자이크해 보니 어떤 그림이 나왔다. 그 그림을 봤더니 ‘하느님 그림’이었다.
긴 세월, 여러 사람, 다양한 음성을 통해 나온 말이 어쩌면 그렇게 합치될 수 있을까? 물론 표본오차 수준의 편차도 약간 있다. 그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어투와 성격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에는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조가 있다. 그걸 볼 때 성경의 원저자는 저 위에 계신 분이고, 성령이고, 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입과 손과 가슴을 빌려준 것이라고 본다.
A2. 근본주의자들은 바이블 내용에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성경무오설을 신봉하지만 가톨릭은 조금 유연한 입장이란 것을 안다. 그러나 바이블이 신의 가르침을 담았다는 입장은 넌센스일 뿐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뿐만이 아니라 유대교와 심지어 이슬람교의 근본이 되는 경전이 바로 모세가 썼다는 모세오경이다. 모세오경은 천지창조와 신이 인간을 만든 과정부터 시작해 그 인간들이 어떻게 신을 섬겨야 할지를 적은 기독교,유대교, 이슬람교의 뿌리가 되는 경전이다.
실제로는 모세라는 인물조차 신화 속 가공의 인물이며 모세오경은 모세가 아닌 후대의 사람들이 짜깁기한 내용물이라는 게 대다수 역사가들의 견해지만 그건 일단 뒤로해놓고 생각해보자.
모세는 모세오경을 저술할 때 수시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문구를 썼다. 즉 자신이 멋대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야훼가 하나하나 직접 명령하고 가르친 내용을 적은 것이라는 강조였다.
그런데 아무리 신의 기적이라고 핑계를 대려고 해도 앞서 말했듯이 모세오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게 분명하며, 이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했다는 출애굽 또한 없었으며, 유대인들이 전쟁에서 이기도록 도와주기 위해 신이 태양을 멈추게 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태양이 멈췄다는 이야기는 지구가 자전을 멈췄다는 얘긴데 적도 부근의 자전 속도는 초속 463미터 정도다.
그런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게 되면 사람들은 대기권 밖으로 튕겨나가게 된다.
종교인들은 그게 바로 신의 기적이라는 말로 넘어가고 싶겠지만 그렇다면 중동 지역이 아닌 다른 민족의 기록에도 태양이 멈춘 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근처 이집트나 다른 문명들에는 태양이 멈춘 날에 대한 기록이 없다.
간단한 상식이지만 만약 노아의 홍수가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면 고대 4대 문명, 즉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은 일시에 멸망했어야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집트 문명이 홍수로 멸망했다면 4500여년 전에 건축된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같은 건 존재해선 안 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경우 기원전 6000~7000년 전 발생해서 노아의 홍수 시기엔 우르크 문화(기원전 4000년~3100년)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홍수로 멸망한 적이 없다는 게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증명돼 있다.
경전의 내용이 허황된 기록과 신화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안에 기록된 신의 존재는 참이라고 말한다면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인간이 되어 신의 아들과 결혼해 우리 민족의 조상이 됐다는 단군신화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11차원적 존재인 ‘인간이 된 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3차원적 인간의 문제로 치부하면 되니 말이다.
그러니 어떤 질문에 대해 ‘그 답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대답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힌두교 경전인 베다, 우파니샤드, 수트라에 힌두교의 신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힌두교를 참된 종교라고 말하지 않듯이 바이블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야훼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은 아닌 것이다.
바이블에 기록된 내용은 너무나 많은 오류가 있으며 그 내용 또한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A1.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무신론자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무한을 동경한다. 영원을 갈망한다.
그런 염원이 하나의 형식이 됐을 때, 종교가 된다.
A2.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인간이 상상해낸 결과물이 사후세계와 신이다.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인간의 영혼이 영원토록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판타지다.
연말이 되면 어린아이들은 산타크로스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산타크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바람과 실제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서글픈 피터팬 증후군을 앓는 것이다.
