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반합(正反合)을 성취하는 이, 그리스도 신인(Christ G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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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합(正反合)을 성취하는 이, 그리스도 신인(Christ God-man)

선한 사마리아 3 5,560 2008.11.02 07:11
 
< 정반합(正反合)을 성취하는 이, 그리스도 신인(Christ God-man) >
 
선과 악이라는 대립적 사물과 상황의 해소는 어떻게 이루어질수 있는가?
정과 반은 어떻게 합을 이룰수가 있는가?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수 있는 방법은?
 
 
1) 선(善)과 악(惡)의 대립은 본성상과 질서상에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2) 이 본성과 질서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유를 누린다. 3) 세상안에서는 선과 악이 없다. 선인과 악인이 없다. 일반적으로(속과 겉이 일치하거나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이 사람안에서 일치를 이루면 사람은 천국에 있든지 지옥에 있든지 하게 된다.) 4) 정반으로 말하자, 정반(正反)이라는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여 중화하고 화해할수 있는 방법은 5)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영계가 있고 선과 악 사이에 인간이 있듯이, 정과 반 사이에 인간이 있을수가 있다.

6) 집단안에서 좌(左)를 택할 것인가 우(右)를 택할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 있을수 있다. 7) 중립자는 정과 반, 우와 좌의 장단점 즉 양지(陽地)와 음지(陰地) 모두를 볼수가 있으나 정과 반안에 있는 사람들은 볼수가 없다. 8) 정과 반안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단점을 볼수 있으나 자신의 단점을 볼수 없고, 상대방의 장점을 볼수 없으나 자신의 장점은 볼수 있다. 9) 따라서 정(正)과 반(反)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요,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즉 전체를 대변할 수가 없다. 10) 오직 정과 반, 선과 악, 우와 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전체를 볼수 있고, 전체를 대변할수 있고, 전부라고 말할수 있다.

11) 그러나 중립자가 정과 반, 우와 좌보다 약하면 즉 그것들을 컨트롤 할수 있는 힘이나 지혜가 없으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된다. 12) 반대로 양자의 힘을 통제할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다면 삶의 주인공, 모든 상황의 지배자인 승리의 그리스도가 될 수가 있다.

- 지배자 그리스도(왕)가 되기 위한 방법  -

첫째로 부분(파벌)에 속하면 아니된다. 둘째 사람의 세력(파벌)에 두려워하면 아니된다. 셋째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만 앙망하고 믿어야 한다. 넷째 부분(파벌)들을 적으로 또는 대립물로 세우면 아니되고 그것들과 지체이다 또는 하나이다라는 일체의식/전체의식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전체와 분리된 의식이나 주님과 분리된 의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고, 미움과 분노를 일으키며, 좌절과 낙담을 가져와 병에 걸리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여섯째 그러므로 이때의 마음가짐은 왕따와 이지메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미움이라는 감정과 생각을 몰아내고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과 감정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곱째 상대의 단점과 부정적인 측면들에 의식을 집중하지 말고, 또 그런 생각과 감정이 들어오면 쫒아내 버리고 그들의 대한 긍정과 신뢰를 갖도록 해야 한다. 여덟째, 겉으로 드러난 양자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공으로 돌리고 그 안의 주님을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홉째 그러할 때 주님의 뜻만이 성취되고 주님의 형상과 모양만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것이며 그렇게 주님 홀로 모든 것을 주관하고 지배하게 될것이다.

(천국과 지옥 536) “..천국의 지옥에 대한 지옥의 천국에 대한 관계는 서로 상대편과 상반되게 움직이는 두 정반대의 사물간의 관계와 같다. 이둘의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균형이 존재하고 그 균형이 그 둘의 작용과 반작용에 속한 모든 것에 항상성을 부여 한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 중 하나를 다스리는 분이 나머지도 다스리실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동일한 주님이 지옥의 저항을 누르고 그곳의 광기를 막지 않으시면 균형은 깨어지고 그와 함께 모든 것이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537) 그러므로 우선 나는 이 평형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양자 사이에는 서로 대립되는 작용이 있으며 그 한쪽이 상대에게 작용하고 또 다른 한쪽이 반작용 또는 거부하는 일을 할 때 만일 그 양자가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쪽에도 우열은 있을수 없습니다.(줄다리기 할 때 양쪽의 힘이 동일하다면, 무게추의 양쪽 무게가 같다면) 그럴때 대립하는 양쪽을 제3자는 자유롭게 다룰수(좌지우지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의 힘이 대립에 의하여 균등해지면 제3자의 힘이 완전한 지배력을 갖게 되어 마치도 양쪽의 대립하는 힘이 없는 것처럼 양자를 다룰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천국과 지옥간의 균형도 이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양자의 대립하는 힘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적 힘에 따른 영적 균형이다. 즉 진리와 그 반대인 거짓 사이의 균형, 선과 그 반대인 악사이의 균형이다. 지옥에서는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이 천국에서는 선에서 비롯되는 진리가 끊임없이 발산된다. 이 영적 균형이 사람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의도할수 있게 해준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과 거기서 나온 거짓 아니면 선과 거기서 나온 진리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540) 그것이 천국과 지옥간의 균형이다. 중간영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 균형안에 있다. 그곳이 천국과 지옥 중간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같은 근원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도 같은 균형안에 보존된다. 주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중간영계의 영들을 통해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그 해당 가름에서 다룰 것이다. 주께서 천국과 지옥을 모두 다스리시고 양쪽을 조절하지 않으시면 그런 균형(자유의지)은 있을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악에서 비롯된 거짓이 우세해지고 천사들보다 변질되기 쉬운 천국 외곽지역의 단순히(소박한) 선한 영들을 오염시킬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균형은 깨어지고 따라서 사람안의 자유도 말살될 것이다.“

