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독들의 교파, 이단, 통계에 관한 자료(개독 중심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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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독들의 교파, 이단, 통계에 관한 자료(개독 중심의 자료)

한님 0 6,581 2012.06.05 16:33
기독교 교파
 
1993년도 기독교연감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현황은 장로교가 62개의 교단 (기독교 장로회 포함), 감리교가 5개 교단, 성결교가 3개 교단, 침례교가 5개 교단, 오순절 계통이 7개 교단이며 기타가 9개 교단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교파의 분열은 이미 선교가 시작되었던 초기부터 내재되었던 여러 요인, 즉 선교사의 배경과 선교 의도, 선교지 분할에 따른 지역적 갈등 구조 및 정치적인 복합적인 구조적 요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만 실제로 교회의 분열이 심화된 것은 해방 이후 교권을 중심으로 한 쟁투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분열의 배경과 과정을 여러 면에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역사적 기독교가 비역사화 또는 탈 역사화할 때 불가피하게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나면서 분열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와 상황의 분석이 선행되고 그 분석의 틀에서 교회가 어떤 대응을 하였으며 어떻게 분열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다른 한편에서 보면 필요에 따라 일치와 연대를 이끌어 가도록 하였다.  
1945년 일본의 급작스러운 패망으로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국의 기독교회는 새로운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어려움이란 기독교의 수많은 지도력들이 일제 말엽에 한국교회를 일본기독교로 병합시키는 과정에서 친일세력으로 돌아섰다는 것과,  신사참배로 인한 신앙적인 변질이 뼈아픈 치욕이 되었거나 그 반대의 경우 신앙적인 오만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강제적인 폐교나 추방으로 인하여 사라졌던 교회가 재건을 도모하면서 새로운 갈등의 요인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남북한에 각각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진주하면서 식민통치를 대치하는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후 실질적으로 친일세력이거나 식민 통치기의 기득권 세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미 해방 전부터 심각하게 대립되어 온 바 있는 이념논쟁이나 해외와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간의 대결은 교회의 재건 과정에서 새로운 변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그 혼란의 과정에서 기독교회의 일차적인 과제는 역시 교회의 '재건'이었다. 여기에서 '재건'의 신학적 의미나 현실적인 개념까지도 여러 가지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회의 원형 자체가 부서진 상황에서 교회의 '재건'이란 신사참배 등으로 인하여 상실한 올바른 신앙의 회복으로부터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지역 중심으로 발전되어 온 교단의 회복에 이르기까지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해방 50년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거의 반복되면서 이합 집산이 지속되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기독교가 엄정하게 일제치하에서의 왜곡되었던 교회의 현상을 청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6.25 전쟁 이후 남북대결의 과정에서 전쟁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물론이려니와 남북분단을 오히려 고착화시키면서 이념대결을 조장해왔기 때문이다.  
2. 분열의 배경과 상황
한국교회의 분열은 시대적인 상황 즉 정치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이에 대한 교권적 또는 신앙적인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향방이 순수하게 내적인 요인들, 예컨대 신학적 노선이나 신앙적인 표현에 의하여 좌우되기보다는 외적인 현상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따라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도 교회의 여러 배경에 따른 세력간의 대립현상이 이해관계를 기초로 발전되어 왔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교회외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교회의 분열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기독교의 선교과정을 제1기(1910년 이전), 제2기(1910-1939년), 제3기(1939-1945년), 제4기(1945-1953년), 제5기(1953-1961년), 제6기(1962년 이후)로 분할할 수 있을 것이다.    
제1기의 기간 중에 교회의 분열(분열이라기보다는 대립과 경쟁의식기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은 그 배경이 선교사 파송국의 이해와 함께 정교분리를 내세워 비정치화라는 신학적 이론에서 지배계층과 일정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교단의 신학적인 입장과 지역 선교의 방향을 정리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선교열의에 따른 열광주의에 몰입해 있던 선교사들이 동양선교에서 비기독교의 문화권에서 가급적 지배층과의 충돌이 없이 교회를 정착시켜 나가려는 필연적인 입장이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시의 비정치화의 방향이 한국교회를 교조적인 배타적 신앙과 교파신학주의를 통하여 교회와 신앙을 비현실적으로 이끌어 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선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확장함으로써 한국전체를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 두려는 선교사들의 우월감은 한국의 사회적, 문화적 또는 종교적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지배'와 '통합' 일변도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는 기독교의 전래가 개화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과의 연대에서 이루어진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교조적인 입장은 실제로 한국교회의 성격을 정치적으로는 지배층의 지지세력으로, 신학적으로는 절대적 배타주의를 몰고 왔으며, 현상적으로는 지역분할에 따른 지역중심주의에 편승하는 특징을 결과적으로 초래하였다. 이러한 지역중심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교단의 분립이나 교회정치는 물론 신앙노선까지도 영향을 미쳐 왔다. 이 당시의 일치 운동이란 선교사들이나 선교 단체들이 서로간의 협력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제2기의 특징은 기성교회의 부흥운동과 이에 대립하여 나타나게 되는 주체적인 교회운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성교회의 경우 그 분열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선교를 담당했던 외국선교부의 성격에 따라 약간의 신학적 차이가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거의 모든 교회가 사회 경제적인 고난을 외면하고 축자 영감설과 성경 무오설 그리고 교회 절대주의에 몰입하여 결과적으로 민중과 유리된 교회현상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시의 교회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인 경향과 진보적인 경향이 성서해석이라는 관점에서 대립된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대립은 그 자체가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교회를 정치 사회 현상과 괴리 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에 반하여 주체적 교회운동은 비록 그 숫자에서는 소수였다고는 하나 기성교회에 대한 새로운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고난을 대응하는 신학 운동이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민족교회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교회의 양상은 보수적 복음주의교회와 진보적 전통주의교회 그리고 토착적 민족교회의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제1기의 영향 아래 그 양상이 발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3기는 해방 이후의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교회로서는 가장 큰 시련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 첫째가 신사참배의 강요에 의한 교회의 신앙적 훼손과 이에 따른 교회의 분열이었다. 이 신사참배로 사실상 한국교회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셈이며 이후의 한국교회는 적극적인 친일과 함께 일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둘째는 1945년 7월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됨으로써 한국기독교는 완전히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결과적으로 친일의 굴레를 벗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선교 초기부터 전승되어온 바 있는 비정치화의 신학이 국가지배권과 교회권위가 서로 상충됨이 없이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사실상의 교회의 정치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경향은 상황에 따라 적절한 강도를 지키며 교회 내면에 흐르는 전통이 되었다. 따라서 제3기의 교회 특징은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적 역동성을 상실한 채 일제 통치의 일선에서 '황국 신민화'를 부르짖는 가장 어둡던 암흑의 시대를 연출하고 말았다.