피터팬과 팅커벨 요정이 사는 네버랜드를 꿈꾸는 건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자유다. 하지만 당신의 신이 만든 영원한 지옥불을 믿지 않는 사람을 불쌍한 죄인 취급하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다.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고? 죽음 앞에서 담대했던 무신론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해선 안 된다.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A1. 물질계를 초월하는 생명현상, 그게 영혼이라는 거다. 영혼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본래의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
A2. (누군가에겐 슬픈 소식이 되겠지만) 영혼이란 없다. 죽음은 우리 정신의 완벽한 소멸을 가져올 것이며 난 그것이 그렇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이킹 전사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전사들의 영혼이 기거하는 발할라(Valhalla)에서 인류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를 대비해 전쟁 훈련을 계속한다고 믿었다. 현대인들은 그렇게 죽어서까지 전쟁놀이에 미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기독교인도 전쟁에 미친 바이킹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신을 신화로 치부할 것이다. 그리고 생전의 선행과 악행에 따라 다음 생에는 브래드 피트 같은 훈남으로 태어나거나 바퀴벌레로 태어난다는 타 종교의 윤회사상도 비웃음의 대상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을 믿고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은 어떤지
기독교인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란다.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A1. 크게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가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계시 종교다.
힌두교와 불교는 자연 종교에 속한다.
A2. 계시 종교든 자연 종교든 현존하는 지구상의 주류 종교들은 사후세계를 받아들이고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미끼로 현실에서의 삶을 희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인들이 제우스의 번개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 야훼, 알라와, 시바와, 부처에게서도 자유를 찾을 때가 되지 않았나?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A1. 예전에는 천주교밖에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거의 구원이 없다는 수준으로 얘기했다. 그러다 바뀌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환점이었다. 천주교가 좀 더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다른 종교의 면면을 공부해 보니 천주교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던 거다.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
A2. 시대에 따라 교리를 바꾸느라 수고가 많다. 그런데 바이블 어디에도 다른 신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없다. 오히려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은 반드시 죽여야할 대상이고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곳곳에 적혀있지만 말이다.
인간의 문명과 인권의식, 합리적인 이성이 발전할수록 종교 경전에 담긴 모순과 폭력을 부추기는 그릇된 가르침을 비판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전에 기록되지도 않은 신의 뜻을 멋대로 해석하곤 한다.
난 전지전능한 신이 상대성이론이나 페르미 함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걸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종교에서 과학의 정의를 찾겠다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종교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서고 나침반이다. 그 나침반이 구약시대엔 북쪽을 가리키고 신약시대엔 남쪽을 가리켰다가 현대엔 또 새롭게 해석을 해서 서쪽을 가리킨다면, 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신은 어쩌다가 윤리관마저 인간들의 발전을 숨차게 쫓아와야 하는 처량한 존재가 되었을까?
난 성경에 묘사된 신의 성품과 가르침을 근거로 할 때 오히려 조용기나 김홍도 목사 같은 근본주의적 성경해석이 기독교의 본질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기독교의 문제는 결국 경전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신론자인 나에게 있어서 신학(神學)이란, 현대인의 이성과 윤리관에선 도저히 이해(용납)할 수 없는 신의 가르침을 사랑인 것처럼 포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A1. 앞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하겠다. 내용이 겹친다.
A2.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종교의 목적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경우 야훼를 믿는 신자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먹든지 마시든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며 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신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게 바로 착하게 사는 것 아니냐고 묻겠지만 그건 오해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경전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의외로 받 아들여지겠지만 바이블 속에서 신은 지독한 차별과 폭력을 부추긴 악신(惡神)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 성적소수자에 대한 차별, 타 민족에 대한 차별까지, 신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폭력과 학살을 부추겼다. 그것이 바이블에 기록되었는 신의 성품이다.
현대의 성직자들은 그런 차별과 폭력을 부추기는 바이블의 가르침이 하나의 비유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서글픈 변명일 뿐이다. 아래 내용은 신명기 13장에 기록된 '다른 종교를 가진 가족을 대하는 방법'이다.