(요 9:2,3)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롬8:21-23, 28)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초인생활 완역본, 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서, 4부 p518-527) “이원성은 전체와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러한 이원적인 생각을 버리고 유일점(하나이다라는)에 상념을 집중하면 이원성은 사라진다.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 두가지이거나 생각이 두가지면 이룰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말하면 이원성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음과 양, 선과 악, 뜨거움과 차가움등 모든 반대되는 것을 합치면 하나의 목적, 하나의 행위, 하나의 원리에 도달한다. 반대되는 듯이 보인다고 해서 참으로 반대되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근본적으로 확실한 것은 하나일뿐이다. 예수는 당신이 가장 크게 이룬 일은 ‘한가지 태도, 변함없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변함없는 원리가 인간을 일체 속에서 존재하게 한다. 이속에서 이원성은 사라지고 하나의 눈, 하나의 존재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의 천성은 태초부터 영원히 선에 맞추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자식이요 신은 선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함을 자기 자신과 만물에 나타내는 삶을 살 때 존재의 원리와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이다. 모든 것에 선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려고 노력하면 다른 사람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도 그에게는 선의 원천이 된다.

모든 반대되는 것도 이쪽에서 거부하지 않는다면 부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반대되는 것도 결코 조화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반대되는 것도 전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대되는 일에 대해서도 조화로운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원만히 조화로운 태도를 취할 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조화로운 관계가 일어난다. 이리하여 언제까지나 완전한 조화가 있을뿐이고 부조화는 사실상 있을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에서 부조화란 있을수 없게 된다. 즉 서로 반대되는 것은 부조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속에서 서로 완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의 두 끝은 서로 대립하는듯이 보이나 두 끝을 합치면 원이 되어 대립은 사라진다.(천국과 지옥 536, 537항) 원을 확장해 나가면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룬 완전한 형태의 구가 된다. 밀리칸(Milican : 미국 물리학자)이 말하기를 ‘우주적인 것은 구가 된다’고 하였다. 점이 선이 되고, 섬이 원이 되고, 원은 모든 면에서 완성되어 완전한 구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그것만 따로 놓고 본다면 각기 고립되는 듯이 보이나 궁극적인 한점에 이르는 과정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마침내는 만물일체, 즉 하나라는 점에 도달한다. 이렇게 한 점으로 집중되는 것이다.

인간이 일심으로 집중하면 삼매에 들어갈수 있다. 삼매란 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경지이다. 즉 일심집중(One-pointedness) 경지에 도달해야만 도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 일심집중의 경지는 마음이 축소된 상태가 아니고 마음이 한없이 확장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심집중의 경지는 보통 생각하듯이 어떤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체를 포함하고 있다. 삼매에 들어가면 전체 즉 진리, 원리를 꿰뚫어 볼수 있게 된다.

(책속에 있는 글임) ## 정신집중이란 정신이 고정된 상태이거나 정신을 어떤 한가지 생각이나 관념, 형상, 대상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즉 마음속에서 무엇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확장하여 만물과 하나됨을 이룬 상태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근원자에게 귀일시키는 일이다. ##“
 
(기적의 손 치유 상 P17) “사랑은 우주의 얼굴이며 몸체입니다. 그것은 우주 공간을 연결하고 있는 조직인 동시에 우리 모두를 구성하고 있는 원료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또한 온전한 존재로서의 경험이며 우주적인 신성함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들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 환상 때문에 야기되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두려움과 자기 증오를 낳으며 이것들이 마침내는 질병들을 초래 합니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의 삶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불치병”일지라도 스스로 치료하는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실로 유일한 “불치병”은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불치”의 상황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다만 다른 차원의 존재로 옮아가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 요가(yoga)란 무엇인가? 주님과의 혼인으로 신인합일이다. -
(신인 그리스도/God-man Christ)