일제말기에 있어서 신사참배를 둘러싼 현상에 대하여 두 가지의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첫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 그 자체가 순수한 신앙운동으로서 당시 교회가 표명할 수 있는 저항운동의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과, 둘째는 재림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근본주의적인 신앙행위는 호교론적 입장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는 견해이다. 신사참배 문제가 결국 한국교회의 분열의 하나의 구체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나 사실 이 현상은 이미 기독교 초기 수용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연속선 상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신사참배는 어떤 방법으로든 교회를 형식적으로라도 지켜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민족의 구원(독립)을 외면한 교회의 변절이었고, 초기 기독교의 정교분리원칙도 민족의 존립이나 민중의 구원이라는 관점보다는 교회중심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교 분리 주의자들이나 식민 통치하에서 통치권과 일정한 타협을 하면서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교권주의자들로서 해방 이후 교회의 기득권자로서 계속 교회를 지배하면서 역사적으로 교회를 일치시켜 나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는 점을 중시하여야 한다.   
  3. 해방 직후의 교회 분열과 연합 과정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에 급격하게 분열을 하게 되었다. 해방 그 자체가 연합군의 승리에 의한 일본의 패전으로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남북으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분 아래 점령군으로 들어와 새로운 통치력으로 등장한 미소군정은 한국사회를 총체적인 혼란으로 몰아 넣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건국의 과정에서 여러 세력간의 대결로 치달아 정작 이루어내야 할 해방의 새 역사를 창출해 내는 데 실패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 갈등은 교회의 재건과정에서 극명하게 대립적인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당시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는 교회의 재건이라는 것과 함께 남북의 이념적 정치적 대립이 가시화되면서 이러한 현상이 교회에 미친 영향 등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걸림돌이 있었다. 첫째는 신사참배라는 과거에 대한 신앙적인 회복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라는 점과 둘째는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통합된 교회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현상 유지론과 함께 본래의 각 교파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주장 속에서 야기된 의견대립, 셋째는 식민통치의 청산과 함께 통일된 독립정부의 건립을 위한 정치적 이념적인 갈등 등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를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만들어냈다.
1) 정통교회와 민족교회
우리는 해방 이후 교회재건 과정에서 교회를 두 가지의 유형으로 구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기준은 될 수 없지만 정통교회는 '재건파'로 볼 수 있고 민족교회는 '고신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폐쇄되거나 통합되었던 교회의 재건을 그 중심과제로 삼았다면 후자는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수성을 내세워 참된 신앙의 회복을 그 중심과제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구별을 받아들이면서도 남북의 이념적 대결과 함께 건국에 대한 기본 방향과 방법상의 대립상황에서 양자가 모두 해방의 조국을 이끌어 새로운 나라를 형성해가려는 정치적인 영향력으로부터는 멀리 있었으며, 특히 고신파가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적 배경에 따른 지역성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고,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정통교회나 민족교회의 외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교회의 지역적 기득권의 갈등이 분열의 요인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양자가 모두 민족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비정치화의 입장에서 처리하면서 교회의 확장 또는 신앙자체에만 주력했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신앙이나 정통성의 논쟁 자체가 역사 창출의 동력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2) 교파주의와 연합운동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통합되었던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측은 교파환원이라는 주장 아래 과거 불행한 역사를 벗어나 이를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감리교는 먼저 교단 환원을 내세우고 재건파와 부흥파로 나뉘어 세력권의 확장을 시도했으나 결국 명분에 밀려 1949년에 합동하게 되었다. 장.감의 연합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결과 성결교나 침례교도 별도의 교단을 설립하고 독자적인 교파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건국과정에 참여를 주장하면서 교단의 연합 또는 일치를 내세우는 연합운동측은 '조선기독교단'이라는 이름 아래 전향적인 일치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1946년 9월 3일에 교파연합 운동기구인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창설함으로써 새로운 교회연합운동의 길을 열게 되었다. 이 때에 연합회를 구성한 교단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4개 교단과 7개의 해외 선교부 및 9개의 기독교 단체들도 가입하였다. 그리고 이 단체는 정부수립 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로 그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연합 운동에 참여한 단체 가운데는 교회 자체보다는 기독교 사회 단체들이 재건되면서 정치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활동들이 자연히 정치적 연대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가운데에도 YMCA.YWCA 등의 재건과 함께 대한 기독 학생회 전국연합회(현재의 한국 기독 학생 총연맹의 전신)가 조직되어 학생운동이 활성화 되면서 이 활동의 영향이 교회연합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운동은 복음주의적 교회확장과 교권확립이라는 교파의 이해를 지양하고 연합활동을 통한 선교의 폭을 넓혀 나가면서 교회연합운동의 정신과 방향을 잡아 나가게 되었다. 이때의 연합회의 활동은 "기독교 운동"을 전국적으로 또는 세계교회와의 연대 아래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3) 비정치화와 반공