6-7 여러분의 형제나 자녀나 사랑하는 아내나 여러분의 가장 친한 친구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의 신들을 섬기자고 은근히 유혹하여도
8 여러분은 그 꼬임에 넘어가지 말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말며 정에 끌려서 불쌍히 여기거나 그들을 감싸지 마십시오.
9 여러분은 그런 자를 사정없이 죽여야 합니다.
10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여러분을 구출해 내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도록 여러분을 유혹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을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물론 저 얘기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서 신의 성품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저 내용을 읽고 '기독교가 사랑과 평화의 종교'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독해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수험생이 그런 독해력으로 대입시험을 치른다면 100% 떨어질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A1. 죽음 너머의 세계는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이 물음에는 나의 주관적인 신념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한다. 왔던 곳으로 다시 갔다는 뜻이다.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A2. 사후세계에 대해 불교나 힌두교에선 윤회로 설명한다. 당신이 죽은 뒤에 바퀴벌레나 멸치로 태어나게 될 거란 얘기를 웃어 넘길 수 있다면 온 우주를 창조한 야훼라는 신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았다거나 동성애자라거나 하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당신의 영혼을 지옥불에 내던져 고통받게 할 것이라는 (불쾌한) 우화도 피식 웃으며 넘길 수 있지 않을까?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A1. 악인이 버젓이 잘 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부조리 현장에서 신이 침묵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공정 사회를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기회를 주는 거다.
죽기 전에 악인이 회개할 수도 있고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는 거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신의 자비를 본다. 벌은 사후, 또는 종말 때 주어진다.
A2. 기독교인들은 신의 성품을 ‘공의롭다’라고 말한다. 온갖 악인들이 부귀와 권력을 쥐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착취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일이지만 죽은 뒤엔 그런 악인들에 대한 신의 공의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난 신이 인간에게 기쁨과 행복만 주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 땅의 일들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책임이지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그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저 말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독가스를 마셔가면서 죽어간 유대인들과 킬링필드에서 학살로 인해 죽어간 수많은 캄보디아인들, 쓰나미로 죽어간 수십만 명의 동남아인들, 그리고 지금도 굶어죽어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들려줘 봐라. 그게 과연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이었는지 말이다.
신앙심 깊은 중산층 부모 밑에 태어나 자연스레 기독교인이 되어 별다른 고생 없이 살다 죽은 사람의 영혼과, 북한땅에 태어나 예수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고 하루 먹고 살 걱정만 하다가 굶주림에 죽어간 사람의 영혼이 신 앞에 나란히 섰다고 가정해 보자. 고생뿐인 삶을 살다가 굶어죽은 사람에게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행 티켓을 끊어주는 것이 야훼라면 그런 존재를 공의로운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구원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회에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원조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 바로 가톨릭이었다.
인간들의 비판에 교리를 바꿨는지는 모르지만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신에 대한 죄책감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가톨릭 역시 개신교와 함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자신들의 조국을 점령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식민지 백성으로 고통받던 유대인들에게 로마서 13장을 통해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
1 누구든지 정부 당국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력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그 권력을 거역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그런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로마에 항거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 자들이 있던 시대였다. 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던 그 시대, 바울은 권력이 신에게서 나온 것이니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식민지 백성의 도리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바울의 가르침에 울컥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바이블이라는 권위에 세뇌된 것이다.
종교인들은 이 땅의 부조리와 악인들이 횡횡하는 현실을 보면서도 ‘저들은 결국 죽어서 심판을 받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현재의 고난을 견뎌낼 것이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심판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지금 당장 현실사회의 부조리와 잘못을 개선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 과연 이 세상을 올바르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16.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A1. 그것은 나눔을 강조한 예수님의 메시지다. 부자에도 여러 종류의 부자가 있다. 이웃과 잘 나누는 부자가 있다면 당연히 천국에 가지 않겠나?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선인이 되기도 악인이 되기도 한다. 부자도 늘 그런 선택 앞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부자는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
A2. 바이블에 기록된 우화적 교훈에 대해 따로 해석을 달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눔에 대해 이야기하면 오히려 교회가 들고 일어나 빨갱이니 좌파니 하는 현실은 개탄스럽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다. 적어도 바이블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은 자본주의의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네가 가진 모든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에 나를 따르라고 말한 예수가 지금 한국의 대형 교회에서 똑같은 설교를 한다면 예수조차도 빨갱이로 몰려 쫓겨날 것이다.
