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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parsec (먼소류)
날 짜 (Date): 1997년11월19일(수) 09시30분11초 ROK
제 목(Title): 욥의 신화[번역]
개인적으로 교회 다니던 시절부터 욥기에 관심이 있던 차에 웹에서 상당히 맘에 드는 욥기 해석이 실려 있어서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혼자 읽기 아까운 멋진 해석이라 생각되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욥기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을 나중에 쓰게 되더라도 이 글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게 될 것 같군요. 그래서 차라리 이 글에 대 한 비평을 써볼까 말까 생각 중입니다. 관심 없으신 분은 큐 때리고 나가셔도 무방....
Source=http://www.info.com.ph/~etan/myth_of_job.html
신화에는 그 안에 인간 됨의 본질에 관한 무수한 진리를 응축해 넣는 길이 있다. 욥의 신화도 예외가 아니다. 이 신화는 특히 인간이 그의 오랜 믿음을 초월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그것을 보다 나은 현실 이해를 위해 희생시키는 길을 택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인식을 더 포용적인 것으로 전환시켜가는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욥 신화는 인류가 신과 현실에 대한 성숙된 이해를 향한 노력을 통해 미몽을 깨우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욥 신화가, 성서의 욥기의 저자가 독자적인 판을 쓰기 전부터 수 세기 동안 존재해 왔다는 것을 성서 학자들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욥기에서 보는 것은 원본이 아니라 스스로 욥과 똑같이 고통을 받고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욥의 신화에서 감동을 받고 연민을 느낀 사람에 의해 활발하고 열정적인 시로 살아난 작품이다. 정말로 몸서리쳐지는 욥의 고통을 겪고 욥과 같은 고난을 통과한 사람만이 그런 생기 있고 예민한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 거의 틀림 없다. 그 자신이 스스로 고통을 겪고 그런 혼동 속에서 눈을 뜬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이야기는 결코 그것이 가진 충격과 적절함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열정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욥기를 읽을 때 우리는 단지 가상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그 진통陣痛과 와해瓦解, 그리고 고난의 본질에 대한 최종적인 통찰을 읽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마도 저자의 인생에서 가장 사무치는 순간들을 읽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라.
저자는 욥의 인물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욥은 부유하고 풍족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많은, 믿기에는 너무나 많은 목축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욥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만화에 가깝다. 도대체 어느 누가 5000필의 낙타를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수백이나 수천의 다른 가축은 말할 것도 없이. 누구든 그런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사실 부자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전설이란 걸 쉽사리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루이스 캐롤(역주:<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과 욥기의 저자는 우리가 그들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환상적인 표현을 했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러면 저자가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면 그것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우리는 욥이 모세의 법이 지배하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역주:이 같은 보복율은 함무라비 법전에도 명시되어 있는 만큼 우리는 욥의 시대가 모세보다 이전이라는 것 때문에 필자를 시대착오를 하고 있다고 몰아 부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을 적절히 기쁘게 하면 보상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벼락이 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욥이 자기 마을과 중동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실상 매우 고결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이 사람은 그런 막대한 부를 얻을 만큼 하나의 오점도 없이 깨끗하고 어떠한 죄도 없는 사람이다.
욥은 또 다른, 이번에는 더욱 미묘한 이유에서 부유하다. 그는 신이 정말 누구인가에 대한 환상에 있어서 부유하다. 욥에게 신은 정의, 즉 그의 법을 어기는 자들에게서는 빼앗지만 그에게 계속 복종하는 자에게는 주는 '주主'인 것이다. 욥은 의심 없이 법을 지키는 완벽한 종이다. 그는 아무런 법적인 잘못도 하지 않고, 정확히 지정된 시간과 방법에 의해 송아지를 희생으로 바친다. 그는 신에 대한 이런 환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진실로 부유하다.
욥은 세부 사항에 대해 꼼꼼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신이 너무도 약삭빨라서 그의 자식들의 죄가 자신에게 역추적되어 돌아올 수 있고 또한 그러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정기적으로 호출하여 정화시킨다. 그들이 실제로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그는 제물과 희생과 기도로써 그들을 씻어 준다. 그들이 고백할 것이 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는 단지 확실한 것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불순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고 음란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후회하느니 확실히 해 두는 게 낫다. 맥베드처럼 그는 씻고 청소하고, 그것을 또 하고, 그러고도 그가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또 한다. 강박적이고 강제적인 욥의 제의祭儀는 그와 현실 및 신과의 관계가 깨지기 쉬운 것임을 증언하고 있고, 욥이 매우 병적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까지 그의 환상의 섬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현실의 파도가 그를 덮치는 것을 신경증이(노이로제가) 언제까지 막아 줄 수 있을까?
우리의 신화적인 영웅은 모르고 있지만 욥과 같은 인간의 삶의 흐리멍덩한 뻔함에 싫증난 신들은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 냈다.그래서 신은 그의 사탄(적敵, 악마)을 조롱하여 그의 충실한 종에게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나쁜 짓을 하여 그가 아첨을 게을리하게 되는지 보자고 도전한다. 어떤 악마적인 천사가 그런 내기를 거절할 수 있으랴?
바로 이어서, 도미노 효과가 작용하여 욥에게 그의 지상 제국이 몰락했다는 소식이 덮친다. 그의 낙타 목장은 강탈당하고 양들은 벼락을 맞아 타버린다. 그의 자녀들은 테러 분자의 폭탄에 죽음의 희생자가 된다. 그의 세속적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갔으니 우리는 욥이 위로할 길 없는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사업가가 그와 같은 재정적 재난에 의연할 배짱이 있겠는가? 어느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닥친 그런 운명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욥은 정신병자 같은 침착함으로 자랑스럽게 일어서서 그의 신을 찬양한다. 그는 슬픔이나 실망의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도저히 믿을 수 없게도(그리고 나중에 우리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도록)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외침은 다만 그의 신에 대한 충성의 반복이다.
저 위에서는 신이 자기의 승점을 계산하고 있다. 그가 흘끗 보니 사탄이 추잡한 소리를 혼자 지껄이며 거칠게 걸어오고 있다. 재미있어진 신은 큰소리로 욥이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묻는다. 충분히 분명하게도 그의 충성스러운 제소자는 걸어 올라와서 욥이 자기 몸 하나는 습격을 피해 다치지 않았으며 만일 자신이 상처를 입으면 신에게는 안면 몰수하고 정당을 옮길 것이라고 고함을 쳐 댄다. 신은 코방귀를 뀌며 내기 돈을 걸고 그에게 그의 충실한 종 욥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의 목을 부러뜨리는 것은 제외하고서.