남한의 교회에 있어서 친일파의 척결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과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대부분의 교회가 소극적이었는데 특히 건국과 함께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판적인 세력들은 좌파로 몰리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교회가 교권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에 의하여 장악되면서 상당한 기독교 인사들은 이들의 친미나 친일의 경향을 비판하고 나서서 민족의 독자적인 입장을 내세우게 되었으며 교회 내에 비판적 좌파운동을 벌여 나가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북한에서는 교회가 여러 방법으로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자 김일성 세력은 '북조선 기독교도 연맹'을 조직하여 정치적으로 이들을 통합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해방 직후의 교회의 현상은 신앙적 대립(신사참배와 일제청산의 문제), 교권적 대립 (교단의 조직과 지역성), 이념적 대립(정치적 문제), 신학적 대립(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문제) 그리고 세대적 대립(전통교회와 청년단체의 활동)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경향은 끝내 한국교회의 해방 후 50년 동안 변함없이 때로는 갈등으로 때로는 연합의 동기나 동력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동란 전까지의 교회일치운동은 정치적 혼란기에서도 여러 교파와 선교부, 그리고 각 사회단체가 함께 상당한 사회적인 영향력을 준 것은 사실이며 비록 일제의 청산이라든가 교회내의 반민족적 행위자들을 척결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더라도 초기 교회 연합 활동이 폭 넓은 회원교회와 단체를 연합하는 포용력이 있었다는 것은 시대적인 요구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전후의 교회 분열과 사회참여운동
1) 교회의 이념적 대결과 분열
한국전란은 한국교회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갈래의 대립관계를 해소하지 못한 채 분열과 혼란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전쟁과 함께 이념적 대결의 골을 깊게 만들었고 특히 월남 기독교인들에 의한 철저한 반공이념은 자신들을 결속하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한국교회를 반공, 친자본주의, 지역적 결속, 그리고 친정부나 반혁명의 성격으로 이끌어 갔다.
교회의 분열은 실제로 국내의 과거 역사와 현상에 대한 이해와 주장의 차이가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지만 동시에 목회자들의 출신 지역, 교육과 신학적 배경, 그리고 이념적인 차이나 교권대립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분열은 외형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으로 나타나 신학교의 분리가 곧 새로운 교단의 설립으로 발전되어 갔다. 1951년 고신 분리, 1953년 기장 분리, 1959년 합동 분리 등은 신학교의 분리와 더불어 교단의 분열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장로교의 네 갈래는 사실상 한국교회의 성향을 가름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분열의 배경에는 국제적인 기독교 기구간의 대립이 그대로 이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가령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노선을 달리한 국제복음주의연맹(NAE)은 실제 한국내의 이념적 또는 교권적 이해관계와 그대로 직결되어 더욱 분명한 분열과 대립의 명분을 주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세력인 국제기독교 교회협의회(ICCC)의 출현은 매카시즘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워서 한국교회를 이념적으로 극우의 반공신앙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분열은 선교사들이 속한 모교회의 선교적 방향과 이러한 국제기구와의 관계 및 선교지역의 성격 등과 깊이 연관되어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 당시의 교회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분열의 가장 큰 요인은 이념적인 과제였으며 이것은 철저한 반공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당시의 정권과 자연히 유착하고 자연스럽게 반공 세력이었던 반 WCC세력간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감리교의 경우는 장로교보다는 더욱 더 내부적인 세력간의 교권과 헌장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하여 분열과 통합이 거듭되다가 1958년에 다시 통합을 성취하였으나 이러한 정치적 구도는 지금까지 때에 따라 반복되어 왔다.
2) 진보와 보수의 신학적 입장
현대 한국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로 박형룡, 김재준 그리고 홍현설을 꼽고 있다.  박형룡이 보수 전통신앙대표한다면, 김재준은 혁신과 진보 그리고 교회일치와 참여의 신학에 있어서 선구자이며, 홍현설은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복음주의적 휴머니스트"로서 현상을 중시하며 복음을 전승하려는 입장이었다.  한국보수주의 신학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정통주의 신학을 고수하면서 철저한 교회와 성서중심주의 입장에서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지도 사회 변화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진보주의는 참여의 신학을 바탕으로 사회의 변혁 자체를 선교적인 과제로 보면서 적극적으로는 정치참여의 신학을 소극적으로는 문화적 수용이나 토착화의 신학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것은 사회정치적 현상에서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신학화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진보적인 신학운동은 4.19라는 역사적인 혁명을 체험하면서 교회의 역사적 성찰을 도모하게 되었고 예언자적인 사명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진보와 보수의 신학적 입장은 사실상 해외신학의 유입과정과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내의 시대적인 상황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1960년 장로교 고신측과 합동측이 마련한 합동총회에서 "자유주의적이며 용공적이며 비성서적인 WCC 노선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철저한 반공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던 체제 아래에서 보수적인 교회가 취할 수밖에 없는 명분이었다.
반면에 진보주의는 교회가 오류의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불의와 대결하여야 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는 기독교적인 비판과 구체적인 해결의 원리까지도 제공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각 교파의 연합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라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관계는 전후로부터 독재와 군부통치를 이어가는 '불의'의 역사적 상황에서 더욱 분명하게 그 성격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교회일치운동의 발전에도 엄청난 자극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진보주의의 경우 에큐메니칼 운동을 교권과 교단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일치보다는 오히려 '사업' 위주 또는 '교회활동' 위주의 범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보주의라 하더라도 전통적인 교회 위주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교단의 한계에서 마침내 기독교 연합회에서 각 선교단체를 제외하는 교회협의회로 조직상의 변형이 이루어져서 일면 퇴보하고 말았다.  