17. 이태리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A1. 이 물음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살아보면 상당한 질서가 있다. 물론 마피아가 있지만 그건 극소수의 범죄집단일 뿐이다. 이탈리아 국민의 평균적 윤리의식, 그들의 기준은 엄정한 편이다.
A2. 난 종교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도덕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않는다. 흔히 종교인은 무신론자를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치부하지만 그것 역시 사실과 다르다.
윤리는 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진화심리학을 통해서도 충분히 검증된 사실이지만 집단 생활을 하는 무리에게 있어서 이타적인 행동은 집단 전체는 물론이고 구성원 개개인에게도 이득이 된다.
종교가 없는 동물들의 무리에서도 이타적인 행동은 흔하게 관찰된다. 그리고 인간 역시 종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타적일 수 있는 존재다.
성추행 목사나 신부들이 수시로 뉴스에 오르내릴 때마다 기독교인은 그건 극히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자의 범죄도 일부의 문제일 뿐이다.
종교가 있든 없든, 사람은 악할 수 있고, 반대로 선할 수도 있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인 와인버그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종교가 있든 없든 악인은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선한 사람은 여전히 선을 행한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A1. 이 질문에 100% 동의한다. 다를 바가 없다. 똑같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가 어우러질 때 조화로운 신앙이 가능하다. 이 셋 중 하나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몽상가나 다혈질 행동파가 될 수도 있다.
주로 ‘오직’을 강조하는 사람이 광신도가 될 소지가 많다. 오직 믿음, 오직 실천, 오직 성장, 오직 복지, 오직 우(右), 오직 좌(左), 오직 사랑, 오직 정의도 다 위험한 것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보편성을 잃을 때 미치게 되는 것이다.
A2. 나 역시 차 신부의 대답에 동의한다. 이성과 감성, 의지가 어우러지는 것이 조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교인 대다수는 그 세 개의 조화 중 이성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심지어 죄악시한다. 난 유니콘이나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을 믿지 않을 수 있는 이성이 자신의 종교에도 적용되기를 바란다.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A1. 공산주의는 천주교 신자가 택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에서 이탈한 무신론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A2. 무신론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비겁하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무신론은 신본주의에 반대해 나온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인본주의자로서의 무신론자는 어떠한 불합리한 차별과 폭력에도 반대한다.
수많은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와 공산주의자들을 무신론자로 치부하려면 히틀러 역시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의심치 않았던 가톨릭 교도였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A1. 통계청 조사를 보면 종교인의 범죄 비율보다 비종교인의 범죄 비율이 더 높다. 그나마 종교인이 범죄 수치를 낮춘 거다. 그럼에도 이 질문이 시사하는 바를 깊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종교인이 더 사회정화 기능을 하지 못하고 더 성숙하게 살지 못하고 좀 이기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A2. 통계청의 자료를 다른 형태로 조사해보면 어떨까?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을 대상으로 종교를 조사해보면 무신론자보다 종교인의 숫자가 훨씬 많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용서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자신의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교도소에서 종교를 가지게 된 사람은 출소 후에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까? 참고로 살인이나 강도 사건 같은 강력범죄의 재범률은 60%가 넘는다. 감옥에서 종교를 갖게 된 범죄자들 역시 출소 후에 다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아주 높다는 얘기다.
