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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2000년 11월 나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개신교는 지금까지 나의 인생, 30여 년 동안의 종교의 전부이었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2대째 교인이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내 나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여 후에 신학교를 설립하신 분이다. 내가 개종을 결심하기까지에는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다. 부모 형제에게 미안한 마음은 물론 내 주위의 개신교를 믿는 많은 소중한 이들에게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양 관행에 젖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신앙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또 그로 인한 갈등을 계속 겪으면서 그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는 것 또한 이 못지않은 고통이기에 개신교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 개신교는 교리적으로는 믿음과 자신의 구원문제에만 초점이 모아져 있는 듯하다. 믿음과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면죄부와 천국의 입장권을 파는 데만 열중했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명을 통해, 예수님이 강조하신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 대한 배려(사랑)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또한 교회는 전도라는 명분으로 오직 교세확장에만 몰두하고 있다. 전도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되다 보니 복음의 정신은 이미 실종된 상태이다. 그들의 교리와 교회는 하나님과 같이 완벽하기에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자만과 자신들만이 절대자에게 선택받은 종교이고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의인이라는 자가당착과 편협, 오직 예수의 이름만 부르짖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천당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맹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개신교에서 지금이라도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의 순수한 기운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신학이나 교리가 옳건 틀리든 하는 문제를 접어두고라도 신학이든, 교리든, 교회든, 목사든, 제도든, 무엇이든지 현실 기성교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실질적으로 평신도의 신앙생활에, 교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왜곡된 믿음이나 신앙생활을 세상에 합리화하고 유도한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흔히 경험하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특정 교회나 목사를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1. 믿음 이는 내가 들은 이야기다. [L씨는 내가 전에 근무했던 회사의 상사이었다. L씨는 기독교 재단인 연세대를 졸업하였으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라는 말을 꺼내는 것도 싫어한다. 그렇다고 특히 다른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왜 교회라는 말을 싫어하느냐고 물으면 자기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위선이 아주 싫다는 것이다. 자기의 친구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너는 남들과 똑같이 못된 짓을 다 하면서 어떻게 교회는 다니느냐"고 물으면 그 친구는 "나는 늘 교회에 가서 용서를 받으니 그 죄가 쌓이지 않지만. 너는 그 죄가 더 쌓인다"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이 되는 얘기냐는 것이다. ] 문민정부 시절에 비리로 구속된 많은 고위공직자와 장성의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얼마 전 떠들썩했던 고급 옷 로비 의혹사건에 연루된 여인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스스로 내세우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같은 이중적 경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서 못된 짓을 하라고 가르칠 리 만무하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우다보니 현실적으로 자신의 행실과 구원은 별개의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일부 개신교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대비시켜 상대적으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행위는 부수적인 개념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믿음과 행위를 독립된 개념으로 취급하며 상대적으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믿음과 행위의 일체성을 간과하고 있다. 내가 다녔던 많은 교회에서도 성서공부에서 한결같이 믿음에 대해 가르치기를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며,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표현도 중요한 것이라는 점에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이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이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예수가 직접 예기했다는 복음서나 고린도 전서에도 잘 나와 있다. 자신이 거듭났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개신교 교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을 의심하거나 비방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이것이 그들의 중요한 신앙체험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이 같은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온 교회가 다 알도록 소문을 내며 다니는 거듭난 사람이 실상 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술을 안 먹는 정도, 또 목사님 부부를 자주 대접하는 정도가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이다. 오히려 전에는 인간적으로 건방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신앙적으로도 교만해졌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나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듭나는 것도 이렇게 중계방송을 해야하는 것인지,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신앙적으로 교만해 질 수 있는지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런 것이 과연 바람직한 신앙인지 의문스럽다. '믿쑵니다!' 외치며 눈물을 흘리고는 자신이 참회했다고 믿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내적으로부터의 참회라기보다는 대단히 수동적이고 강압적인, 혹은 의도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마치 태어난 대로의 얼굴을 거부하고 메스와 실리콘으로 자신의 얼굴을 조각하듯, 외부로부터 마음을 억지스럽게도 조각해 나가는 듯이 보인다. 