3) 신흥종교와 사이비기독교의 출현
  전후의 사회적 불안에 제대로 기성교회가 대처해 나가지 못하고 보수와 진보의 양 극단에 서 있을 때인 50년대에 일종의 신흥 종파들의 출현은 교회의 혼란과 비정치적 신비주의의 도피신앙을 불러 왔다. 문선명의 통일교와 박태선의 전도관 그리고 이와 비슷한 유형의 사이비 기독교가 말세론을 내세워 사회를 풍미하였다. 이러한 유형은 역시 반공논리와 함께 자본주의에 편승한 기복신앙을 강조함으로써 기성교회에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카리스마적 교회운동의 계기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실 이러한 사이비종교의 출현은 교회를 사회와 유리 시키거나 기독교 자체의 사회적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를 한 셈이었다.
한국의 정치적 혼란과정에서 이후 끊임없이 대두되는 대소 사이비 기독교의 출현은 사회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으며 여기에는 일정한 정도 기성종교의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성락교회. 한국예루살렘교회. 레마선교회. 기독교복음침례회 (구원파). 세계 청년대학생MS연맹. 영생교. 동방교. 장막성전. 새하늘 선교회 (다미선교회). 만민 중앙교회 등은 기독교계의 공동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5. 교회의 성장과 교회의 사회참여운동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1970년대에 이루어졌다. 군사독재가 자리를 잡고 유신체제가 굳어지면서 비정치화의 전통을 지켜온 각 교단마다 교세 확장이 주된 목표가 되었고 물량적인 성장과 함께 복음화라는 것이 교회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에 1973년 부활절 연합예배를 계기로 민주회복과 인권회복을 위한 교회의 사회참여운동도 괄목할 만큼 활발하였고 그 결과 선교신학자체에 대한 입장에서 교회는 확연한 구별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부터 새로운 선교의 형태로 나타난 산업선교는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을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영역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우리는 1970년대이후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를 중심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산업선교. 학원선교. 인권선교 및 통일선교를 통한 사회경제적 개혁과 체제의 변혁을 추진한 것은 큰 결실을 이루어 왔다. 목요 기도회나 금요 기도회는 고난을 함께 나누면서 하느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 것을 체험한 신앙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교회를 얽어 매어 왔던 모든 구조로부터 해방되는 새로운 '출애굽' 즉 해방의 영성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은 사실상 신앙고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었고 선교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교회의 투쟁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운동은 비록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한 교회들까지도 엄청난 교세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억압의 시대에 완전히 침묵하고 있던 사회에서 교회의 예언적 활동은 여러 형태의 저항운동과 고난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 자체가 사회 전체에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고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진하였다. 동시에 에큐메니칼 운동 자체도 기독교의 성장이 그 배경의 힘이 되어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세 성장은 단순히 복음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복음화의 영역을 넓히면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1970년대 이후의 고난의 역사를 신앙화 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민중신학을 발전시켜 낼 수도 있었다. 또한 민주화를 추진하고 통일운동을 주도해 오면서 에큐메니칼 운동권은 공고한 연대를 국내외에 형성할 수 있었고 이러한 힘은 마침내 군부독재의 종식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양면성을 가진 하나의 과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때로 교회 내부에서 끊임없는 용공논쟁이 이어져 왔지만 탈냉전의 새로운 세계구조 속에서 민족적 통합이라는 과제는 통일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 동안 벌여온 기독교의 통일운동의 핵심은 남북기독교 대표들이 1986년 이래 함께 화합을 하면서 일구어낸  '희년사상'에 있고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가 채택한 1988년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큰 성과이며 오늘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시할 것은 '희년운동'이 마침내 여러 갈래로 흩어진 한국교회의 신앙적 일치점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는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선교 즉 하느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며 은혜의 나눔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파주의나 개교회주의가 교세 확장을 위한 전제였다면 이제는 성장한 교회로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앞세워야 할 때가 왔다.
  6. 결론
  한국교회의 분열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예를 들어 세속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신학상의 견해 차이, 교권의 쟁탈 문제, 개교회주의, 집단이기주의적 전통, 또는 지역 중심이나 교파주의가 그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또는 교회내부의 신학적, 신앙적 그리고 선교사들이 전승한 교파전통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분열은 사회현상(Context)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교권의 확보라는 방법상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신학적 이해의 차이이던 이념적 입장의 차이이던, 정치권력에 대한 입장이던 또는 지역성에 따른 구조적 갈등이던 간에 우리의 해방 전후의 역사과정에 대한 대응에서 분열과 일치를 도모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공통점은 신앙운동의 범주로 묶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실천해 온 종교적 열의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종교라는 관점에서 교회의 분열은 가장 교회를 교회답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우리 나라 교회 내부에 해방 이후 그대로 계승되어 오는 여러 형태의 갈등구조가 있고 교회일치나 연합의 길은 멀다. 통일의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과거의 역사가 전승해 주고 해외의 신학이 매겨준 진보와 보수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공동의 신앙고백을 추구하며, 기존교회의 형성과정에서 생긴 모든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비본질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신앙의 경험을 넓게 공유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근래에 일부에서는 교회연합운동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교회연합운동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조직이나 제도의 개혁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상황에 있어서의 교회의 대응 즉 신앙적인 결단과 실천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데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평화의 과제, 환경의 과제, 정의의 과제, 그리고 통일된 민족공동체의 미래 지향적인 과제에 먼저 공동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50년간 우리가 잘못 걸어온 일에 대한 올바르고도 진솔한 회개와 자기 갱신이 있어야 한다. 만일 여전히 우리가 교권적 이해나 패권주의 또는 편협한 교조적 신앙을 내세운다면 교회일치는 아직도 먼 곳에 있고 끝내는 민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종교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일치는 기구적인 논의가 아니라 선교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자기 희생과 변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개신교의 등장
오늘날의 개신 교회가 태동된 것은 대부분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이다. 중세 시대의 로마 카톨릭 교회(천주교)가 부패 부정에 빠지자, 마틴 루터를 위시한 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이 생명을 내어 걸고 개혁을 부르짖은 결과가 오늘날 개신교의 태동을 가져 왔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안(改革案)도 어떤 부분은 일치했으나, 어떤 부분에서는 이견을 드러내었다. 천주교의 부정 부패에 대항하여 시작했으나, 이후에는 분열되었다. 각각의 신앙관과 주관, 지역과 환경이 달랐으므로 의견이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교파의 시작인 것이다. 짧지 않은 기간 그들은 서로 싸우고 비판하며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에 누를 끼쳤다.