연쇄살인범이 예전에 교회 성가대원이었다고 언론이 밝히면 ‘그는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길길이 뛰는 종교인들이 종교란에 ‘무교’라고 쓰는 사람들을 모두 무신론자로 통계에 넣고 계산하는 건 어리석은 통계의 오류다.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무신론자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은 적극적인 인본주의자로서의 무신론자가 아니라 단지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 분류에 따르면 새해엔 신년운수를 점치러 다니고 혈액형별 성격론을 믿는 사람들도 무신론자의 범주에 넣게 된다는 말이다.
앞에 나온 질문에도 언급된 얘기지만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도인 이탈리아의 범죄율은 왜 높은가? 일 년에 몇 번 성당에 나가지도 않지만 종교란에 자신은 ‘가톨릭’이라고 적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환경에서 종교와 범죄율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건 넌센스가 아닐까?
마찬가지 기준으로 무신론자의 범죄율을 조사하는 것도 조사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21.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獨善)이 가능한가?
A1. 교황의 무오류권은 오해가 있다. 무오류권은 교황좌에서 특별한 교리, 엄중한 진리의 문제에 관해 천명할 때 무오류권을 발동한다. 주로 기준이 애매할 때 이 기준을 따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발동된다.
그러나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도 시간이 지나면 수정될 수 있다. ‘타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인데, 결국 수정했다.
A2. 교황의 무오류권은 종교 내부에서 매 번 바뀌는 해석의 문제이므로 별도의 반론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22. 신부(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A1. 신부는 예수님을 대리해 양떼를 돌보는 사람이다. 1965년(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양떼였다. 그 이후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양떼다.
수도원 소속인 수녀와 수사는 다 수도사다. 그들은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해 영혼의 갈무리를 하는 사람이다. 신부와 수녀의 독신은 ‘나는 여기에만 헌신합니다’라는 서원이다.
기혼과 독신이 섞여있다가 13세기부터 사제는 독신이 됐다. 수도사는 그 이전부터 독신수도 생활을 했다.
A2. 난 종교인이 아니지만 개신교 목사처럼 결혼을 하며 처자식을 부양하는 성직자는 가톨릭의 신부보다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개신교는 성직자가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는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도록 시스템이 갖춰진 종교다.
상대적으로 가톨릭은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함으로 재산과 종교적 권력을 대물림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갖춰놓고 있다. 그러나 성욕이라는 본능을 억누르고 살아가다 보니 가톨릭 신부의 성범죄나 숨겨둔 처자식에 대한 문제는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신의 종이 되려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사는 걸 권했지만 성욕을 참지 못하겠거든 결혼하라고 한 것이다.
남자로서의 욕망을 거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한데 신부든 승려든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성직자가 많은 건 당연한 결과다.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A1. 이 문제는 역사성 안에서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노동 착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태일씨 등은 하루 15시간 이상 노동했으니까. 그런데 모든 기업주가 착취자라고 하면 곤란하다. 좋은 기업인도 있고 나쁜 기업인도 있다. 그건 개별적 사안이다.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했다. 다만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이나 폐해에 관심을 갖는 건 맞다. 거기에 약자와 소외된 자가 있기 때문이다.
A2. 기본적으로 차 신부의 의견에 공감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는 거의 언제나 기득권층의 편이었고 실제로 권력을 쥐고 세상을 다스렸던 적도 많다.
교황은 권력 그 자체였으며 면죄부를 팔아 사람들의 죄책감을 금전거래의 대상으로 삼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침략과 폭력의 전도사를 자처한 것이 기독교의 역사다.
씨족 부락에서 제정일치 사회와 왕국, 공화국, 현재의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다양한 시스템을 도입해 시험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경제와 관련된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는
이미 몰락한 공산주의와 비교해 많은 장점을 가진 시스템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는 부의 재분배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최고의 롤모델로 삼고 있지만 최근 그런 미국에서조차 금융자본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반발이 조직적으로,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완벽한 시스템은 없겠지만 인류의 정치, 경제 시스템은 계속 개선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가 그런 시스템의 단점을 보완하고 어두운 면을 지적하는 비판자로 남아 소외된 계층을 보듬어 주길 기대하지만 난 종교에 그런 역할을 맡겨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 단체들이 구제 사업에서 손을 뗀다면 우리나라의 사회 복지는 심각한 구멍이 뚫릴 거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문제의 핵심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진짜 문제는 복지시설과 인력의 상당수를 종교가 감당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사회 구조다.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진 유럽 국가들을 보면 종교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정부가 상당부분 종교에 떠넘기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정부가 앞장서서 제도적으로 사회안전망을 갖춰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을 거다.