그래서 우리는 머리에서 발가락까지 부스럼이 나서 고름이 줄줄 흘러나와 온몸을 덮고, 움직일 때마다 고통으로 신음 소리를 내는 욥을 보게 된다. 그는 이제 무일푼일 뿐 아니라 병으로 포위 공격을 당해 의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둥병자가 되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추방된 자로 취급 받는 심리적인 괴로움까지 당한다. 그는 일꾼들과 하인들에게서 버림받고 아이들은 죽었으며 친지와 친척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재산을 잃었고, 그의 아내 한 사람 외에는 모두 떠나 버렸다.
저자는 그 신화에서 이렇게 일찍부터 욥의 앞으로의 인생 행로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신화 전체에 걸쳐 분명한 문학적 통찰력으로 그는 성미 급한 욥의 아내를 통해 욥의 예지를 그리고 있다. 사실 말 그대로 깨달음에의 길은 그녀의 신성모독적인 충고 속에 반어적으로 드러나 있다. 욥이 곧 스스로 찾아내겠지만 그의 곤경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길은 그가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을 버리고 신을 저주하고 죽는 것 밖에 없다. 스스로 적당한 시간이 되면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피어나는 지혜로, 그리고 그의 작은 믿음과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 놓인 어쩔 수 없는 장애물로 인해 욥은 바로 그의 아내가 훈계한 그 행동을 취할 것이다.
욥의 아내는 누구인가?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욥과 같은 사람인가? 그녀는 존재하는 힘 앞에 기도하고 희생을 바차고 무릎을 꿇는가? 그녀의 말 이전이나 이후에도 그녀에 대한 어떤 명백한 설명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삽화에 의하여 저자는 그녀의 악마적인 성격을,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악마적인 지혜를 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그녀의 신성모독적인 대담함과 통렬하게 과격한 소견에 깜짝 놀라지만, 그녀의 품위 없는 말 뒤에 있는 비교할 수 없는 단순한 진실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든다.비록 그녀의 어조는 신랄하고 비난조이지만 그녀의 조언은 욥이 삼켜야 할 쓴 약이기에 우리는 그녀가 옳다는 것을 시인할 수 밖에 없다. 어느 날 그녀의 이름이 소피아(지혜)라는 것이 밝혀진다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뱀처럼, 이브처럼, 욥의 아내는 남자에게 권위--율법--에의 복종을 포기하고 그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부추긴다.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에 대해 죽음은 그 대가가 되겠지만 그것은 그의 영혼을 위해 가치있는 일이다. 창세기에서처럼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다고 생각되지만 가장 먼저 진실을 직관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남성과 공유한다. 두 이야기 모두에서 남성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고 같이 먹는다. 그 열매를 먹은 결과는 예고된 죽음이지만, 그것은 새로운 현실로 안내하는 고통스러운 죽음이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저자가 남편과 아내를 이용하여,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서가 아니라 그 특징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 해부학적 차이를 떠나서, 단지 그 종種의 생물학적인 남성이나 여성 안에 대응되게 내재되어 있지만은 않다. 그보다는 인간은 그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같이 있을 때에만 전체로서 하나의 인간이다. 따라서 지혜는 그 종種의 여성만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안의 여성적 측면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한 그에게 말하는 지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인간이 그 안의 남성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문명의 조류나 압제에 대항하여 싸움을 걸고 반기를 들 필요를 느낄 수 있다.
그 신화들에서는 그렇다. 아담은 단지 남성일 뿐이 아니고 이브도 단순히 여성이 아니다. 이브는 아담과 이브 둘 다에 들어 있고, 아담도 남성과 여성 모두에 들어 있다. 저자의 의도상 욥의 아내는 분리된 존재-그 자체로서의 욥의 아내-가 아니다. 이 신화에서 차라리 그녀는 욥의 무의식, 즉 그 안의 여성성이다. 그녀는 욥의 무의식적인 반도叛徒이며, 부족과 율법을 초월하고 싶어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불온해 보이고 싶어하는, 반대하는 목소리이다. 그녀는 욥의 모든 물질적 내지 정신적인 기반의 희생과 휘발揮發 가운데에서 예기치 못한 명료함과 활기를 띠고 분출하는 그의 양심이다. 그녀는 욥이 어린 시절부터 붙잡혀 있던 환상의 거미줄을 잘라내고 그를 자유를 향해 풀어 놓는 불타는 검을 지닌 천사이다.
욥의 곤경에 대한 소식은 멀리 그리고 빨리 퍼져 나갔다. 결국 그의 세 친구가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 왔다. 그들은 그가 혐오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외로웠고 조용했다. 동정심에서, 어쩌면 또한 그의 고난의 무게에 대한 감정의 이입에 의해, 그들은 그와 함께 침묵을 지킨다. 7일 낮과 7일 밤 동안 그들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욥과 그의 친구들의 침묵은 잉태孕胎의 기간이다. 그것은 욥이 그의 고난을 이해하고 그의 여성적 지혜에 동화되는데 필요한 휴한기休閑期이다. 이 부화의 기간이 우주의 창조가 7일로 구성된 것과 똑같이 일주일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저자는 이 일주일이 그의 백성들에게 종교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고 그것으로써 욥의 침묵을 암시적으로 축복하고 성화聖化시키고 있다.
창조 신화에서 우리는 제0일의 무無로부터 제 7일의 놀라운 우주에 이르는 전망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신이 세계에 대한 계획을 실현해 나감에 따라 세계가 한 차원씩 자라나는 것을 본다. 다른 한 편에서는 욥이 생기를 띠어 가는 이 침묵의 기간 동안 우리는 그의 생각과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우리는 이 사람의 처음과 나중의 상태만을 알 수 있다. 그는 확실히 독재적인 신의 모든 변덕과 기호에 복종하던 노예로부터 인류를 그들의 해방을 위한 힘찬 전투로 인도해 가는 장군으로 변신한다.
우주의 기원이 본질상 창조적이듯 욥의 유치한 권위주의적 성격으로부터의 각성도 또한 그러하다. 욥은 진화하고 있는 우주의 축소 모형이다. 두개의 계속되는 창조 사건에서 일치하는 평은 "좋다"이다.
결정적인 시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없지만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충만한 청각적 침묵은 기만적이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부동不動의 껍질 안에서 부화되어 욥은 드디어 각성을 하게 된다. 오래 끈 싸움을 끝내려고 준비하듯이 욥은 스스로를 수습한다; 즉 그의 정신적 구조는 그의 부족과 그의 신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대립에 직면하기 위해 재조직된다.