그들의 말대로 회개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면 세상은 지금 같지 않을 것이다. 회개를 하되,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옆 사람을 시샘한다면 그 참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거리에서, 혹은 지하철에서, 혹은 바로 우리집의 대문으로 붙들려 나와 "자매님, 형제님 회개 하십시오" 라는 주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온듯하고, 그 성스러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도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은 신자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음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1647년 기독교사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미 구원될 인간을 정하셨기 때문에, 인간 자의에 따른 믿음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한다. 스스로 교회에 나가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성경책을 읽고, 심지어 마음으로 우러나는 참회를 하여도 하나님은 굽어봐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우주 창조의 복안(Grand Design)에 따라, '하나님에 영광을 더하기 위하여(in majorem gloriam Dei)' 그 도구로서 인간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있는 성경해석이 당시 유럽 기독교 사회에 미친 영향이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근세 유럽사회는 '한없는 고립감(Sense of Isolation)'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성경해석이 아직도 유효한 것이라면(이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모순이던가. 종교만큼 세상과 영합하고, 그 태도를 표리부동해온 것이 또 있으랴. 절대의 종교가 정세에 따라 목소리를 바꾸고, 인간의 판단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나님의 뜻을 짐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우리가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만나는 전도자들은 대단히 주제넘은 사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넘겨짚는 대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친구아내의 어머님이 남묘효렌교를 믿다 돌아 가셨는데 물론 그 친구는 개신교신자이다. 장례식 때 개신교 목사가 “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셨기에 필시 지옥에 가셨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회개라는 것 역시 인간적인 것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행실은 제쳐놓고 지나치게 믿음만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믿음의 구두 표현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고 마는 것이다. 나는 신앙이란 전 인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으로만 시인하고 행실은 그와 동떨어진 것은 신앙이 아니다. 개신교인이라면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가장 경계하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카톨릭과는 달리 예수가 직접 말했다는 복음서보다는 사도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쓴 로마서의 말씀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복음서의 비중이 전서 혹은 후서의 비중보다는 높다고 생각한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직접 적은 기록임에 반해 전서나 후서는 그의 제자들이 전도과정에서 각 교회에 보낸 서신형식의 글이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정수된 것으로 평가받는 요한복음 제14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12절).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말을 지키라(15절). > 나는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각 교회에 보낸 서신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적었다는 복음서의 구절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믿음, 참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그대로 행하고 그리스도의 말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린 믿음에 대한 정의이기 때문에...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의 대속(대신 속죄함)을 믿으며 그가 창조주인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다. 이런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의해서도 그 타당성이 증명되는데 마태복음 제7장 구절을 보면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21절). 내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든든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24절).> 여기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구원과 동일한 의미임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자신을 주님(=창조주)이라 부른다 해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라 부르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듣고 실행하는 일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라는 앞서 인용한 요한복음의 말씀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박애정신으로 귀착된다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제5장 44, 45절은 이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만 사랑을 논한 것이 아니고 실천으로 이를 보여 주었다. 누가복음 제23장 34절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려는 총독 빌라도 등을 위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때의 사랑이란 형제들간의 즉 크리스찬간만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47절의 말씀으로도 명확해 진다.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비유대인 혹은 비기독교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랑이란 성경에서 간혹 등장하는 선행 혹은 율법의 준수라는 개념보다는 휠씬 차원이 높고 폭넓은 것으로 이해된다. 믿음을 강조한 로마서에서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사랑은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는다. 사랑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채우는 것이다. 사랑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율법이다.