예를 들어 루터 교회는 마틴 루터의 신학과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장로교회는 16세기 스위스 제네바를 거점으로 활약한 프랑스인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학 및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발전한 교파이고 감리교회는 18세기 영국교회의 사제였던 웨슬리에 의해 창시된 교파이다.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전파된 장로교는 1837년 신-구파로 나뉘었다가 노예제도에 관한 견해차이와 남북전쟁을 계기로 남-북 장로교회로 완전 분리된다.
한국 개신교의 현황을 교세별로 볼 때 장로교가 압도적이며 이어 감리교 성결교 순이다. 그외에 한국선교의 주역을 담당했던 미국에서는 융성하지만 한국에서는 상대적 열세인 침례교, 영국 성공회, 구세군, 오순절계열 교회 및 각종 군소 교단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선교의 첫발을 디딘 알렌, 언더우드 등은 북장로회 소속이었다.
한편 미국으로 전파된 감리교도 1784년에 독립교회를 형성하였으나 역시 남북전쟁의 여파로 남북으로 분리된다. 매클레이와 아펜젤러가 북감리회(보통 북감리회를 그냥 미국 감리회라 부른다) 소속인 것을 보면 장-감 공히 대 사회적 진보의식을 지닌 북쪽이 해외선교에 있어서도 한발 앞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장로교 남감리교도 오래지 않아 한국선교에 나섰고, 특히 장로교의 경우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도 이에 동참하였다.
미국 북장로교의 분열
20세기 정통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갈라섬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미국 북장로교의 분열을 중심으로 다루겠다.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가름했으며,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새로 설립된 이 사건을 다룸으로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을 바르게 인식하고자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과 근본주의 운동
19세기부터 전격적으로 나타난 과학주의와 진화론 사상은 기독교인과 교회의 전통적인 신학과 신앙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합리주의 사고방식에 기초한 과학주의가 신학계에서도 팽배하기 시작했다. 합리적인 이론이나 과학적인 경험의 범주에 속하지 아니하는 신학과 신앙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의 고등비평주의를 탄생시켜 성경에 대한 권위와 신실성에 도전하는 신학사상을 낳았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도전하면서 신학과 신앙의 전통적인 근간을 보호하려고 형성된 운동이 바로 근본주의 운동이었다.
따라서 근본주의의 발생은 일부 비판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속좁은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이 아니라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려 한 움직임이었다. 바로 이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치열한 신학사상 논쟁은 미국교회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미국의 북장로교회의 분열이 그 대표적 예이며, 구체적으로는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의지 때문에 프린스톤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던 메이첸이 중심이 되어 필라델피아시에 웨스터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첸은 현대주의자들의 신학사상이 잠입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면서 특히 성경관에 있어서 비타협의 정신으로 보수주의 신학을 주장했다. 그는 성경의 고등비판을 악마로,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자들을 반기독교 세력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성을 변호했으며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철저하게 변호했다. 문제 발단은 뉴욕의 리버사이드 제일 장로교회 목사였던 포스딕의 설교였다. 포스딕은 1923년경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에서 “교회는 자유주의자들을 제거하지 말라”고 주장을 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포스딕의 이 설교는 자유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유포시키는 도전적인 설교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10년과 1916년에 총회에 제기되었던 신앙의 본질적인 5개항의 기본교리를 재확인하게 되었다. 성경의 무오성,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대속적 속죄, 예수의 육체적 부활, 그리고 예수의 이적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재확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들은 물론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이 전통을 보수하려고 노력했던 대표적 신학자가 바로 그레샴 메이첸이었다. 메이첸은 특히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신조라고 확신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메이첸의 반격은 대단했다. 그는 북장로교회의 자유주의자들이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면 교회 안에 평화가 찾아오지 아니할 것이며 복음적 기독교는 암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진보파의 공격이 시작됐다. 1924년 1월 150명의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목사들이 오번신학교에 집결, 1923년에 총회에서 통과한 5개의 근본주의 교리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를 ‘어번 성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1300여명의 목사들이 이 성명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북장로교회의 총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문제해결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총회는 공적으로 온건한 자유주의의 노선을 취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총회 안의 보수 세력은 약화되고 종국에는 장로교의 기본교리 논쟁과 신학 논쟁은 자유주의 수용이라는 오점을 남긴 채 퇴조하기 시작했다.