욥의 창조적인 각성과는 대조적으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은 그들의 신학에 완고하게 매달려 둔감하기만 하다. 욥의 이 친구들의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 욥의 딜레마가 얼마나 심각한지 심사숙고 해 보는 대신에 그들은 스스로를 달래서 잠에 빠져 드는 편을 선택한다. 욥의 고통과 고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그들은 욥을 곤경에 빠진 사람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욥의 인생에서 이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앞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의 전제 조건이다. 그의 엄청난 부, 그의 가족, 그의 제국의 몰락, 사랑하는 자녀들의 상실, 질병에의 이환罹患--이 모두가 다가오는 절정을 위한 우리의 영웅의 역사이다. 욥은 최대의 부와 미망迷妄에 달아 올라 있었고, 그 다음에 차가운 홍수가 닥쳐와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사그라뜨리고 씻어가 버렸다. 열熱적 충격의 파괴적인 기작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우리는 천둥의 울림이 이 도가니의 균열과 파열을 예고하는 결정적 순간을 당하여 움츠리게 된다. 신의 말씀이 기록된 석판이 모세의 분노 속에 산산조각 난 것처럼 욥의 부족의 율법 또한 곤경에 대한 욥의 다가오는 고뇌와 격분 속에서 저주받고 땅에 내던져져 부서지게 될 것이다.
토론이 시작된다. 욥이 시작한다. 친구들의 동정의 가면인 침묵을 깨고서 욥은 자신에 대한 억제를 풀어놓는다. 우리는 이제 인간다운 생각과 마음을 지닌 욥을 보게 되는데, 그는 결국 신의 정의라는 압제를 보고 느끼며, 그는 노예와 같은 공포감 없이 그의 수치스러운 상황에 대한 가장 깊은 원한을 표현한다.
욥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란다. 그는 자궁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는 쉬운 탈출구를 열망한다. 그는 무의식의 상태로-에덴으로-돌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겪고 있는 영적인 괴로움에 대한 구원의 가도街道는 금지된 것이다. 그가 되돌아가 어린이가 되거나 영아 혹은 태아가 될 수는 없다. 성인이 되고 나면 시간적인 혹은 성숙함에 있어서의 퇴보가 허용되지 않는다.
의식의 상실이나 어린아이나 태어나지 않은 자가 되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욥은 과보호하는 하늘의 아버지, 즉 그를 다치지 않게 지켜주고 그에게 충분한 보호와 위안을 주는 이에게 어린아이처럼 의존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린다. 그의 곤경의 현실성은 그의 감상적인 유아기적 환상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그가 오랫동안 소중히 하고 믿어 온 환상들은 결국 정복당하고 그것들이 없음으로 해서 현실의 맨 살이 욥을 직면하고 있다.
욥이 그의 생각을 선포하고 회개가 아니라 실망과 절망의 말을 하자 그의 친구들은 곧장 반대 행동에 들어간다. 그들의 반응은 반사적이다. 욥의 신랄한 울부짖음은 자동적이고 돌발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를 위해 펼친 동정심을 거둬들이도록 한다. 그들은 방어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후회를 기대했는데 그 대신 그는 신이 그를 세상으로 안내한 바로 그 날을 저주했다. 이것은 그들이 알던 욥이 아니었다! 그들이 듣던 추종자 욥은 어디 있는가? 언제나 죄 없고 율법에 충실했던 그 사람은 어디 있는가? 이는 그들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마귀에 사로잡힌 게 틀림 없었다! 순양함 함대처럼 그의 친구들은 경적을 울린다. 그들은 전투 기지로 뛰어 들고, 호위대로 여겨졌던 그들은 그들이 지키고 위로하려 한 바로 그 사람의 반대편으로 돌아선다.
더 이상 그의 신의 종이 아닌 욥은 그의 주장을 편다. 두려움의 곁눈 가리개가 없는 그는 그의 처지를 보고 소름이 끼친다. 그는 완전한 혼란에 빠져 있다. 신은 계약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 율법을 글자 하나 구두점 하나까지 지키는 독실한 추종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나쁜 일이 그에게 덮치도록 허락했다. 이러한 혼란--즉 믿음과 현실의 분쟁--의 와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욥은 예전처럼 그의 믿음을 유지한 채 몸부림친다. 신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할 리가 없다! 나는 선한 사람이었다고 욥은 말한다, 그리고 선한 사람은 벌을 받지 않는다고. 욥의 괴로움은 끝이 없지만 그는 그의 재산이나 자녀들을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경건한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비통해 한다. 신의 정의는 부정되었고 욥의 내면세계--바로 그의 믿음--는 그의 육체적인 상태보다도 더 심하게 갈가리 찢겨졌다.