>라고 하여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 말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나 비록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라고 하면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이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라고 하여 사랑의 중요성을 오히려 믿음보다도 우선하는 가치로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인간간의 신뢰감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여기서의 믿음은 곧 종교적인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요한일서에서는 <만일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지옥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겨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제3장 13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4장 21절)>라고 해서 사랑 그 자체가 곧 구원이라고까지 가르치고 있다. 한 마디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할 때에도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 그리고 그분의 대속을 믿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대로 그리고 말씀한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100% 완전하게 행한 대로> 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씀과 행동을 따르려는 강하고 진실된 의지가 있어야 함과 동시에 가능한 한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실행을 해야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구원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의 말씀이 이러함을 볼 때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 없이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 이라고.... 그러므로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주님의 뜻으로 믿고 둘째, 그리스도가 행한 대로 행한 자 즉 사랑을 베푸는 자만이 천국(하늘나라)으로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성경을 들고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행한 대로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개신교인)으로서의 책무가 그들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날까?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 일에 많은 희생이 따름과 동시에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한 사랑이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구원을 원하는 크리스챤들이 다른 사람들(종교적 이방인 곧 비기독교인들)과는 다른 생활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지도자들과 크리스챤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편리한 구원의 방법(그 방법은 전반부에 서술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을 설정해놓고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대부분이 또 그렇게 믿고 있다. 너무도 쉽게 구원을 받으려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로마서의 말씀만 중시할 뿐 복음서나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이상할 정도로 도외시하고 있다. 즉 개신교는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서신(로마서...)을 믿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개신교에서 행위와 대비하여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점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하면 행위 없이 믿음이 완성될 수 있는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교회에서 의도적으로 잘못된 신앙을 가르칠 리는 없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결과적으로라도 예수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교회의 가르침이 신도들의 신앙에 미치는 결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바른 믿음이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 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 배타적 교리 내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교회를 다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이 열 여섯에 어느 날 전철을 타고 가는데 한 전도하는 사람이 주 예수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설교 하다 한 스님을 힐끗 쳐다보더니 "여러분 중에는 사탄도 있습니다." 나는 충격과 실망에 교회에 가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하자 열에 일곱, 여덟은 "그거 사탄 맞네!" 더 이상 이런 교회를 다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나는 부모님 몰래 교회를 옮겼다. 부모님께서는 믿음을 가질려면 교회를 옮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비방일색이었다. 그 교회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어떤 중이 얼음 위를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얼음이 깨지고 물속으로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되자 "아이고 하나님" 이라고 했다고 하니까 설교를 듣던 모든 사람들이 악마처럼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런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도 더 올바르고 훌륭한 일을 해서 그들을 능가해야 하고 그럼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면서 입을 모아 아멘을 외치는 그들의 편협과 이기심에 몸서리치면서 갖고 있던 성경책을 설교하고 있는 목사에게 던져버리고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그 때는 매우 통쾌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나 또한 그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방송에 나간 일이다. 어떤 노방전도자가 식품점 앞에서 전도용 전단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나는 불교도입니다" 하면서 전단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전단을 나누어주던 사람이 말하기를 "할머니는 불교 믿고 지옥에 가시더라도 자녀분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전단을 거듭 주더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실상 타종교인에게 모욕감을 주고 트집을 잡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노방전도를 한다고 나선 사람이면 신앙심이 깊고 매우 적극적인 교인임에 틀림없다. 이런 분들이 이렇게 말하게 되는 데에는 사실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에 그 책임이 있다. 