프스딕 목사와 어번 성명서의 영향은 교단 신학교였던 프린스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신학교 안의 진보와 보수의 세력은 교수와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교의 양 이사인 운영이사회와 재단이사회에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특히 당시의 학장이었던 스티븐슨과 어드만 교수는 관용정책을 폈고 보수 진영의 선두 주자였던 메이첸은 관용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력하게 천명했다. 논쟁은 어드만과 메이첸 사이의 불편한 관계에서 출발하였다. 어드만 교수는 실제로는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였지만 스티븐슨 학장의 관용정책을 지지했다. 어드만과 메이첸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프린스톤 제일장로교회의 목회현장이었다. 메이첸은 1923에서 1924년 사이에 이 교회의 임시목사로 봉사했다. 당시 이 교회에 출석하던 프린스톤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헨리 반 다이크 박사는 메이첸의 설교가 분리주의적인 비성경적인 설교라고 비난하면서 교회출석을 거부하였다. 메이첸은 교회의 평화를 위해 목사직을 사임하게 되었고 후임에 어드만 교수가 부임했다. 문제는 어드만 교수가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반 다이크 교수가 다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을 취급했던 당시의 보수파 주간지였던 ‘더 프레스비테리언’(The Presbyterian)에서 반 베이크의 교회 출석을 보도하면서 반베이크가 자유주의 만큼 어드만도 자유주의라고 몰아세웠던 것이다. 이 보도는 어드만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메이첸과 어드만이 적으로 갈라서게 했으며 그 결과 프린스톤 신학논쟁이 가속화됐다.
메이첸 교수는 이 보도와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변명하였지만 이 일로 인해 두 교수는 본의 아니게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어드만 교수는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동시에 일부에서는 메이첸교수를 광신적 근본주의자라고 혹평했다. 이들로 말미암아 깊어진 신학적 논쟁은 정치적으로 비화됐고 프린스톤신학교의 양 이사인 재단이사회와 운영이사회의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운영이사회는 주로 메이첸의 신학노선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고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과 어드만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학생들도 양분되었으며 특히 복음주의 학생연맹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결성되어 프린스톤의 향방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메이첸이 사주한다는 탄압적인 비난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메이첸의 교수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워필드 교수가 죽은 뒤에 변증학 주임교수 자리가 비게 되었고 운영이사회는 메이첸 교수를 그 자리에 추대했다. 그러자 운영이사회의 이 결정에 불복한 학장 스티븐슨과 어드만 교수는 총회에 청원하여 이사회의 결정을 보류시켰다. 이로 인해 총회에서는 특별조사위원회(The Thompson Committee)가 조직되었고 이 위원회는 메이첸의 임명을 보류시키고 양 이사회의 통합안을 총회에 건의했다. 톰프슨위원회의 건의안은 1929 총회에서 승인되었고 33명의단일 이사회가 새로 구성됐다. 이 단일 이사회는 프린스톤신학교는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견지한다는 내용의 확인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메이첸은 불확실한 이들의 행동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1929년 가을 메이첸은 필라델피아에 새로운 웨스터민스터신학교를 개설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 보수를 위한 투쟁
메이첸 교수의 투쟁은 성경적인 정통신학의 보수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메이첸은 독일 유학을 통해서 신학의 좌경의 심화 과정을 경험한 신학자였다. 그는 진화론과 과학주의 그리고 성경의 고등비판은 이미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신학의 세속화를 가속시키고 있음을 깊이 인식했던 것이다.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의 전통은 하지와 워필드 등의 정통 신학자들이 고수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위에 서 있으며 이 신학을 유지해야 역사적인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존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메이첸은 워필드 교수가 서거했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 워필드 교수를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찬사의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메이첸이 신학과 정통성을 얼마나 고귀 한 것으로 여겼는지는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문제는 단지, 우리가 우리들의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 가운데서도 여전히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메이첸의 확신은 분명했다. 역사적인 기독교의 정통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만이 인간의 구원을 담보하는 유일한 진리였던 것이다.
역사적인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에서 빗나가기 시작한 프린스톤신학교와 미북장로교회의 역사는메이첸이 예견한 데로 현대주의 노선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프린스톤 신학은 신정통주의의 미국내 메카로 등장했으며 북장로교회는 점점 자유주의와 세속적인 신학과 신앙의 노선을 밟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1967년에는 드디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였고 이 수정을 통해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을 외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등의 운동을 주도하면서 성경의 본질적인 구속의 은총의 원리를 외면하고 사회복음주의적 관심으로 기울게 되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가 종교다원주의 색깔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혀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는 관용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종국에는 여성안수가 허용되었고 교단에 동성연애 목회자가 생기는 등 시간이 감에 따라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빗겨가는 교단의 정책이 심화되었다.
21세기에도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여전히 가속화될 가능성이 짙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의 교회는 역사적인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을 회복하여 복음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시대적인 요청과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만이 교회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는 대안일 것이다.
새문안교회 세운 언더우드 목사
"1883년 초엽 올트만스 박사는 장로교 뉴브룬스윅 신학교의 선교 지망생들을 모아놓고 최근 서양 각 국가와 조약을 맺고 개국하기에 이른 은사의 나라에 관한 글 한편을 읽어주었다. 복음을 받지 못한 1천3백만명에 대한 이야기...82년 슈펠트 제독과의 조약체결 (한미수호조약)로 문호가 개방되었으나 교회측이 무관심하여 1년여를 거저 보냈다는 이야기...거기가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교회와 선교지도자들도 시기상조를 내세우고 있을 때…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너는 왜 못 가느냐'"
이로부터 2년 뒤인 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이 고백의 장본인 언더우드는 마침내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인천부두에 한국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총명하고도 불같은 정열을 가진' 26세의 청년이었다.
