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40/757 토론자:JEANK 수신자:ALL 토론일시:95/09/15 01:06 길이:195줄
이 나라의 종교에 대한 많은 토론을 하면서 불행하게 느끼는 것은 제가 오직 기독교에 대해서만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에 대해서만 반대의 글을 쓰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별 생각이 없다고 말해야 되겠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는 저는 카톨릭에 대해서는 별로 반감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다 느낀 것인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비판이므로 그냥 교회라는 말과 개신교라는 말을 사용하여 글을 적어나가겠습니다.
참고로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제가 용어를 정확히 선택할 만큼 정교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점 앞으로 글을 올린다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개신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현실적인 행동 때문이지만 여기에 인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잘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정신에 투철하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본인은 개신교의 교리와 교조등의 전통에 의해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말이 너무 어렵죠.. 그러니까 교회를 다니면 그런 사람이 많이 생긴다는 뜻이라고나 할까요)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한 것은 어쩌면 단순한 토론이 아닐 것 같습니다.
우선 쉽게 토론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가 개신교인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즉 개신교의 참모습 혹은 본질은 어디까지인가?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 개신교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도 있으니까요?
즉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통적인 부분은 개신교를 정의하는데 불충분하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개신교의 교리를 개신교의 본질의 한부분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도 어느정도 성경을 읽어보았는데 성경이 제가 읽었을 때와 그들이 말할때의 해석이 몹시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저는 로마서를 포함해서 읽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아마 개신교신자라면 제가 왜 로마서를 말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과연 바오로의 말처럼 오직 믿음만이 구원을 준다는 것을 설파하기위해서 존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아래글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행위없는 믿음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준다] (약간은 극단적인 말이지만 일단 믿음만이 구원을 준다는 말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제가 들은 대로 적은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들의 토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점에 집중될 것으로 보입니다.)
믿음만이 구원을 준다는 말이 과연 옳은 해석인가? 하는 점이 저와의 토론의 주제입니다.
물론 믿음+행위가 구원을 준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신자가 아니지만 만약 개신교에서 믿음+행위가 구원을 준다고 말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천주교의 교리는 이점에 대해 반대가 없고 지금까지의 교리문제나 종교 문제가 오직 개신교와 관련된 부분이 지나치게 강조된 것도 이점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1. 다른 종교인은 무조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2.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3.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천당에 갈 수 없다.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이상의 3가지 입니다.
토론이 오래 지속 될 것으로 보아 좀더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가가겠습니다.
일단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개신교인들의 성경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과연 성경은 누가 썼는가? 그리고 과연 올바르게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거의 많은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각각의 복음서와 다른 서간문등은 각각 저자가 대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옳바르게 쓰여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선 제가 느낀 성경은 매우 부실하게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반인의 입장이지 종교를 가진 종교인의 입장은 아닙니다.
우선 다음과 같은 모순을 발견합니다. (이상의 글은 제가 하이텔에서 토론시 제시한 것과 같습니다.
1. 예수의 족보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불일치
족보의 불일치는 마태 복음과 누가복음 사이의 불일치 뿐만 아니라 마태 복음과 구약성경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명확한 해결방법을 잘모르겠으며 과연 개신교 신자들은 이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2. 예수의 세례당시 일어난 일들
요한은 예수를 세례를 줄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겸손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가 끝나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라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러면 그 소리를 누가 들었을 까요.
물론 거기있는 모든 사람이 들었겠지요.
그렇다면 요한은 왜 다시 제자를 파견하여 오실이가 당신이입니까?
다른사람을 기다립니까? 라고 했을까요
예수가 신의 아들인데도 더 무엇을 의심했을 까요?
아마도 이소리는 거의 들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3. 마태복음 8장의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주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금세 사람에게가서 네몸을 보이고 증명하라고 했읍니다.
사실 수많은 군중이 그를 보고 있는데 처음의 입단속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4. 마태복음 22장 임금의 혼인잔치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심하지 않나요?
하객이 오지 않아 길거리의 손님을 끌어들이고 그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쫑아내지요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더군다나 그는 앞에서는 초청받은 사람이 오지 않자 종을 보냈는데 그종이 결국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으므로
군대를 풀어서 불살라 버렸다는 예기를 교훈이랍시고 하는 것은 조금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가 직접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잘못 전해졌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5. 26장 예수님의 대답
예수에게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대답이 각 복음서간에 일치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26.64) : 네가 그렇게 말하였느니라
마가복음(14장.62) : 내가 그니라
누가복음(22.70) 너희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왜그럴까요?