개신교에서는 개신교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가르치니 이와 같은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수년 전에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이던 변선환목사는 기독교 이외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가 소위 종교재판을 받고 출교되었다. 이것이 교단의 지도자들에게는 옳은 일인지 어떤지 나는 모르겠으나 이 같은 자세가 평신도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문제이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나쁠 것이야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른 종교에 대해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하고 또 이를 강요한다면 결코 옳은 일이라 할 수 없다. 많은 개신교목사들은 종교적으로는 매우 배타적이어서 항상 기독교 이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어떤 교인이 성서공부에서 질문하기를 그럼 예수를 믿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은 모두 지옥에 갔느냐고 묻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유치한 얘기지만 개신교 목사 치고 이 같은 질문을 한두 번 받아보지 않은 분이 없을 것 같다. 내가 대학 때 성경개론을 강의한 교목사(신학박사)는 이 같은 질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이니 우리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른다고 말해야 옳지, 모른다면서도 계속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은 잘못 아닌가? 만약 하나님이 이같이 편협하시다면 나는 하나님 믿기를 포기하겠다. 개신교의 이 배타적 교리는 소위 예수께서 말씀하신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를 해석하는 데도 그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할 줄 안다. 여기서 ‘나’ 는 예수가 아닌 우리들 자신을 일컫는 내용일 수도 있는 것이고 성서가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면서 뜻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을 가능성이 위전이나 외전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고 많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후대에 덧붙여 지거나 변개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 사실이다. 예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던 그 시대에는 그들이 알던 세계가 미신과 다신교 등 여러 가지 종교로 만연했던 시대였으며, 예수는 그 와중에서 사실상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입장이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섣부른 신학이론을 전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2000년 전 당시와 지구촌이 되어버린 현대와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하기야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지옥 갈(개신교에서는 카톨릭처럼 연옥이 없으니 천국에 못 가면 지옥뿐이다. 이슬람에서도 그러하니까....) 충분조건이라면 문제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굳이 우리 조상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기독교인이었는가? 만약 기독교 이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면 모세는 기독교인이거나 아니면 구원받지 못했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개신교의 역사관으로 기독교의 정신은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으니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기독교인은 아니었던 것이고 예수가 오기 전에 원죄가 대속될 수 없었다면 구원받지 못했음은 분명한 일이다. 기독교신학에서는 이에 대해 예수가 오시기 이전에는 제물의 피로서 원죄를 대속 받았으며 구약에서 이미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려 보낼 것을 암시했다면서 성경구절들을 짜 맞추어 놓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궁색한 변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아는 구원을 받았을까? 성경에는 대 홍수 이후의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 아닌 노아와 그 세 아들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노아와 그 세 아들이 원죄를 대속받은 상태에서 자손을 퍼트렸다면 인간의 원죄는 이미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이고(성악설이 아닌 성선설이 정설이 되고 이는 이슬람신학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노아가 원죄를 대속받지 못했다면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 역시 지옥에 갔을 것이 분명한 것이며 예수 역시 그의 자손이니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신구약을 통해 동일한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비록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유태교의 하나님은 분명 같은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으나 유태교인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어도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독생자)이고 죽은 지 3일 만에 살아나 승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모두 구원받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슬람에서도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그들의 신조(깔리마)에서도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며 무하마드(마호멧)은 그의 사도니라” 고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의 관점으로 볼 때는 위의 문제가 쉽게 해결이 된다. 이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종교이며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창시자인 무하마드 역시 구약, 신약에서 나오는 많은 선지자들 중 하나이며 기독교처럼 예수나 마리아에게 기도하듯이 그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간주하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원받는 길이 이슬람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유대교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무하마드 언행록에서는 무슬림(이슬람인)은 무슬림과 결흔해야 하나 그 중에 여의치 않는다면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도 가능하다고 말해 놓았다. 