(마태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온유/프라오스/meet)하고 겸손(겸손/타페이노스/lowly)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yoke)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주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한 이유는 나와 하나되자는 말씀, 혼인하자는 말씀이다. 주님과 하나되면 마음은 쉼을 얻게 된다. 평화를 누리게 된다. 안식을 하게 된다. 창조 7일날이 안식일이다. 주님의 안식이 아니고 주님과 결합한 이가 누리는 안식을 말한다. 내적으로는 중생을 완성한 이를 말하며 그가 처한 심정상태를 안식/평화라고 하는 것이다.(신인 그리스도/God-man Christ) 7이라는 수의 뜻은 거룩이며 완성/완전과 평화의 의미가 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겉으로 그렇게 국어사전적으로 해석하면 천지창조를 말하는 것이나,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거듭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람의 속사람을 하늘로, 겉사람을 땅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속과 겉이 중생하는 과정을 말함에 있어서 각 단계와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이 관점에서 7일 안식일은 피곤을 모르는 주님의 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시험과 고난이라는 연단을 통과한 결과 얻게 되는 심정상태를 말한다. 그 이전까지는 미혹과 번뇌와 싸움으로 고통의 나날들이였으나 주님과 혼인한 7일날은 싸움의 종식을 의미하므로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천상의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을 뜻한다. 그래서 주님의 쉼이 아니라 사람의 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결합하면, 하나되면 가벼워지고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마태11:28-30) 성경본문의 단어 분석

(온유/프라오스/meet/gentle/mild) : 적당하게 알맞게, 상냥한, 부드러운, 친절한, 온후한, 온화한, 상냥함,

(겸손/타페이노스/lowly/humble) : 기본어 낮은 곳에 놓인, 비천한(lowly), 가난한(poor), 초라한, 하층의, 영적으로 겸손한(lowly in spirit),

(멍에/yoke) 1. (한 쌍의 소 등에 메우는)멍에《결합·고생·운명 등의 상징》 2. yoke로 메운 한 쌍의 소. “이스라엘의 멍에는 우리의 멍에와 달리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끈다는 점을 생각해보심 더 이해가 잘 갈듯 싶어요. 이스라엘에서는 어린 소가 멍에를 메게 할 때 멍에를 메기에 익숙한 소를 다른 한 편에서 메게 한대요. 그러면 어린 소가 적응할 수 있도록 능숙한 소가 멍에를 이끌어 어린 소는 멍에 매는 법을 배우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 일을 할수 있게 된다는 것”

"요가(yoga)는 두가지 어근을 가지고 있다. 첫째 명상하다, 입정하다(go to trance/사마디)이고, 둘째는 결합하다이다. 후자의 경우 산스크리트의 요가(yoga)는 영어의 yoke(멍에, 소에 메는)와 동일 어근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며 요기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요가를 전자의 경우보다 좀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요가(yoga)라는 말은 결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 ‘(소나 말에) 멍에를 씌우다‘라는 뜻의 yoke는 산스크리트의 요가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요가란 육체와 정신 또는 신과 인간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방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요가는 유한한 현상세계 배후에 있는 실재 곧 신성과 결합하기 위한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  중도행자 요기(수행자) -

사람이 중도심(中道心)을 얻고, 중도행법(中道行法)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함이다. 즉 주님과 하나되기 위함이다. 주님과 하나된 사람은 더 이상 사람으로서만 불리우지 않는다. 주님 + 인간이므로 신인(God-man)으로 불리우게 된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두고 신인합일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주님과의 혼인이라고 말한다.(고전6:17, 요한17:21-24, 계시록 21:1-8)

(마태11:28-30)의 말씀에서는 신인 그리스도가 되는 심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마음이란 “나는 마음이 온유(온유/프라오스/meet)하고, 겸손(겸손/타페이노스/lowly)하니”이다. 이것이 중도심(中道心)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언행은 중도행(中道行)이 된다. 중도행은 아래와 같이 이 세상에 속한 애정과 관념이 개입되어 있으면 아니된다. 공으로 무로 돌려야 하며 오로지 절대적인 것, 무조건적인 것, 전체적인것, 보편적인 것만 발출해야 한다.

(피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4-7) “요기(yogi)의 행위는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행위는 희거나 검거나 희고 검은 것이 섞인 상태이다.”

중도심(中道心)과 중도행(中道行)은 신인 그리스도가 되는 방법이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성취하는 세가지는 첫째 중도심(中道心)이고, 둘째 중도행법(中道行法)이고, 셋째는 생명의 호흡법(프라나야마) 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의 호흡이란 -

(창 2:7-9)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니쉬마트 하임)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위에서 초점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코에 불어넣은 생기 입니다. [생기]를 영어로 번역하면 (breath of life)라고 하고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생명의 호흡이 됩니다. 원어로는 “니쉬마트 하임”을 뜻하며 풀이하면 호흡이라는 뜻의 “네솨마”와 살아 있음을 뜻하는 “하이”가 합쳐져 <살아 있는 호흡 곧 생명의 호흡>을 일컫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불어넣은 것은 생명의 호흡을 말 합니다. 그런데 호흡에도 산 호흡과 죽음 호흡이 있느냐 이것 입니다. 단순히 호흡(breath/니쉬마트)이라고 하면 되는 것인데 왜 생명/life/하이를 동반하느냐 이것 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의 호흡이란 육체의 호흡이 아니라 영적 호흡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에 코에 불어넣은 생명의 호흡 즉 니쉬마트 하임은 정확히 무엇을 말할까요?