아마도 아무도 그곁에 없었기 때문에 들어서 안것을 적으려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성령의 힘을 받아서 좀 물어보고 적지 왜 그렇게 적었는지 모르겠습니다.
6. 유다의 배신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유다는 배신 한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사람에게 키스한 것이 무슨 죄일까요
그는 전재산을 맡기고 들어온 신자라서 돈에 굶주리지도 않았으며
그까짓 돈은 그저 커피값이나 차비정도 뿐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증언도 심문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상도 하지요.
그런데 그가 배신자래요. (이점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일단은 말입니다.)
7. 예수님의 마지막 한마디
예수님은 죽기전 7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가상7언)
그러나 마지막 말은 무었일까요.
마가복음, 마태복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루가복음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
요한복음 (이제 다이루어졌다)
이말들은 워낙 유명해서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상 아래 있던 제자가 요한이었으니까 요한복음이 맞겠죠.
여기서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 하지 않는 사실을 짚고 넘어갑니다.
8. 무덤가의 여인들
마가복음 : (막달라마리아, 야고버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3여인. 무덤은이미 열려있고 흰옷입은 한 청년(1인)이 있었음.
요한복음 : 막달라마리아 한사람만 무덤에 감.
누가복음 : 무덤에 간 여인들, 빛나는 옷을 입은 두사람이 나타남
마태복음 : (막달라마리아, 다른 마리아) 2사람, 주의 천사가 나타남
도대체 어떤 복음이 맞을까요? 이젠 궁금하네요.
9.승천에 대한 것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만큼 중요한데 이것에 대한 서술은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 승천이 빠져있다.
마가복음 : 주예수 하늘로 들려 올라가 하느님(전 하나님이라는 단어 자체를 싫어해요)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누가복음 : 예수는 그들을 떠나 하늘로 들리어 올라갔다.
요한복음 : 승천에 대한 부분이 없다. 바로 가장 나중에 쓰여졌고 가장 이론적이라는 그 요한복음에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마가복음의 서술입니다.
즉 예수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았다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분명히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봤다면 그는 구약이래로 신을 본 최초의 사람일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내용에 혹시 있나요)
그리고 제자들이 같이 베다니 근처로 데리고 갔기 때문에 참석한 제자들 모두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막연히 아버지라고만 하던 하느님을 본것을 이렇게 기록 할 수 있을 까요?
이것은 그가 보지 않고 느낌이나 종교적인 표현을 한 것입니다.
즉 성경은 글자그대로 믿어서는 않되고 바로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객관적으로는 부실하게 쓰여진 글입니다.
즉 언뜻봐서는 서로 상당한 부분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또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원전에는, 어디 원전에는 하지만 원전이 존재합니까?
원전의 정확한 의미가 무었일까요.
마태복음이 먼저일까요 마가복음이 먼저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그유명한 그리스말로 강론하셨을까요? 아니면 다른 나라 말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말인 것으로 알지만)
성경이 이렇게 부실한데 과연 그안에 들어 있는 내용 특히 잘못쓰여졌는지 아닌 지 전혀 알 수 없는 교리적인 것은 과연 완벽하게 보전되었을까요?
그렇게 믿는 다는 것이 바보스럽지요.
제 생각에는 성경은 할 수 없이 해석을 요구하는 글입니다.
저는 단지 성경의 구절 구절이 모순을 일으키는 부분은 앞의 글에서 모순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칼을 주러 왔다와 서로 사랑하라의 언듯 모순으로 보이는 구절등)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해석상의 문제일 뿐이니까요.
제가 성경의 불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은 무오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화를 받았건 아니건 개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초기에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성탄절이 12월 25일 입니까?
우리는 성경을 좀더 정확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제 주장을 하겠습니다.
1. 성경은 무오하지 않고 잘못 쓰여진 부분이 많다.
2.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자 그대로 믿어서는 않되고 해석을 해야 한다.
이상의 글로 우선 마치고 나중에 다시 과연 믿음만이 구원을 주는가에 대해서 토론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