욥은 율법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과 율법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현실은 그가 믿고 그의 친구들이 변호하는 율법을 입증하지 못한다. 욥은 그의 눈과 마음, 영혼, 그리고 정신이 인간의 고뇌에 노출되어 존재론적 괴로움에 붙잡혀 있을 때 이것을 알아차린다. 욥은 그가 받는 불공정한 괴로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신의 본성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인과관계를 역전시켜 그를 죄인이라고 고발한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욥이 고통을 겪는 것은 그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말하는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회개를 통해서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각자의 논리의 유효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연발 사격의 교환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입심 좋고 유창하다. 그들의 신학을 위한 논증은 완벽하지만 그들은 무감동하고 무정하다. 욥의 고발자들은 욥의 모든 고통과 탄원에도 동하지 않고, 쇠락한 마음에 의해 눈이 먼 채로 있는다. 그들의 앞에는 마음의 상처를 겹겹이 입은 욥이 있건만 그들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의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그들은 그를 그들의 기소에 대한 증거이자 증명, 즉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위로와 격려 대신 그들은 그에게 유죄 평결과 저주의 선고를 내린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신학이 부적절하고 차별적이며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비록 그들은 신을 변호하는 듯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 앞의 현실을 도외시함으로써 신의 본성을 왜곡하고 있다.그들은 욥의 고난 속의 신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지독하게 뜨겁고 황폐한 사막에 있는 신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욥을 뒤덮고 있는 고약한 종기 속에서 신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사람과 땅과 거기 사는 모든 생물--안에 신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신과 그들의 미망을 혼동하고 있다. 그들은 그(신)의 율법, 그의 지혜, 그의 징벌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걸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아버지와 조상들의 율법, 지혜, 그리고 징벌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그 아무 것도 얘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것은 욥에게도, 고통에 대해서도, 심지어 그들 자신에게도 의미 없는 메아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내와 수다는 반란을 일으킬 것 같은 자를 가두고 침묵시키기 위한 훌륭한 소음의 탄막彈幕을 형성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달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신은 그들에게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의 혀에서 나오는 말은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사회의 사회적 도당의 옛 전통을 방어하기 위해 말해진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욥의 고발자들이 욥의 곤경을 조소함으로써 욥의 부에 대한 부러움과 억눌린 탐욕을 드러내고 있다고도 상상할 수 있다. 욥을 동정하는 대신 그를 조롱하고 야유함으로써 그들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들은 자라면서 드러내놓고 모독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율법과 신학을 경멸과 질시를 표현하는 무기로 사용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들은 신을 변호하는 게 아니라 그들 친구의 사치스러운 인생이 결딴난 것을 사악하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에게 이르는 수단을 강탈하여 그 언어를 그들의 제2의 자아(원문:alterego)의 감상을 분출하는 데 사용했다.(역주: 신에게 이르는 수단은 율법과 신학 또는 그 해석을, 그 언어란 율법과 신학에 사용되는 표현과 용어들을 말하는 듯 함)
그러나 불일치(역주:욥의 신앙과 현실간의 불일치)의 위협은 욥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 그는 그의 거짓말쟁이 친구들이 말하려는 것에 빌어먹을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는 유죄 평결이 떨어졌고 십자가형刑의 조종弔鐘이 울렸다. 욥은 그의 문화와 전통에 반대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무죄라고 환호하고 하늘에다 주먹을 치켜 드는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신성한 교의는 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왕이 곧장 내려와 죄인을 덮칠 것이다. 그의 친구, 또래, 그의 부족은 그를 꿰찌르고 그가 스스로 만든 상처에 침을 뱉을 것이며 그는 죄인, 추방자, 반역자, 마귀의 밀사로서 죽을 것이다. 율법에 대한 저항의 말로를 알지만 그는 끝까지 그의 주장을 굳건히 지킨다. 하늘에 대한 두려움, 문화적 보복의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그 어느 것도 이제는 진실과 지혜에 대한 열정과 견줄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그의 영원한 영혼마저도 그의 처지와 죽을 수 밖에 없는 고통 받는 인간의 처지에 대한 신선한 이해를 위해 희생시킨다. 그가 몸을 던져 추구하는 대의--진리에 대한 추구--에 대한 충성은 이제 더 이상 경쟁자가 없다. 신마저도 그를 방해할 수 없다. 쿼지모도(역주:"노틀담의 꼽추"의 주인공인 꼽추 종치기)처럼 그는 하늘을 응시하며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생각은 혼동이, 마음에는 분노가, 눈에는 눈물이 가득한 채 유언처럼 이렇게 내 뱉으면서: 왜?!
수數에서도 변변찮다. 그들은 셋이다. 그는 동맹자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안락을 희구할 신도 없이 단 홀로 이다. 그가 지금 버려져 있는 외로움의 사막에 비하면 그의 조상들과 그 자신의 황폐한 땅은 어린 시절의 오아시스이다. 그는 이 사막에서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그의 친구들은 그를 그의 '변덕'이라는 유사流砂로부터 구하기 위해 그에게 돌을 던져대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고립이라는 위협과 도편추방과 심지어 이런 것들이 결국 불러올 죽음조차도 욥으로 하여금 그의 '신성모독'을 철회하고 그의 의지를 그의 부족과 부족의 신학으로 종속시키게 만들지는 못한다. 성스러운 용서 또는 섭리에 의한 사면이라는 어떠한 뇌물도 욥을 침묵시키고 그의 영혼의 주장을 철회 시키지는 못한다.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위선에 대한 형벌은 그의 부족의 어떤 신이 내릴 수 있는 것보다도 무서운 죽음이 될 텐데. 아니다, 그는 깨달음의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위협도, 그것이 인간의 것이건 무엇이건, 그를 복종시키고 그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참회하게 할 수 없다. 그는 알아야 한다. 그는 고통의 근원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신이 그의 앞에서 말하고 그의 가장 중대한 의문에 답하는 것을 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한다!
계속해서 그들의 연발 사격은 날아서 왕복한다. 논쟁은 계속되고 우리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자꾸만 듣게 된다. 욥이 혼란해 한다면 우리는 삼 회전에 가서는 현기증이 나고 메스꺼워진다. 사실 그들은 지겹도록, 영원히 논증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시작할 때보다 추호도 나아진 것이 없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각 선수들의 반격은 뻔해져서 우리는 거의 몽환 상태로 빠져 들게 될 것이고, 그것은 논쟁이 김이 빠졌다는 신호이다.
우리가 똑같은 묵은 논증의 반복 속에 지쳐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우연일 리가 없다. 저자가 서투르게 과잉[서술]을 했다고 결론짓는 것도 현명하지 않다. 오히려 뒤돌아보면 그 논증들이 반복해서 순환하며 점점 만들어지고 개작됨에 따라 이 논증들이 힘을 잃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도록 고의적으로 유도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저자는 마치 이 논쟁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려는 것 뿐인 듯이 반복을 통해서 우리가 흥미를 잃고 졸리워 하기를 원했다.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의 모든 이야기와 철학적인 해석도 욥과 그 친구들을 조금도 해답에 접근하게 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들 각자의 전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의 결여는 그들의 딜레마의 영속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를 탈진 시킨 다음 저자는 논쟁을 끝내는 친절을 보인다. 이렇게 해서 결국! 연발 사격의 의식은 끝을 맺는다. 욥이 마지막 논증을 하지만 해결된 것은 없다. 각 진영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완고하게 각자의 주장에 집착하고, 그들이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한 바로 그 언덕에서 각자 끝까지 버틴다. 침묵이 다시 한 번 압도하는데, 그것은 힘을 모으고, 군대를 재편성하고, 전략을 재검토하기 위한 또 한 번의 휴전이다.
침묵이 잇따름으로써 우리는 또 한번 신비에 직면한다. 또 다시 저자는 우리를 전후 행동 사이의 막간에 일어날 일을 우리 스스로 짐작해 보도록 내버려둔다. 그럼에도 이제 저자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제 우리에게 막간幕間에 대해서 명백히 말하는 것조차 적절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 모욕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모범을 슬쩍 보여주고서는 이제 우리에게 두 번째로 그와 유사한 사건을 추리해 보도록 어르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신화의 저자는 수학적 교양이 있고 내삽법의 과학에 취미가 있는 것이 틀림 없다.