부활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20:22) 이 장면은 창세기의 아담 창조를 연상시킵니다. 아담은 흙의 티끌인 아파르로부터 만들어졌고 마지막에 여호와의 생기(니쉬마트 하임/생명의 호흡)를 받아서 산존재(네페쉬 하야/숨쉬며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창2:7)

육체의 호흡을 받는다고 산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이해이지요. 주님으로부터 나온것이 산소라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숨, 호흡이라고 하였겠지요. 부활후도 마찬가지로 그냥 호흡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성경은 영적인 책이고 생명을 담은 책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관점에서 이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부활후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이 아담 창조시 주어진 것도 영적인 생명이라는 것이 됩니다. 아담의 창조기사는 사실상 영적인 재창조의 기사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육적인 창조를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의 재창조 즉 거듭남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께서 부활후 암시하고 보여준 것이라 생각 합니다.

(요한20:22)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 he {breathed/숨} on them and said Receive the Holy Spirit"(NIV)

성경에서의 성령의 단어/원어 {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푸뉴마, 영어로 spirit}, 구약에서 루아흐는 389회 씌였다. 문맥에 따라 성령(94회), 호흡, 바람, 생기, 기운, 정신, 마음, 신, 영등으로 번역되었다. 창조에서 아담에게 불어 넣은 생기는 원어로는 니쉬마트 하임인데 “호흡”이라는 뜻의 네솨마와 “살아있음”을 뜻하는 하이(하임은 복수)가 결합된 단어로서 “생명의 호흡”을 말한다.

[니쉬마트 하임=생기]가 왜 성령인가?

전도서(3:19,21, breath, spirit, 짐승에게 주어지는 루아흐와 인간에게 주어지는 루아흐는 짐승과 인간이라는 그릇이 다르듯이 다르다. 그 자체는 같으나, 그래서 인간의 것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것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는 것임)에서 확인할수 있고 예레미야 애가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모든 사물 배후에는 루아흐가 있고 루아흐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수 없다.)

(예레미야 애가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부으신자가”
"우리의 {숨/루아흐/spirit} 곧 여호와의 기름부으신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The LORD's anointed our {very life breath} was caught in their traps"(NIV)

하느님의 숨결/호흡이 곧 성령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을 것 입니다.

성령이 왜 바람에 대응되는 가는 아래와 같습니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행 2:1-3)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물론 사람과 짐승과 식물과 광물에 입류하는 루아흐는 동일하지만 입류하는 그릇들이 다르므로 루아흐도 그 그릇에 맞게 현현하게 됩니다. 사람은 다른 자연사물과 달리 영적이면서 자연적이기 때문에 루아흐의 영적인 측면을 반영하여 나타낼수가 있습니다. 루아흐의 영적인 측면과 감응하는 방법은 성경책을 읽는 것, 보리의 저서를 읽는 것, 종교 경전을 읽는 것과 아울러 그 가르침대로 살 때 주어 집니다.
 
-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에도 중도가 있다. -

(피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1-34) “숨(프라나/prana : 우주 에너지)을 내쉬는 것과 숨을 멈추는 것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수 있다. (2-49) 좌법을 완전히 익힌 뒤에는 호흡을 통해 프라나를 조절하는 조식(프라나야마)를 수습해야 한다. 조식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 숨을 멈추는 것(止息)을 통해 훈련한다. (2-50) 호흡은 들숨과 날숨 그리고 들숨과 날숨 사이의 멈춤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성질을 가진 호흡을 위치와 시간과 수를 가지고 조절하는 것이 조식이다. 조식을 통해 숨을 길고 미묘하게 할수 있다.”

호흡에는 들숨(흡기)과 날숨(호기) 그리고 멈춤이라는 지식(止息)으로 이루어진다. 멈춤이라는 지식(止息)이 곧 호흡의 중도이다. 이 중도로부터 천지개벽의 영적인 뜻인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이 자리로부터 의식은 변성이 되어 영적 감수성이 풍성해지고 영적 감각은 활발하게 깨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적 현상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초자연적인 세계를 보게 되고, 초자연적인 사물과 접촉하게 되며 초자연적인 존재와 의사소통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베덴 보리 신학 총서 개요 하 p1215-1218
<< Compendium of Swedenborg's Theological Writings>>
(1875, Samuel M. Warren 엮음)
(번역 이영근)
이 책안의 부록인 임마누엘 스베덴 보리 약전에서 (죤 비걸로우 지음, 이재구 옮김)

“그의 임무에 대한 그의 합당성은 무엇보다도 그의 호흡 기능의 특이하면서도 이상한 능력이 더 만족 스럽게 설명을 해 준다. 우리가 아는 한 스베덴 보리가 자기가 소유하고 있다고 말 한 외부의 호흡 기능이 아닌 내부의식 기능을 전에 다른 어느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던 일은 없었다. 그의 영적 시력이 열린 뒤로 습관적으로 쓴 영적체험 일기에서 (스베덴 보리)는 다음 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또 그들의 언어의 성격에 대해서 그들과 이야기 했다. 그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서 그들은 호흡의 특이함을 내게 보여 줬다. 나는 그들의 믿음의 상태에 따라 계속적으로 그들의 허파의 호흡이 달라진다고 들었다. 나는 이런 것을 전에는 몰랐다. 그러나 이해하고 믿을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호흡이 주님에 의해서 형성 되어서 상당한 시간 동안 나는 외부의 공기의 도움없이 내부로 숨을 쉬었는데 그러면서도 외부의 감각은 계속 예민했다. 이러한 기능은 인간이 소유할수 없으며 주님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밖에 형성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는 또 듣기를 내가 영들과 함께 하며 그들과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호흡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