가난은, 그리고 굶주림은 종교의 세일즈 포인트가 아니다. 빵 한 조각을 건네면서 예수의 이름을 파는 건 페어 플레이가 아니란 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복지 시설은 거의 대부분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건 결국 내가 낸 세금으로 교회가, 절이 생색을 내고 있다는 말과 똑같은 거다. (나같은 무신론자가 살면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울며 겨자먹기로 교회가 운영하는 시설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가난 구제는 나라가 앞장서서 해야 하는 게 맞는 거다. 그걸 왜 교회 같은 종교 단체에게 떠넘겨서 전도의 도구로 활용하게 만들고 내가 낸 세금으로 종교인들이 생색내게 만드는 걸까?
복지는 종교가 아니라 정부와 모든 국민이 함께 참여해야 할 '우리의 문제'다. 종교가 복지를 떠맡고 있으니 호의를 갖고 바라봐야 한다는 건 자신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A1. 성경에는 종말이 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종말을 보는 시각이 좀 다르다. 파국만이 아니다.
구원을 위한 최종 추수의 시간으로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갈린다. 종말을 기대하는 사람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 신앙인의 특권은 종말을 희망사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종교는 결국 종말 너머를 향하기 때문이다.
A2. 언젠가 종말은 온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가 천사들과 함께 다시 지구로 귀환하는 날을 뜻하지 않는다. 태양이 핵융합의 재료가 되는 수소 에너지를 다 쓰고 수명이 다할 때가 되면
지구도 멸망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수십억 년 후의 일이다.
지금도 곳곳에선 종말론자들이 판치고 있지만 지금까지 수십억 년 동안 지구가 멀쩡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수십억 년 동안은 멀쩡할 것이다.
그러니 죽음 이후에 있을 거라는 신의 심판 따위를 두려워하며 현재의 삶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아래 내용은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의 일부다. 나중에 책을 내게 될 때는 내용이 바뀔 수도 있지만 저 내용이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는 당신을 위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천국에 있을 거라는 믿음이 네 슬픔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렴.
죽음은 끝이 아니고 언젠가는 자신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소망.
그것처럼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상상력이란 없겠지.
하지만 그런 위로를 받기 위해 인간을 차별하도록 부추기고, 죄책감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며, 인간의 삶은 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해야 한다는 종교 교리에 빠지진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기독교든 불교든 힌두교든 아니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을 믿는 것이든,
인간의 존재를 고작 신의 노예로 묶어버리는 교리에 굴복해선 안 되잖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상상해낸 것이 종교라면 굳이 그 상상력으로 지옥까지 그려낼 필요는 없지 않겠어?
지옥은 없어. 신을 모른 채 죽은 아기들이 간다는 림보(Limbo)도 없고 신을 믿지 않았으되 지옥에 가기엔 착하게 산 사람이 간다는 연옥(Purgatorium)도 존재하지 않아.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나라카(불교의 지옥.범어로 Naraka)도 없고 죽은 바이킹의 영혼들이 모여 영원히 전쟁 훈련을 한다는 발할라(Valhalla) 따위도 모두 빈곤한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야.
단언해도 좋지만, 만약 온 우주를 만든 창조자가 있다면 누군가가 재산의 십분의 일을 바치지 않았다고 해서, 동성연애자라고 해서,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혹은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는 네 마리 거대한 코끼리를 믿지 않거나 심지어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도, 그가 너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 던질 일은 없어.
그렇게 괴팍한 편집광에 애정결핍증을 앓고 있는 옹졸한 신을 믿는다는 건 인류의 상상력이 불순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