막간의 이 덧없는 시간 동안 그는 우리에게 곧 분명해질 변화를 인지하고 해독하기를 요구한다. 분명히 욥이 폭풍 속에서 결국 그의 호적수를 만나기 전에 무언가가 드러나야만 한다. 확실히 욥의 친구들은 무기를 공중에 내던지고 그의 입장에 묵묵히 따르지는 않았다. 분명, 그들은 완고하기 때문에 그들이 항상 동맹자라 여겨 왔던 이 불경한 녀석에 대한 경멸을 유지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창조적인 활동에서와 마치 한 가지로 문제에 대한 의식적인 추구에 대한 이러한 보류는 필수적이다. 이것은 정신이 무의식에 그 문제를 넘겨주는 부화의 시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모범과 인지적 양식이 작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우리의 의식적인 정신과는 달리 무의식은 우리의 습관과 문제를 해결하고 무언가를 하는 습득된 방법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문제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본질적으로 무의식에게 그 문제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손을 빌려주는 것이다(또는, 무의식이 그 문제를 자유롭게 시도해 볼 수 있도록 넘겨주는 것이다).
욥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상처와 통증, 애도, 자기 연민, 친구들의 고집, 그리고 귀먹은 듯한 침묵으로 탈진해서 지쳐 있다. 그는 일어난 모든 일들로 인해 지쳤고, 이제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물러나고 싶다. 우리는 그 모듯 것들이 일어난 후 단지 휴식의 잠을 자고만 싶은, 단지 잠시만이라도 떠나 있고 싶은 그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욥은 고요의 항구로 은퇴하여, 그의 의식적인 정신은 그의 곤경에 대한 반추反芻로부터 손을 놓는다. 그가 모르는 사이, 그의 심층 정신은 폭주 상태로 접어든다. 빠르게 더 빠르게 회전하다가 결국 그 와류로부터 그는 그 모든 것의 실체를 직관한다.
저자는 욥의 인생에서의 새 장을 연다--천둥 같은 목소리가 폭풍 속에서 나와 욥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저자는 또 다시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교활해진다. 폭풍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우리는 즉시 신의 목소리라고 추리할 것임에 반하여 저자는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다. 갑자기 욥의 앞에 소용돌이가 나타나서는 거기서 꽝꽝 울리는 목소리가 나와 그를 꾸짖고 타이르기를 반복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혹시 믿을 만한지 몰라도, 있을 법하지는 않다. 이것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신화이다. 숙고 끝에 우리는 그 폭풍이 문자 그대로의 폭풍이 아니라 혼동에 대한 표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그것은 욥의 혼동을 표상한다. 한 편 그 목소리는 그 혼동으로부터 마침내 튀어 나온 지혜의 표상이다.
폭풍 속에서 나온 목소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그것이 적절하고 만족스럽게 표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완전하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현대 세계가 무의식, 혹은 심지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정신(psyche)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욥의 깨달음이 그가 모래언덕을 걷거나 부스럼을 짜고 있는 동안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욥이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각성을 경험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악과 고통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혜안이 그의 꿈 속에서 그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사실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신 또는 지혜가 욥의 혼동으로부터 어떻게 실체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답이 욥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가? 욥이 갈구하던 대답, 그의 정열을 잠재우기 위해 필요한 깨달음이 그 자신 안에서 끄집어 내어지기를 기다리며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어떤 초자연적인 사건의 도움이나 심지어는 뚜렷한 가르침이나 외적 근원으로부터의 계몽 없이 우리에게 지혜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의 창조적인 사람들만 보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새로운 이해와 무언가를 하는 방법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너무나 많이 인용되는 예를 들어 보면, 아인슈타인은 확실히 물리적 세계를 바라보는 기발한 방법에 도달했고 이것을 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 표현했다. 또는 싯다르타의 경우에는 붓다가 되는 그의 영적인 여정 상에서 팔정도八正道를 발견했다. 새로운 발견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면 사실상 인간은 진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상 상태 문화의 극치는 단 하나의 조건만을 요구한다: 무엇을 하거나 보거나 존재하는 어떠한 새로운 방법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전통만이 살아가고 생각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인생의 반복적인 본성은 조화로운 생활 양식으로 인도하지만 그것은 기술적이든 사회-문화적인 것이든, 윤리적이든, 과학적이든, 인지적이든, 또는 어떤 것이든 어떤 종류의 진보도 확실히 배제한다.우리는 원시 사회를 일종의 향수를 가지고 바라보고 그들의 어린아이다운 순진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평형 상태에 도달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활기 없는 상태에 머물렀다. 그들은 더 이상 변할 수 없고 또한 변화하는 조건에 잘 적응할 수도 없다.(역주: 이 절은 진보에 대한 단순한 찬양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의 요점이 아니라 보다 덜 중요한 하나의 논거일 뿐이다. 진보에 대한 비판은 별도의 주제가 될 수 있으리라...)
선禪불교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그들의 지혜를 전수하지 않는다. 선禪은 강의와 부과된 독서가 지혜를 얻는 유일한 요구 사항인 교수법적 과정이 아니다. 스승은 학생이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그 밖에는 학생의 각성에 필요한 결정적인 직관을 부여해 줄 수는 없다. 욥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에게 닥친 위기--그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풍요의 상실, 그의 신앙과 현실 사이의 모순, 그가 새로 발견한 신에 대한 증오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표현된 바 그가 속한 문화의 신학과의 해결될 수 없는 긴장--이 모든 것은 禪의 스승처럼 욥을 혼동의 정점으로 이끌고, 그 위에는 그 지혜의 목소리가 실체화한다. 이 절정의 와중에 깨달음, 즉 지혜에 대한 통찰이 있다.