나는 어린 시절 아침 저녁에 기도 할 때 처음으로 이렇게 호흡하는 것에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때때로 내가 허파와 심장과의 조화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을때도 그랬다. 나는 항상 거의 느낄수 없는 아주 잠잠한 호흡이 있음을 관찰했다. 그리고 뒤에 그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고 글을 썼다. 이와같 이 나는 어린아이 때부터 그와 같은 호흡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수년동안 계속 되었다. 그 뒤로 내가 영들과 대화하도록 하늘이 내게 열렸을 때 나는 한 시간 이상 숨을 거의 쉬지 않았는데 내가 생각할수 있을 정도만 숨을 쉬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나를 내부 호흡으로 인도하셨다....‘
 
(영국의사 윌킨스 박사 Dr. Wilkinson) "우리는 우리가 숨쉬기 때문에 그대로 존재한다. 내부의 사고는 내부의 호흡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 더 순수한 영적 사고는 물질과 거의 섞여지지 않는 영적 호흡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호흡이 없다. 외부의 대기를 완전히 호흡한다는 것은 감각과 근육의 힘을 완전히 향유하는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반면에 혼수상태나 죽음의 상태는 사고의 내부 호흡의 계속됨 혹은 영혼의 감각이며 이때에 육체의 호흡은 취소되는 것이다. 속에 이런 것이 있을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저 세상의 사람들과 사건들과 의식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동면 또는 다른 현상들이 이러한 관찰의 타당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고로 생각이든 명상이든 묵상이든 황홀의 상태이든 우리의 내부 생명의 역량은 호흡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우리의 주장은 공통적인 경험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호흡을 뛰어 넘는 비슷한 힘 즉 호흡없이 살아서 생각하는 힘 -왜냐하면 공기를 올려 마시는 동시에 마음을 끌어내리고 또 그렇게 함으로 인간이 동시에 영적이며 물질적인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 육체의 호흡이다.- 그 힘이 스베덴 보리 외에 다른 많은 영시자들의 재능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이다.

힌두교의 수행자들이 비슷한 상태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 최면 현상은 이러한 고대의 상태와 영원한 법칙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당신을 이 세상으로 이끄는 것들을 제거하거나 중단시켜 보아라. 그러면 영이 가볍게 그 다른 세상으로 떠 올라 온다. 그러나 스베덴 보리가 보고한 그의 상태와 현재의 예에는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 현대의 예는 인공적이고 외부의 노력으로 일으킨 것이지만 스베덴 보리의 경우는 자연적이며 타고난 것이라 말할수 있으며 그의 소원과 호흡이 합해져서 나타난 것이며 잠이 들지 않고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이며 황홀상태나 환상속에서 얻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현대의 예는 가끔 일어나는 것이고 스베덴 보리의 경우는 중단되지 않았고 혹은 27년간 거의 중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스베덴 보리가 이런 깊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총명하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만 호흡에 관한 그의 생각의 규칙적인 진전을 나타내는 그의 해부학 연구와 저서를 검토하면 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숨을 들이 쉴때는 많은 생각들이 마치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 사색의 공간처럼 밑에서부터 급하게 몰려 오는 것을 볼수 있을 것이다. 숨을 속에 품고 있으면서 서서히 내쉴때 우리는 우리 생각의 대지(大旨 : 말이나 글의 대강의 요지)를 깊이 보관하면서 마치 영의 보다 높은 기능과 교통한다. 이것은 내가 내 자신을 관찰하면서 본것과 같다. 숨을 내쉬지 않고 품고 있는 것은 영과 교통하는 것과 같으며 숨을 들이쉬는 것은 육체와 교통하는 것과 같다.‘
 
(영국의사 윌킨스 박사 Dr. Wilkinson) "이것은 사실 너무나 흔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거의 생각조차도 안한다. 자연 생활에 너무나 가까워서 그 원리를 지식안에 담기에는 너무한 것 같다.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몸의 작용의 섬세함에 대해서 언급해 볼수 있다. 인간의 동물성에 대조해서 무한한 섬세함에서 나오는 예술은 서로 대응하는 무호흡과 내쉬는 숨을 요한다. 청진기로 가슴 속의 낮은 소리를 듣거나 입과 귀로 원거리 소리를 듣는 것처럼 가장 섬세하고 귀에 가장 적게 거슬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숨을 멈추어야 한다. 보통의 귀가 죽고 다시 살아나냐 이러한 정교함을 들을수 있는 것이다.