당시 미국은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 해외 선교열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신앙적이고 진취적인 미국 젊은이들 중에는 해외선교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1880년에 시작된 미국의 전국 신학교연맹은 이 같은 선교열을 더욱 구체화. 조직화 시켜 주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남장로교의 초대 한국 선교사들도 이 연맹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사실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의 새벽을 깨우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경신중고 및 연희학원을 설립하여 신교육의 터전을 닦고 조선 장로교 조직을 정비, 선교 토대를 마련했으며 숱한 저술을 통해 한국을 해외에 소개하기도 했고 또 '춘생문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본의였든 아니든 구한말 한국 정치 상황에 깊이 관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의 행적의 본령은 목회에 있었고 그 중에서도 한국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새문안교회 설립이 그 으뜸이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2백여m를 가다보면 오른켠에 진입로가 보이고 한길에서 조금 물러앉은 새문안교회 건물이 나타난다. 신물로 1가 42번지.
그러나 이 자리는 1907년에 옮겨온 곳으로 정작 새문안교회의 첫 자리는 큰길 건너편 현재의 정동 예원학교 운동장 자리. 당시 앨런 선교사의 집 오른쪽, 옛날 강로 정승의 집이다. 언더우드는 이 집을 얻어 안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집 사랑채가 바로 교회의 시발지 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교회이름도 '장로교 정동교회'라 했다. 장로교 정동교회와 감리교 정동교회가 초창기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1887년 9월27일 가을저녁(화요일) 서상륜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있던 서울신자 등 14명이 이 집에 모여 언더우드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배를 드렸으니 이일이 새문안교회의 출발 이다.
교인 수가 급증함에 따라 1895년 교회를 대로변 (전 피어선신학교 자리)으로 옮기고 1904년 10월 송순면 장로가 장립되면서 당회가 조직되었다.
한편 언더우드는 자기 집에 영국 고아학교형태의 '예수교학당'을 열고 학비에 의복과 음식까지 주면서 한글 성경 등을 가르쳤다. 이는 이후 구세학당으로 바뀌었으며 1901년 연동으로 교사를 옮겨 경신학교라 하였으니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예수교학당을 거쳐 경신이 배출한 인물 중에 김규식박사가 있다.
"이 아이(김규식)의 아버지는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고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관 청의 눈이 무섭고 살림이 어려워 친척들도 외면한 여섯살바기를 우리 고아원에 데려왔다. 자꾸 울기만 해 돌려보냈으나 구박이 심하다는 소문을 듣고 원목사(언더우드)가 통조림과 우유를 들고 찾아가니 배가 고파 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다 죽게 되었고 죽으면 말썽만 나니 데려가지 말라 했으나 원목사는 이 애를 데려다 애정으로 양육,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게 했다"
언더우드 부인의 기록이다. 지금과 비교해볼 때 당시 한양은 인지가 덜 깨이고 물질적으로도 궁핍한 땅이었다. 88년 늦은 봄 항간에는 '외국인들이 조선아이들의 눈알을 빼서 안경 알을 만들고 염통을 빼어 약을 만든다' 는 허무맹랑한 낭설이 나돌았다. 키가 크고 눈알이 파란 서양인들은 하루아침에 양도깨비가 되었고 성난 군중이 두려워 바깥출입도 삼가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광혜원에서 일하고 있던 호튼양도 이 통에 가마꾼들이 다 도망가 버려 당황해 하고 있었다. 이때 용감히 말고삐를 잡고나선 총각이 바로 병원 일을 보고 있던 언더우드였다. 1년 후 그들은 백년해로를 약속했고 서울에서 의주까지 함께 전도여행 겸 신혼여행을 떠난다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 임진강나루를 건너 오두막 주막에서 하루를 묵기도 하고 구경꾼들 의 놀림과 위협도 감내하며 의주에 이르렀다. 아직도 선교가 자유롭지 못하던 때라 국경인 압록강에서 의주교인 33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국의 요단강 세례'다.
이 오지 순회전도여행은 초기 한국교회 선교의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다.
교회사가 민경배교수는 "한 역사적 인물을 당시 시대상황과 완전히 유리시켜 평가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전제하고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의 기독교뿐 아니라 서양문화 도입에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마디로 한국근대문화는 그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했다.
<남장로교>
1891년 안식년을 얻어 귀국한 언더우드는 전국 신학생을 상대로 한국선교에 관한 강연에 나선다. 언더우드의 놀라운 체험 고백에 감동을 받은 테이트, 레이놀드, 전킨 등은 중국선교 계획을 수정하여 한국선교를결심한다.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재정적 궁핍을 이유로 이들의 지원 요청을 일단 거절하지만 테이트 등의 끊임없는기도와 교회순회강연 잡지기사 등을 통한 한국선교 필요성에 대한 홍보 및 이에 동조한 언더우드 형제 등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마침내 선교부는 이들을 파송키로 결정한다.
테이트의 여동생 마티와 데이비스, 리번, 볼링 등 4명의 젊은 여성도 함께 였다.
1892년 서울에 온 이들은 북장로교 마펫선교사 등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얼마동안 저들의 집에 머물다가 이듬해 선교회를 조직, 본격 전도에 나섰다. 한국어를 연마하는 한편 강화도, 평양, 공주 지방으로 전도실습을 거쳐 1891년부터 적용된 장로교 선교지역 분할정책에 따라 호남지방을 선교지역으로 할당 받는다. 전주 성문밖 은송리에 아담한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하 여 94년 테이트 남매가 제일 먼저 정착한다.
초창기에는 동학혁명이 일어나 여러 가지 애로를 겪었지만 이들이 마을을 찾아 다니며 복음 을 전할 때 특별히 방해받지는 않았다. 96년에는 전킨목사 가족과 드루의사 가족이 이주, 군산선교부를 개척했다. 군산항이 개항되기 3년 전의 일이었다.