목소리 욥은 지혜의 목소리에 대해 수용적이 되고 그것이 전하는 소식에 즐거워 한다. 그는 빈 그릇이 되어 기꺼이 새로운 이해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으로 채워진다. 이 혼동의 폭풍 속에서 욥은 그 목소리를 듣고 그것의 조언으로써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신은 꽝꽝 울리는 목소리로 폭풍 속에서 나와 그의 힘에 대한 종교극이자 동시에 인간의 지능에 대한 조롱처럼 보이는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은 장광설에 종사하여 무식한 사람을 꾸짖는 과학자처럼 하나씩 하나씩 계속해서 수사학적인 질문들을 통렬히 던짐으로써 욤의 무지 그 내부 자체를 드러낸다. 신의 전능함의 행렬과 욥의 무지의 창백함은 계속되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하나씩, 일제 사격은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계속되고 만일 시간과 양피지의 제한이 없었다면 신화의 저자는 오늘날까지도 신화를 계속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열거는 끝난다. 우리가 만일 냉소적이 아니라면 극적인 신의 목소리를 좀 덜 듣고 그가 묘사한 자연 세계의 전경을 우리 마음 속에 시각화 해 본다면, 우리는 오만한 신의 자기현시나 사물의 질서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에 대한 조소 대신에 신과 인간의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인식 부족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마치 신이 욥을 자극하는 것 같다: 일어나 눈길을 너의 배꼽으로부터 들어 올려라. 너의 의기소침과 침울함으로 너는 자기 중심적이 되었다. 너 자신을 잠시 잊어버리고 네 주위를 둘러 보아라. 일어나 눈을 떠라, 그리고 너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보아라!
이 세계의 원시적이고 순결한 본성으로 보이는 것들의 제시는 단순히 신의 전능함과 그의 피조물에 대한 지배의 과시일 수만은 없다. 신의 연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맹목적인 복종에 대한 권위적인 요구도, 인간의 질문하기 좋아함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현저한 것은 전체로서의 세계의 광대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가치 평가와 그 필요의 결여이다.
앞의 토론에서의 많은 증거에 의해 우리는 욥의 곤경이 그를 대단한 의기 소침과 걱정이라는 정신병적 상태로 빠뜨렸었다는 것을 안다. 생명과 재산, 그리고 개인적인 건강에 대한 다중의 손실에 대해 비통해 함으로써 그는 부정적인 생각에 몰두해 있고, 지나치게 내성적으로 되어 있고, 잠을 자지 못하고, 희망을 잃고 자멸적이 되어 있다. 그가 유기적인 원인에 의한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의심할 바 없이 저자는 하늘이 프로잭*과 발륨*을 비처럼 내려 주도록 했을 것이다.(*역주: Prozac = 항울抗鬱약, 상표 명; Valium = 정신안정제 diazepam 제제의 상표 명) 그러나 욥의 상태는 본질상 존재론적인 것이므로 그를 괴롭히고 있는 의문과 대립이 해소될 때에만 욥은 다시 온전해질 수 있다.(필주:온전하다(whole)와 건강하다(healthy)는 같은 어원을 가진다.)
욥을 우울과 극도의 걱정이라는 상태에 있다. 그를 마치 방금 속담에 나오는 과자 항아리를 깨뜨린 아이처럼 호되게 꾸짖음으로써 그의 상태를 심화시키는 것보다 더 무정하고 뻔뻔스러운 일이 무엇이겠는가? 저자가 신의 입에 올려 놓은 단어들을 깊이 읽어보면 우리는 더 이상 도덕적인 심판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자연의 장관과 신비에 대한 말에 말을 더한 묘사는 욥을 감동시켜 사물의 도식 안에서의 인간의 고통의 위치를 인식하도록 만들었음이 틀림 없다.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 그리고 원칙으로서의 미美는 도덕의 그 밑에 와야만 할 제목이 된다. 적자 생존에서의 명백한 광포함과 폭력, 먹이 사슬 내에서의 포식과 사냥 등이 존재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다만 인간의 지각과 판단일 뿐이다. 자연 세계에서 모든 고통, 괴로움, 그리고 보이는 악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필요하다. 포식자는 폭군이 아니다. 사슴은 불운한 희생자가 아니다. 방울뱀은 사악한 짐승이 아니다. 추적과 포식은 자연적인 질서이다. 병이나 포식에 의한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자연은 욥이 인간 존재의 현실을 내다 보는 현창舷窓이 된다. 그것을 통해서 그는 악과 고통의 본질을 해독한다--그것들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선과 악--이것들은 단지 인간의 개념이고 해석일 뿐이다. 더 위대한 원칙으로서의 미美는 정의, 도덕, 그리고 고통의 위에 (무지개처럼) 걸려 있다.
연설 속에서 신은 가치 판단을 요구할 만한 주제를 암시하거나 도입하지조차 않는다. 욥이 직면해야만 했던 선과 악이라는 문제는 전혀 신이 서술하고 있는 주제가 아니다. 신의 대답은 대답조차 아닌 듯하다. 그는 마치 전혀 다른 문제를 파헤침으로써 질문의 방향을 우회하는 정치가처럼 말한다. 어떻게 해서 신은 욥을 심리적인 혼돈으로 몰아 넣은 바로 그 질문을 회피할 수 있는가?
여전히 신의 대답은 신다운 대답이다. 신이 틀리게 답한 것이 아니라 욥이 너무 한정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욥의 의문에 대한 직설적인 답은 답이 없다는 것이다. 욥이 잘못된 물음을 던졌기 때문에 그의 궁지는 답해질 수 없다. 욥은 오직 그가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더 풍부하고, 확장되고, 위대한 시각을 취했을 때만이, 그리고 그럴 때에는 이해할 것이다. 신의 대답은 그 안에서 선과 악의 문제가 그 중요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신다운 대답이다. 그것은 질문이 아닌 것으로 변해버린다. 사물의 더 큰 질서 안에서 선과 악은 현실의 양 극이 아니라 단지 일부가 되어 버린다. 신의 모든 설교는 인간을 경외심으로 이끌고,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하고, 인간의 눈과 마음을 우주의 신비에 눈뜨게 하고, 인간의 정신을 그 자신과 그의 세계에 대하여 더 완전히 이해하여 사물의 질서의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끊임없는 추구에 대한 필요성으로 열어 젖히기 위한 것이다.