빨리 날아가는 혹은 아주 작은 물건을 겨누기 위해서는 무호흡의 시간과 침착한 행동이 필요하다. 멈춘 허파가 뛰는 심장을 안정시키는 압력을 주어야 한다. 시계의 정묘한 기계를 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속의 중앙 용수철의 무동요를 요한다. 마음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고 관찰하는 것도 빛을 복사하는 태도로 가만히 있는 것을 요한다. 부정적인 예를 들자면 아이들의 첫 번 동작과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너무나 빠르고 혼동되는 호흡이 원인이다. 생이 아직 그 게임을 하기 위해서 대기의 공간을 정하지 않았고 그 장면 자체가 본성에 맞지 않는 욕망과 생각을 가지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언행이 위에 말한 상태를 요하며 일반적인 진리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호흡을 훈련시키는 것을 자신의 업무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힘, 마음의 힘, 심지어는 지혜까지도 모두 우리의 호흡에 의지하고 있다. 스베덴 보리의 경우는 다만 특출한 공기처럼 느끼고 원하지만 감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줄뿐이다.(?? 번역....)

윌킨스 박사와 같은 예민하고 성공한 생리학자가 스베덴 보리의 주장에 표시한 존경심인데 이러한 존경이 나(죤 비걸로우)로 하여금 한가지 언급을 하도록 용기를 주고 있다. 이 언급은 즉 스베덴 보리가 말한 외부 호흡기관을 습관이나 직업상 가장 활발히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영적인 힘에 의한 연구와 명상에 가장 덜 치우친다는 것이다.“
 
- 성령=루아흐=푸뉴마=프라나(PRANA) -

(초인생활 완역본, 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서 4부, 12, 프라나/PRANA)
 
우주 보편적인 생명력이 모든 원자를 둘러싸고 관통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 생명력을 호흡하여 체내로 흡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이 생명력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이 생명력의 작용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생명력을 ‘호흡으로 들이마실수 있다’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렇다고 단순히 호흡하는 것만으로 이 우주의 생명력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진 않는다. 프라나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면서 호흡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 프라나는 물질에 속하는 공기보다도 훨씬 정묘하므로 단순히 육체의 호흡이나 생리작용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가 호흡한다고 해서 전기력을 인체에 끌어들일수 없는 것처럼 단순히 호흡만 한다고 해서 프라나가 인체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호흡할 적마다 어느 정도 전기력이 들어오는 수는 있다. 프라나라는 우주력도 그런 경우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면 그러한 모든 인상이 마음속에 기록된다. 이 기록된 인상이 관념이 되고 그 관념이 말이 된다. 이것은 육체적인 호흡에 대비하면 정신적인 호흡이라 할수 있다. 한편 인간에게는 자기 존재를 완전케 하려는 내적 주의가 있다. 이 내적 주의가 외적주의와 연결될 때 즉 우주의 완전성을 향하게 될 때 - 세네카는 이를 영혼의 눈이라 부른다. - 주위에 있는 우주력이 인간의 육체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신비주의자들은 주의력이 우주의 힘을 끌어들이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내적인 호흡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위의 영적인 에테르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완전히 이완된 육체와 집중력 그리고 완전히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영혼의 호흡’이라는 것으로 참나가 에테르 속으로 침투하여 생명력 즉 영적인 에테르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책속에 있는 글임) ## ‘우주 호흡‘이란 육체적인 호흡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에테르 속에 있는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호흡이란 보통 공기를 우리 몸속으로 들이마시고 우리 몸에 동화하지 못한 것을 내뿜는 일을 말한다. 그런데 영적인 호흡은 영적인 에테르 속에 있는 생명력을 고요하고 주의 깊은 집중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적인 호흡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적인 호흡과 육체적인 호흡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응시하면 우리 의식은 대상에 관한 인상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받아들인 인상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영적인 에테르에 주의를 집중하면 영적인 원소가 우리 육체속으로 들어오게 되어 육체는 활기를 띠고 생명력으로 충만해 진다. ##

우주에 충만해 있는 이 생명력은 모든 원소에 침투해 있다. 프라나는 세포가 성장하도록 자극하는 힘이다. 프라나는 실로 모든 생명체가 자라나는 데 원동력이 되며 생명을 유지하는 원소가 된다. 한편 프라나는 생명을 흡수하기도 한다. 다른 모든 힘과 마찬가지로 프라나는 긍정적, 부정적인 작용, 반작용을 한다. 이는 마치 공기가 작용 반작용을 하면서 흐르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기가 숨쉬고 움직인다고 볼수 있으며 공기 속에서 공기와 공기끼리 작용한다고도 말할수 있다...