또 육로 수로 교통이 편리한 당시 전남의 중심지 나주에도 선교부를 세울 작정이었으나 나주는 옛날부터 보수성이 강하고 양반세력 밀집 지역이어서 하는 수 없이 97년 개항된 목포에 선교기지를 선정, 98년 벨 목사와 오웬의사가 정착하였다. 이어 1904년 대사경회 직후엔 장차 전남의 중심이 될 광주, 순천 등에도 속속 선교의 터가 마련되었다.
이들이 세운 기독교계 학교를 일별하면 전주 신흥(1901), 기전여학교(1902), 군산영명(1902), 군산 멜볼딘여학교(1902, 현 영광여중고) 목포 영흥·정명여학교, 광주 숭일과 수피아여학교, 순천 매산남여학교 등이 있다.
<호주장로회>
호주장로회의 한국선교는 한 젊은 남매의 선교열정에서부터 길이 열린다.
1889년 멜버른 출신 데이비스 목사 남매는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호소문을 읽고 모교 회와 지역교회협회의 도움에 힘입어 내한하게 된다. 서울에서 5개월간 머물며 선교지역을 물색하던 중 아직 복음이 크게 퍼지지 않은 경남지방에 관심을 갖고 부산을 향해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는 한문 성서와 전도지를 전하며 천리길을 가다 부산을 눈앞에 두고 급성폐렴으로 사망하고 만다.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전 호주교회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 매년 선교사들이 부산에 파송되나 본격적인 선교는 94년 아담슨 목사 부부가 정착하고부터 이다.
사실 부산지역은 188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매서인들이 로스역 쪽 복음서를 팔기 시작하면서 선교가 개시되었고, 이어 게일 및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계속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호주 장로회가 들어오자 양측은 1893년의 장로교회 치리기구 준행 선교부 공의회를 통해 선교지 분할에 합의, 낙동강 북부는 미국 북장로회, 경상도 남부는 호주 장로회가 맡게 된다. 이리 하여 호주 장로회는 부산을 위시하여 마산 진주 통영(충무) 거창 등지에서 활발히 교회를 설립한다.
1893년 부산 최초의 교회 초량교회를 비롯, 부산진교회, 동래교회, 장전리교회, 양산읍교회가 연이어 서고 진주의 옥봉교회(현 진주교회), 마산의 구마산교회(현 문창교회) 등도 개척된 다.
교육기관으로는 1895년의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중고)와 마산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진주 시원여학교광림학교 등이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이전에 활약한 몇몇 캐나다인 독립 선교사들의 이야기부터 거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토론토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1889년 내한, 소래 부산 원산을 거쳐 북장로회로 옮겨간 게일, 역시 토론토대학 의대 기독청년회 파송을 받아 부산 원산에서 활약한 하디 의사, 89년 소명에 불타는 평신도로 내한하여 서울 소래 공주 등을 거치며 결국 침례교의 전신인 동아기독교회를 창설한 펜윅 등이 있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회의 한국 선교를 가능케 한 직접적인 동기를 마련한 독립선교사는 매켄지다. 그는 93년 한국에 도착, 한국 최초의 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다 타계한 사람이다.
캐나다 장로회 총회가 한국선교를 계획하고 있을 즈음 매켄지의 부고와 소래교인들의 진정서가 전해졌다. 그의 죽음은 한국선교에 대한 엄숙한 사명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1898년 푸트목사 부부를 비롯한 5명의 선교사가 내한했다. 이미 조직되어 있던 장로교 공의회에 가입하여 함경도 지역을 선교지로 할당 받고 북장로교가 철수한 원산지역을 선교거점으로 삼아 활동한다. 성진 함흥 회령 등에 선교부를 개척, 교회를 세우고 학교 병원사업도 병행해 나갔다.
캐나다 장로회 선교중 특이할 만한 것은 만주 간도지역 선교이다. 1912년 간도 용정에 선교부를 개척하고 은진중학 명신여중 등을 설립,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으며 치외 법권 지역 제창병원은 한국 망명객들이 오가며 독립운동을 숙의하던 곳이 되기도 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 과정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곧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다름이 없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인 서상륜 등은 비록 국외에서이긴 하지만 선교사가 입국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쪽복음(한개의 복음서 내용만 담은 성경책자)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교인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개신교회은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1884년)에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 총신대학 양지캠퍼스에는 소래교회를 복원하여 옛 선조들이 신앙을 본받고 느끼도록 하고 있다.
1884년 미북장로회 소속인 알렌(H.N.Allen)이 의사의 신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료선교 활동을 한 이후, 1885년 부활절에 마침내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H. G. Underwood)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부임 이후 얼마 안되어서 압록강에서 32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는데, 이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이 땅에 신앙을 고백하는 장로교인이 많이 존재했었음을 말해준다.
초기에 설립된 장로 교회들을 보면 소래교회, 서울의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이다. 이후 이들 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인근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소속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경남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폈으며, 1892년에는 미남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함경남북도와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폈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선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위하는 한편, 신학교육, 문서사업 등에서 연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로교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를 조직하여 협력방안을 구체화하다가 마침내 1901년에는 4개의 장로교회가 협동으로 연합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장로교회는 초창기로부터 보수주의 신학의 든든한 기초 위에서 성장해왔다.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의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 삼열 박사의 희년기념 연설 가운데 "나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말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평양신학교는 1907년 제 1회 졸업생을 7명 배출하게 되었고, 그해 9월 17일에는 33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와 36명의 한국인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한국장로교 첫 노회(독노회)를 창설하고 그 자리에서 신학교 졸업생 7인에게 목사 안수를 베풀었다. 이로써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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