신의 해명 끝에 욥은 새로이 평정을 얻는다. 그는 손을 입에 대고 그의 지절거리기 잘함을 인정한다. 욥은 이해했다. 그의 눈은 열렸고, 그의 마음은 감동되었으며, 그의 정신은 더 위대한 현실을 붙잡았다. 욥은 이제 신의 정의의 정신나감을 욕하던 그 욥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그에게 닥친 잔인함에 대한 논리적인 해답을 기대하던 욥이 아니다.신화의 이 부분에서 우리가 보는 욥은 더욱 현명한 욥, 즉 신의 정의에 대한 유치한 관념--눈에는 눈이라는 오랜 율법--을 버린 사람이다. 욥은 우주의 더 큰 사물의 질서에 대한 이전의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 그는 이제 더 높은 봉우리에 서 있고, 그가 한때 현실을 바라보던 시각을 포함하는 더 큰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순진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정의에 대한 열정적인 추구는 진압되어 정의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 속에 빠져버렸다.선한 사람은 더 이상 보상 받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야만 하지도 않으며 악도 더 이상 징계 될 필요가 없다. 사물들은 그저 존재한다. 선을 행할 필요성은 보상의 기대라는 전제 위에 놓여 있지 않다. 불복종 역시 신들의 노여움을 격발 시켜 그 귀결로서, 그리고 자동적으로, 섭리에 의한 복수와 징벌을 작동시키지는 않는다. 욥은 이제 선함의 실체를 보고 안다: 즉 사람은 신이 어떤 것을 하라고 명령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좋기 때문에 선한 것(그리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욥은 이제 선이란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행해지는 것이며 수단이 아니라는 것과 악은 그 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선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구 사항으로서 회피해야 하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여기서 악은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만일 대조되는 것이 없다면 선이란 무엇인가? 비교할 어두움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빛을 알 수 있는가? 악이 허용될 수 있기 때문에 선이 가능하다. 악이 없다면 선은 단지 상상 될 수 있을 뿐이다--우리는 악할 수도 선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결론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천국으로 가는 길은 지옥을 통해 나 있다. 자아의 변형은 오랫동안 가져 온 신념들을 녹여 재난과 걱정, 정신적인 고통과 정서적인 괴로움의 불에서 정련함으로써 시작된다. 자아가 지옥의 맹렬함을 성공적으로 지나온 후에야 새로운 시작을 경험할 수 있다. 그 때서야 터널 끝의 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더 밝게 빛날 것이다.
욥은 그의 미성숙한 신념 체계를 초월하는 데 성공했고 현실의 요구가 그가 그 위에서 세계를 관계시키고 바라보았던 기반과 대립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가 가르침 받고, 아마도 평생 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들에 훨씬 더 단단하게 매달리는 대신, 그는 붙잡은 손을 놓고 현실의 조류에 끌려 휩쓸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가 믿었던 것과 사물의 본질 사이의 갈등에서 욥은 친구들의 신학에 굴복하기 보다는 그의 시대와 그의 문화에 대해 도전하는 편을 선택했다. 마음 속의 의문을 부인하고 그의 감성의 경향을 무시하는 대신 그는 대립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그의 노력 가운데 그의 안에서 계속 일어난 정신적인 실망과 감정적인 붕괴를 견디는 편을 선택했다. 그는 스스로를 과거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풀어 현실--신--과 온 가슴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역주: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와 대구를 이룸) 대면하기로 했다. 그의 고난을 이해하기 위한 갈망에의 격렬한 몰두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열정적인 동경으로 그는 각성의 숯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 현실의 용광로의 공격의 예봉을 고통스럽게 견뎠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는 지옥에서 불탔다. 질문자, 반란자, 불경한 자 욥은 그의 성급함과 불순종으로, 그의 위로자들이 예견했듯이 그슬리고 불태워졌다. 법과 전통의 언명, 그리고 신앙을 거역한 대가는 소멸이다.
욥의 아내는 전혀 과장했던 것이 아니었다.
욥은 거칠게 울부짖었다. 괴로움으로 그는 울부짖고 통곡했으며, 가차없는 고뇌와 비애로 결국 그의 과거의 신념과 그릇된 생각으로부터 정련 되었다. 각성 시키는 반박에 의해서 그는 더 현명한 인간으로 길들여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호된 시련 끝에 고요하고 침착한 새로운 인간, 자기의 과거를 혐오와 자기 모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용히 그 필요성을 인정하며 회고하는 욥을 보게 된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감사해 한다. 그는 폭풍 속에서 나온 목소리가 준 대답에 고마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이제는 이해된 계몽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고 해도 또다시 그런 지옥을 통과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해 볼 수 있다. 뒤 돌아 볼 때 지옥을 통과하는 길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고 목숨도 건졌지만 사실 그 대가는 비쌌다.
욥은 그의 부와 가족을 다시 얻는다. 그리고 그의 부는 배가倍加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 반면에 욥이 눈가리개를 떼어낼 이유를 제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계속 끼고 있었던 데 대하여 꾸지람을 들었다(역주: 원문은 "손목을 찰싹 얻어맞았다"라고 되어 있음).
어느 신인가? 신화에서 저자는 여러 번 신을 등장시킨다.그러나 면밀히 조사해 보면 신의 언동에는 서로 다른 행동간에 많은 불일치와, 심지어는 모순도 있다. 그런 차이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욥의 신화에 나오는 실제로 신 또는 유일신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와 욥에 의해 신에게 부과된 모든 행동들은, 폭풍 속에서의 그와 신과의 만남까지도, 단지 욥의 정신의 산물이다. 악마에게 욥의 부와 위안을 빼앗도록 허락한 것은 신이 아니었다. 신과 악마를 싸움 붙인 것은 그의 문화의 미숙한 신앙의 그럴 듯한 설명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사탄이 뿔이 나고 뾰족한 꼬리를 가지고 갈퀴를 지팡이로 가지고 다니지 않듯이 신은 악마에게 세상사를 장악하도록 하지 않는다.
욥에게 닥쳐온 위기는 신이나 악마의 간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욥과 그 친구들의 정신 체계가 꾸며낸 이야기이다.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현상은 단지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그 문제에 있어서는 그의 전 부족이 어떤 특정한 인과관계를 믿도록 키워졌기 때문에 하나의 위기로 해석된 것이다. 그들의 율법은 신神의 정의正義는 절대적이어서 복종하는 자는 보상을 받고 거역하는 자는 총계적으로 그리고 비례적으로 처벌 받는다고 가르쳤다.(역주: 해석하기 나름이긴 하지만,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애매한 민사 사건에 대한 최종적인 법적 해결책으로서 "신에게 맹세하고..."라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욥의 고뇌는 신의 짓이 아니라 그의 시대의 특정 정신 체계로부터 예측 가능한 방법으로 기인한 것이다.
신이 최종적으로 욥에게 양보하고 그와 대면하는 마지막 조우는 물리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유지할 수 없는 그의 세계관에 대한 욥의 정신 내에서의 공격이다. 불타는 관목 속에서 실제로 신이 모세에게 나타난 것이 아닌 것처럼 소용돌이 속에서 신이 물리적으로 자신을 증거 해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욥이 실제로 신과 대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부로의 모험 속에서 욥이 드디어 더 위대한 신, 자신이 윤색한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신,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신에 대한 이해와 만나는 것이다.