보편적인 우주 생명력인 프라나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프라나야마]라고 한다. 보통 프라나 호흡법 즉 우주의 생명력을 의식적으로 호흡하는 수련법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이 호흡법의 정확한 방법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고 시간과 지면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첫째로 이 호흡법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발견해서 주의 깊고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이 호흡 과정에서는 주의 깊음이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주의 깊음이란 최고의 근원 즉 신이라 불리는 일체를 포함하는 존재에게 일심집중하는 것이다. 이때 마음에 긴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마음의 긴장을 푸는 것이 둘째로 중요한 일이다. 영적인 질료인 프라나는 지극히 정묘하고 민감하기 때문에 조금만 힘을 가해도 빗나가게 된다. 누구나 공중에 떠다니는 실이나 솜털을 잡아보려고 한적이 있을 것이다. 이때 잔뜩 깉장하여 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잡지 못하고 놓쳐버리고 만다. 그러나 조용히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도록 기다리면 솜털을 잡을수 있듯이 이 호흡법의 비결도 이와 비슷하다. 이는 또한 잊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할 때 기억해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생각이 떠오르지 않다가 마음을 편안히 하고 고요히 있으면 갑자기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와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프라나는 편안하고 고요해야 심신속으로 흡수된다. 마음은 어디에도 걸리는데가 없어야 하고 몸은 완전히 긴장이 풀어져야 한다. 마치 전신의 세포가 서로 한없이 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이 마음은 전적으로 자유롭고 무한히 확장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육체적인 제약감을 완전히 잊어버리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한 상태가 되어 우주의 질료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프라나가 세포 전체에 흘러 들어가 생명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 호흡법은 육체를 언제까지나 젊고 활기 있게 유지한다.

## 프라나 호흡은 신비스럽다거나 배우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태양의 본성이 만물을 평등하게 비추기 때문에 우리가 태양 빛을 흡수하는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마찬가지로 프라나도 온 우주에 두루 퍼져 있으므로 우리는 프라나를 얼마든지 흡수할수 있다. 그런데 영적 에테르의 살아 있는 에너지는 침투력이 태양빛보다도 더 강력하다. 이것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평안히 하고 주의를 깊이 집중해야 한다. ##

이것은 육체의 세포와 조직을 확장하고 산화작용을 증가시켜 육체를 유지하고 육체에 활력을 주는 행법이다. 또한 모든 세포에 근본 에테르의 영적인 바람을 쏘이는 방법이라 할수 있다. 빛 한 줄기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듯이 프라나 속에도 생명의 요소가 들어 있다. 이것이 모든 힘의 본질이다. 프라나는 산소가 아니나 산소에다 생명을 주는 산소안에 있는 생명이다. 프라나는 전기가 흐르도록 한다. 프라나는 마음에 인식작용을 준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되며 모든 힘의 배후가 되는 힘이다. 이것을 성서에서는 신의 영이라 한다. 프라나야마 즉 영적인 호흡을 하면 몸속으로 들어온 모든 요소가 팽창하여 산화 즉 기화된다. 이것은 마치 물질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공기를 통하게 하고 태양빛을 쪼이는 것과 같다. 육체의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에 걸림이 없을 때 육체와 마음은 한없이 확장되어 프라나가 심신을 통과할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심신 전체는 새로워지고 활기차고 생명력으로 충만해진다. 이것이 바로 프라나야마 즉 영적인 호흡이다. 다만 이 행법에서는 주의를 집중해야 하는 것이 근본적인 비결이다. 마치 일광욕을 잘 하려면 태양에 주의를 집중해야 하듯이.

## 육체적인 긴장이 생기는 것은 먼저 정신이 위축되어 그에 따라 근육이 위축되기 때문이다. 정신이 위축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대상과 주위 환경에 마음이 사로잡혀 제약 당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좀더 넓게 볼수 있게 되면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매일 매일 자신의 전 존재를 프라나에게 쏘이면 생명력이 활발해지는 것은 물론 잠재된 능력도 개발된다. ##

이 행법으로 요가 수행자들은 일정 기간동안 인체 활동을 정지시킬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인체의 전 조직을 쉬게하고 인체를 근본 생명 원소와 연결하여 새롭게 한다. 요가 수행자들은 흔히 호흡을 중지하는 방법을 써서 이 결과를 얻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호흡을 중지하는 수행을 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물속에 빠져 숨을 쉴수 없는 것과 같이 위험하다. 억지로 호흡을 중지한다거나 인체 활동을 중지시킬 필요 없이 몸을 부드럽게 하고 이완하면 생명 에테르를 느끼게 되고 몸과 마음은 활기차고 생명력으로 충만해진다. 이것이 내적인 호흡이다.

## 대사들이나 고도로 수행한 요기들이 육체의 활동을 중지시킬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바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은 단순히 육체의 생리적인 기능만 중지시키는 것이 아니고 육체에 생명력을 주는 높은 작용이 자기 자신과 하나임을 깨닫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육체의 생리적인 기능은 필요 없게 된다. 큰 것은 언제나 작은 것의 필요를 채워줄수 있고 대신할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식사나 호흡을 중단하거나 심장의 활동을 중단하는 수행을 함부로 하지 말라. 그것보다는 거룩한 신성에 자신을 던져 넣어라. 그리하면 전 존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것이다. ##

이 행법은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활기 있게 한다. 마음이 너무 긴장되거나 위축되어 있으면 마음이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한다. 마음이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면 좋은 생각이 제대로 나올수 없다. 프라나야마 행법을 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진다. 이것은 마치 너무 단단하게 조인 나사를 느슨하게 풀고 기름을 쳐주어야 기계가 잘 돌아가는 것과 같다. 이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해서 심지어는 아주 어렸을때의 기억까지도 생각난다. 이러한 기억은 아무런 노력 없이 되살아난다. 또한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즉시 알게 되는 능력도 생긴다. 프라나는 만물에 침투해 있기 때문에 프라나와 마음 작용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라나는 마음이 작용할 때 마음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프라나는 인간의 모든 기능을 보편성과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프라나는 우주 보편적이라서 모든 행위의 길을 열어주며 모든 질료의 기초가 되는 방사 에너지이다. 원초적인 상태에서 보면 질료가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료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질료와 에너지라는 것은 단일한 원초 에너지의 양면에 불과한 것이다. 이 원초적인 에너지가 바로 프라나 즉 영이다.