그리고 이슬람이나 기독교를 몰랐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섭리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신 진리들, 악에 물들지 말며 이웃과 가족과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길로 가야하는 것 등을 알고 실천에 옳긴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안 들었지 사실상 하나님을 알고 경외했다는 걸로 해석되며 그렇게 본다면 공자나 맹자, 석가, 퇴계 이황, 세종대왕, 이순신 같은 사람들도 구원을 받았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내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유일신적 이고 다소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포용성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지구상 16억 7천만 에 가까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택하며 증가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나 생각된다. 이슬람에서도 예수가 나오는데 독생자가 아닌 한 시대의 하나님의 사도로서 나오고 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친 사랑의 정신도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규정하고 실천사항으로 삼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도는 모두 동등한 위치로 놓고 본다. 모세를 통하여 토라(모세5경)를 내려 주셨으며 아브라함을 통해 구약을, 다윗을 통해 자부르(시편)을, 예수를 통해 인젤(신약)을 마지막으로 무하마드를 통해 꾸란(코란)을 내려주셨다는...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내용이 안 나오고 위의 유태교의 관점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되는데 문제는 그들의 관점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만 할 뿐이지 정작 그들 자신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면서 자신과 남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태엽감은 인형처럼.... 그에 비하면 이슬람은 타종교에서 주장하는 내용 중에 자신들의 교리나 진리가 부합되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 수용하며 역사적으로 그렇게 해 왔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는 < 나는 꾸란(코란)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이 세상의 모든 경전(크고작은 경전이든...)을 믿는다고 했다 > 그래서 내가 모스크(마스지드 즉 예배보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간혹 기독교성경을 보거나 무슬림들에게 성경내용을 이야기해도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수용하고 반대로 많이 가르쳐 달라는 태도를 취한다. 단 그들의 진리와 부합되는 부분에서는..... 물론 나는 아직도 그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많고 지금으로서는 이슬람에 대해 대답을 못하는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성서의 특정 문구를 근거로 해서 이렇게 다른 종파나 종교의 진실성을 함부로 판정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역사는 이 같은 독선적 신앙이 잘못이었음을 여러 가지로 증명해주고 있다. 원천적으로 예수 자신이 이 같은 독선적 신앙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이같이 과거에는 기독교인으로서, 현재에는 무슬림(이슬람인)으로서 어찌 보면 쓸데없는 말을 길게 논한 것은 현재 우리는 과거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 각양각색의 인종이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섞여 살고 있는 지구촌을 이루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인도의 경우는 이슬람교와 힌두교가,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기독교(개신교)와 불교가 양립하는 상태이다. 서울에서는 사찰의 불상에 밤새 붉은 십자가가 그려지는 사건이 많다는 신문의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같이 각자가 자신의 종교를 중심으로 배타적인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여기서 형제는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다)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가르치고 계신다. 이웃과 화해 할 줄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명쾌히 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이 말씀은 기독교인끼리만 해당되고 이교도에게는 교회에 모여 송사를 준비해도 좋다는 얘기가 결코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언필칭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웃을 배척하고 단죄한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가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기독교의 입장으로는...) 가르치신 그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이다. 또,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슬람에서도 예수의 그러한 가르침을 실천덕목 중 하나로 규정하고 있고 무하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 에서도 그 구체적인 내용이 잘 나타나고 있다(종교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본개념으로 하고 있다.) 3. 평신도의 신앙생활과 규범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이란 천국 가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 많은 목회자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의 목표가 천국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목회자들이 천국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의 나의 삶과 관계가 없다면 신앙생활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이승에서의 삶에 있어서 가치관이나 지표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란 마땅히 신도가 현실생활에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등 가져야 할 가치관과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카톨릭에서 생명의 존엄성이란 가치관을 가지고 낙태를 엄금하는 것은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개신교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규범을 제시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개신교에서 교인에게 "해야 할 일"로 요구하는 것은 "믿음 생활"이고, "해서는 안 될 일"로 요구하는 것은 술, 담배, 제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술, 담배, 제사 등에 대한 목회자들의 태도는 매우 모호하고 이중적이다.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하고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사석이나 속회 같은 작은 모임에서는 "술 좀 하는 거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고, 같은 목회자가 강단에 서면 타락한 사람의 생활로 술과 담배를 지적하곤 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태도가 이렇게 모호하니 교인들의 태도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술, 담배는 교회에서 금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먹지 않는 개신교인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개신교가 말하는 이런 규범 몇 가지를 가지고 생각해 본다. 1) 믿음 생활 교회가 평신도들에게 요구하는 규범이란 "믿음 생활"이다. 