욥의 신화 중의 불일치들이 해소되었다. 신화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겉보기에 모순되게 언급된, 그리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차라리 서로 다른 부분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신은 서로 다르고, 또 변해 가는 욥과 그의 친구들과 그의 문화의 개념들과 신념들이다.그것은 마치 신화의 저자가 우리에게 신이란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그, 혹은 그녀, 또는 그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신화의 저자는 우리가 신성함의 심상들을 어떻게 신에게 투사하고 얼마나 빨리 의사疑似신에 귀결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신이 단지 우리의 정신적 예리함이나 성숙의 상태일 뿐이라거나 우리가 성숙할 수록 더욱 세련된 신의 영상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저자는 우리가 결코 신과 현실을 완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품을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려 한다. 피조물로서, 그리고 창조자가 아님으로서, 우리는 현실과 신을 붙잡을 수 있는 인식 능력에 있어 언제나 제약을 받을 것이다.
지혜의 뱀 욥이 항복하고 신을 저주한 이후 상소하는 천사는 신화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최후의 웃음을 웃게 되는 것은 우연이나 기록상의 실수일 수 없다. 욥은 완전히 고통에 빠뜨려진 후 사실상 경건함에서 돌아서서 신에게 반역했다. 고통은 그가 그의 신앙과 신에 대한 복종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신은 내기에서 졌다. 신은 실제로 사탄에게 졌다! 말이 안된다고?
아담과 이브의 신화의 뱀은, 전통적으로 악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지만, 역시 이겼다. 그 한 쌍의 남녀는 신의 계명을 내버리고 충고 받은 대로 그 과일을 먹었다. 신이 검증되지 않은 진리를 말함으로써 아담과 이브에게 거짓말을 한 반면 뱀은 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왜 신은 인간이 지식과 자유를 얻는 것을 막는 것일까? 어째서 뱀과 사탄은 싸움에서 이기고 인간을 정련 시켜 신들과 같이 되게 하는 것일까? 어쨌든 신은 어느 편에 있는 것일까?
성서의 저자들이 단지 신의 무오성과 전능함을 제시하려 했다면 신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종에게 패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이 저자들은 신의 선전원이 아니다. 그들은 신이나 정치가 또는 구원자를 광고하기 위해 저술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에 관해 쓰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려고 충격 효과를 사용해야 했을 때는 그것을 마음껏 이용했다.
우리가 유일신(God)과 이 신화들 속의 신(god)과의 불일치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저자 자신들의 의도에 반대되는 신학 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협화음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기초와 영역이 잘못되고 우리에게 이 신화들을 제공한 현자들과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뱀과 사탄이 현명하고 옳다고 밝혀졌다는 암시가 거북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신을 인식하는 그 신학적 개념들을 제공한 사람들이 신의 세계의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그들의 신학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선한 신과 악한 사탄이 세계의 통제권을 놓고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저 위의 하늘이나 물리적인 영역에서나, 혹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신들끼리의 전쟁은 없다. 이 신화들이 이런 환상적인 길 가로 벗어나 방황하는 관념은 무엇이든 이 현명한 저자들이 미묘하게라도 꾸짖었다는 암시를 무엇이든 우리에게 주었으면 좋으련만. 신들이 인간의 충성에 대한 통제를 놓고 서로 내기를 하고, 독사가 사실상 진실에 찬동하는 데 반해 선한 신은 거짓말을 하고 결국 진다는 '어처구니 없는' 개념을 가정하면서 그 작가들이 속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우리는 거의 느낄 수 있다. 뒤 돌아 보면 저자들이 설정해 놓은 풍자는 거의 우리를 우리가 속아 넘어간 최면으로부터 일깨워 현실로 되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도로변의 진동 구간처럼 그것들은 우리를 깨워 현실의 길 밖으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풍자라면, 그것들이 단지 시詩적인 구조일 뿐이라면 우리는 현실에는 사탄도, 사악한 어둠의 제왕도, 선한 신도, 그리고 아마도 아무런 신도 아예 없다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이 신화들의 저자들은 초자연적인 신은 전혀 없다고, 우리는 성서 작가들, 교부들, 그리고 아이들이 생명을 불어넣어 우리에게 전해 준 허구를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 신화들 속의 신의 심상이 전혀 일관되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몇몇 지점에서 신은 도박꾼이고, 사디스트이고, 애정 없는 폭군이다. 다른 때에 그는 자비심 많고 광적인 사랑을 보인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그는 설교적이면서 인간에게 자신을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전능하지만 한계가 있고, 행복하면서도 좌절한 신의 모습을 얻게 된다. 우리는 신의 다방면성에서 그가 거의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신이 인간의 모습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떤 사회인류학자들이 말했듯이 신은 인간성의 `대우주화'--인간의 성질을 하늘에 투사하여 우주의 힘을 공유하도록 만든 것일 뿐이라고?
아마도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신화의 저자들은 뭔가 좀 더 미묘한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신은 이것이다, 아니야 그게 아니고 이것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신은 이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잠시 말馬을 멈추어라, 신은 그 반대로도 행동하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그는 그 말을 진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게 된다. 하나의 특정한 신에 대한 묘사를 들은 뒤에 나중에 바로 그 묘사가 취소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지치고 짜증이 나서 이런 모든 어리석은 짓과 속임수 같은 짓을 끝내라고 요구하게 된다. `우리를 위해서, "누가" 신이다(인가)!?'
그리고 이 신화들 속에서 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비非이해'에 도달했을 때 저자들은 우리에게 신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저자들이 우리를 빙글 빙글 돌려(역주: 하시디즘Hasidism의 회전무回轉舞처럼) 결국 우리가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속도에 도달하면 우리는 신이 정말 누구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최종 분석에 의하면 저자도 우리도 정말로 신을 전혀 모른다. 저자들이 우리에게 꾸준히 말하려 했던 바의 신은 불가사의이며, 영원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영원히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 있다. 신이 무엇이던, 또 누구이던 우리는 모를 뿐이다.
따라서 아마도 저자들 역시 신, 선한 신, 악한 신, 하늘의 전쟁--이 모든 것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소하며 주의를 흩뜨리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 하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불가사의를 대면하고 있다는 것이다.우리는 고통의 근본적 이유를 모른다. 우리는 신의 생각을 모른다. 우리는 전체로서의 현실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모른다. 우리는 세계가 왜 그러하고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부모, 배우자, 자녀들을 완전히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모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가 누구길래 신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또는 그가 이것을 명령하고 저것은 명령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선언하는가? 우리가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