## 활력 즉 살아 있는 에너지는 음식을 먹어서 생기거나 호흡을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우주 생명력의 활동이다. ##

좀더 정확히 말하면 프라나는 영의 여러 요소 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왜냐하면 영이란 에너지일뿐만 아니라 지성이고 질료이기 때문이다. 프라나는 에테르보다 더 정묘하다. 서구 학문에서는 프라나와 에테르를 통일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 정묘함과 활동성에서 차이가 있다. 프라나는 항상 활동하고 있으나 에테르는 활동이 발생하려는 상태에 있다. 에테르는 프라나가 전화된 것 현상화된 것이다. 전기와 같은 자연의 정묘한 힘, 만상을 움직이는 요소는 모두 프라나에서 갈라져 나왔고 프라나가 작용하는 매개체일뿐이다.

## 영이라 함은 우주라는 창조기관이 활동하는 것이다. 영은 활동하고 있는 신이다. 이 활동에는 신의 본성에 있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따라서 창조물에도 신의 본성에 들어 있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

인간의 육체를 포함하여 물질적이고 형태 있는 것은 붕괴되면서 프라나로 되돌아간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에너지로 되었다가 결국은 원초적인 에너지로 되돌아 간다. 우리가 프라나를 끊임없이 받아들일수 있으면 더욱 더 활기 있게 되고 더욱더 원기가 살아나서 인간의 마지막 적인 죽음까지도 극복할수 있게 된다. 이와같이 하여 늙음과 죽음을 극복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프라나의 힘으로 육체를 재건한 것이다. 프라나는 인간이 휴식하고 있을때나 잠자고 있을때도 미약하나마 작용한다. 그러나 프라나가 존재함을 의식하고 몸과 마음을 완전히 이완하여 주의를 집중하면 도처에 꽉차 있는 프라나가 몸과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이렇게 하여 몸과 마음이 소생하는 것이다.

## 늙음이나 죽음은 인간이 실패하거나 빈곤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는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져 활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

존재의 원초적인 속성중 하나가 지성이다. 프라나는 살아 있는 생명력이요 질료는 지성과 생명 이두가지가 작용하도록 형상화한 것이다. 지성, 생명, 질료는 서양 철학에서 정의한 바와 같이 제일 원인의 삼위일체이다. 즉 지성은 앎의 면이고 생명은 만물을 살리는 면이고 질료는 형상화되는 면이다. 프라나는 보통 질료와 생명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질료와 생명은 지성이 창조물을 통제하고 지시할 때 매개체가 되고 수단이 된다. 이 원초적인 지성, 생명, 질료야 말로 바로 전능한 신이 활동하는 세가지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인식하고 안하고는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긴 하지만,“

 

Comments

가로수 2008.11.02 10:25
< 정반합(正反合)을 성취하는 이, 그리스도 신인(Christ God-man) >
<===정반합을 성취하는 이가 그리스도라는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그리스도라고 꿰어 맞추려고 하는 꼴이 꼭, 제비다리 부처뜨려 놓고 소뒷다리 갖다 묶어두느 꼴입니다.
가로수 2008.11.02 10:30
<1) 선(善)과 악(惡)의 대립은 본성상과 질서상에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2) 이 본성과 질서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유를 누린다. 3) 세상안에서는 선과 악이 없다. 선인과 악인이 없다. 일반적으로(속과 겉이 일치하거나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이 사람안에서 일치를 이루면 사람은 천국에 있든지 지옥에 있든지 하게 된다.) 4) 정반으로 말하자, 정반(正反)이라는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여 중화하고 화해할수 있는 방법은 5)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영계가 있고 선과 악 사이에 인간이 있듯이, 정과 반 사이에 인간이 있을수가 있다.>
<===황당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전혀 근거가 없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영계가 있고 선과 악 사이에 인간이 있듯이"라는 구절을 미리  단정하고 끼어 넣었군요.....

이하 글의 내용이 목적을 위해서 작위적인 내용을 너무 조잡하게 끼워 넣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어 반론을 생략하니 헛삽질은 그만 두시길.......
고옴 2008.11.04 13:53
바로 위에 있는 피해자님이 쓰신 호소문을 한번 읽어 보세요.
쓸데 없이 말장난 하지 말고 일반서민들에게 민페 끼치지 마세요.
참 한심 스럽습니다.
예수가 교회 크게 지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나 보죠?
너도나도 교회 신축이다 뭐다 난리들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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