그런데 믿음생활의 실천규범으로 구체적으로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교회 봉사와 헌금에만 집중되어 있다. 집안 일을 제쳐놓다 시피하고 교회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신앙이 매우 좋은 성도라고 목회자들이 칭찬하는 것을 나는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하나님의 사업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논리로.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목회자의 사모도 그렇게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지는 않는다. 속세에 사는 우리 평신도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교회 봉사에만 전념하는 것이 과연 건전한 믿음 생활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오히려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나아가 이웃에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자 평신도의 덕목이라고 나는 믿고 참고로 이슬람의 경우에는 교리와 가족의 의무중에 어느것이 먼저냐고 하면 후자쪽이라고 한다. 한 가지 예로 율법에 따라 지하드(聖戰)를 행하기 위해 전장에 나갈 때 부모님이 반대하면 그 자녀는 그 책무를 다 하지 않아도 된다. B목사는 개신교가 제시하는 규범으로 "성화"가 있지 않느냐고 내게 반문했다. 나는 작년 B목사가 시작한 "제자화 성서공부"를 통해 "성화"라는 개념을 배웠다. 나는 신학적으로 성화가 어떻게 설명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이 제자화 성서공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화의 개념이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거룩하게 성별된 삶"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지지 말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 요컨대 비신자와는 사회생활을 하지말고, 부정한 것은 만지지도 상대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대로라면 필연적으로 속세와 단절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생활은 수도승이나 아미쉬(Amish)의 생활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아미쉬 마을의 경우 21세기를 바라보는 현대에 TV조차 보지 않고 오직 신앙에만 정진하는 그들의 삶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생활이란 신앙생활을 위해 속세의 욕심을 뛰어넘은 고결한 생활이다. 그러나 이 같은 종류의 성화의 개념을 우리같이 속세에 사는 평신도들에게 규범으로 제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 이 같은 생활은 우리 같은 평신도는 고사하고 목회자들도 지키지 못하는 기준인 것이다. 목회자들이 이러한 성화의 기준을 지키고자 한다면 자신과 그 가족부터 세속에서 분리시켜야 할 것이다. 왜 자신도 지키지 않는 기준을 평신도에게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제시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성별된 삶이 고결하다고 해서 속세에 사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일반인 즉 평신도 역시 모두 나름대로의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속세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업, 예술, 학문, 정치 등 어떤 가치건 이 사회와 어우러져 사회의 한 부분을 형성하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와 역할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것은 이것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 것이다. 나아가서 기성교단은 평신도가 속세에 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신도란 속세에 살기 때문에 바로 평신도인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속세를 떠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한 가운데 살면서 이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평신도의 삶이요, 신앙이요, 복음인 것이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예수께서 우리의 이웃이라고 가르치시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요즈음의 말로 바꾸면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교도, 비신자 혹은 죄인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사마리아인이, 즉 이교도가 우리의 이웃이며, 이들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 나는 내가 이교도라고 생각했던 무슬림(이슬람인) 들과 화합하기 위해 그들의 신앙과 관습에 따르고 있고 오히려 그곳에서 주님의 진리를 더욱 발견해 나가면서 성장하고 있는 나 자신을 확인하고 있다. 그들도 자신들의 진리가 통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존중해 준다. 고로 나의 관점으로는 기독교인들보다는 무슬림(이슬람인)들이 오히려 하나님, 예수님의 성경말씀에 가깝게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본다. 만약 우리가 속세에 살면서 성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비신자와 물리적으로 구분 짓고, 이런 것으로 우리를 성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바리새인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예수께서 오시고, 사시고, 또 죽음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신 곳이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 속의 인간들과 함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함께하고 가난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에 나눠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기독교인만이 모여 자신의 구원에만 몰두하는 곳은 수도원이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성화의 개념은 감리교나 장로교와 같은 기성교단에는 적절치 않는 개념이라고 본다. 2) 제사 제사에 대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퍼온글] [1998년 2월에 아버님의 상을 당하여 서울에 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우리나라의 통상의 장례절차란 고인의 빈소를 설치하고 문상을 받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문상 방법은 이 문상 기간에 고인의 빈소를 개별적으로 찾아뵈옵고 인사(절)를 하고 또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아버님이 장로님이셨고 또 평생을 교인으로 사셨으니 문상객 중 상당히 많은 분이 개신교인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의 문상이란 것이 매우 복잡하다. 어떤 사람은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빈소 앞에서 묵념이나 목례를 올리고, 어떤 사람은 꿇어앉아 기도를 하는 등 가지각색이었다. 더욱이 거북한 것은 상당수의 문상객(아마도 목사나 전도사등 교역자들이 아니겠나 생각된다)이 빈소 앞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간단한 예배를 보는 것이다. 예배를 봐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뒤에는 많은 문상객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기도와 찬송 등으로 오랜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매우 민망한 일이었다.] 교회에서는 제사를 금하고 있다. 특히 절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으로 이는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살아 계신 부모에게 절하는 것은 괜찮으나 돌아가신 시신이나 영정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제사가 왜 우상숭배인지 나는 동감할 수 없다. 우리가 절하는 것은 비록 부모가 살아 계실 때라도 그 부모의 물질적 육체에 절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그 인격체에 절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돌아가신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이나 영정 그 자체에 절하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신 부모의 인격체에 대한 예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만약 돌아가신 분은 인격체가 아니라면 기독교가 부활을 믿는 종교라고 할 수 있는가? 육신의 죽음은 형식적일 뿐 영혼의 불멸을 믿는 것이 기독교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돌아가신 분은 마치 돌이나 나무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개신교에서도 시신이나 영정 앞에서 예배는 본다. 시신이나 영정을 모시고 예배를 보는 것은 시신이나 영정이 살아 있는 생명체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부모를 모시고 예배를 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 시신이나 영정을 모시고 예배를 보는 것은 괜찮고 절하는 것은 안 된다는 논리를 나는 납득할 수 없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제사를 지내는 분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그러나 이 분들은 마치 죄인처럼 숨어서 제사를 지낸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제사를 금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에 동감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제사문제로 인해 많은 순교자까지 냈던 카톨릭이 오히려 오랜 검토 끝에 제사를 받아들인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제사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전통문화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제사를 금하는 것이 단순히 제사의 중단으로만 결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마치 술, 담배 정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만약 제사가 교리적으로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제사를 금하는 대신 그에 대응하는 규범을 제시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제례나 상례에 관한 한 개신교는 반대만 했지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예배를 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아버님의 장례에서 본 혼선은 그 모든 기독교인들이 모두 교육을 잘못 받아 그런 것인가? 또 만약 그들이 모두 교육을 잘못 받았다면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4. 목사의 의식구조 목사란 매우 어려운 직업이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니 우리는 이들을 존경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니 목사에게는 일반인의 윤리적 기준보다 차원이 높은 윤리적 기준이 더 요구된다는 점은, 일반인은 물론 목사 자신도 모두 이의가 없을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목사에 대한 존경은 목사 스스로가 약속한 십자가의 길을 오롯이 걸을 때 합당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이 과연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지, 교인들에게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서 자신은 교인들이 진 십자가에 걸터앉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목사는 교회의 지도자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어떻게 목회를 하는가에 따라 평신도의 신앙생활은 물론 교회의 진실성마저도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의 의식구조를 몇 가지 면에서 검토해 본다. 1). 목사의 직업윤리 [퍼온글] [ S교회의 담임목사였던 A목사는 80년대 초에 C장로에게서 $100,000를 무이자로 빌어 집을 샀다. 그 집의 은행 융자금은 주택수당으로 교회가 지급했다. 곧 그 집이 A목사의 재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일에 죄의식을 갖는 목사는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 오히려 목사에 대한 이와 같은 "대접"은 일반적으로 목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종에 대한 극진한 대접"으로 칭찬받을 사례로 불리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약 학교 교사가 학부형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어 집을 사거나 투자를 한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수년 전 자민련의 이건개 의원은 정덕진 씨에게서 무이자로 수억을 빌어 쓴 것이 뇌물로 인정되어 실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사실이 있다. 공직자에게는 뇌물이 될 수 있는 일이, 즉 일반인들에게 지탄받을 일이 어떻게 목사에게는 극히 칭찬받을 일이 되는지 아무리 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목사들의 윤리의식을 잘 드러내 주는 예가 있다. 문민정부가 집권한 지 얼마 후에 신문에 난 일이다. 개신교 목사들이 모여 소득세를 내는 것이 옳은지 안 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세금을 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법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한다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의 목사들이 대부분 갑근세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일부 양심있는 목회자들에 의해 이런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얼마 후에 다시 비슷한 일로 가톨릭 사제들의 회의가 있었고 여기서는 이론없이 세금을 낼 것을 결의했다는 기사가 났었다. 또 다시 얼마 후 비슷한 일에 대해 기자들이 조계종 총무원에 문의를 한 바 불교 측의 대답은 승려란 소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승려에게는 재산도 없고 소득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금 낼 일이 있겠는가 하는 대답이었다. 불교에 일부 돈 많은 주지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교단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총무원의 답변은 그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그러나 목사의 경우는 다르다. 신문에 난 것을 보면 그날 목사들은 갑론을박 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세금을 안 내도 된다는 측의 주장은 교회의 돈은 하나님의 것인데 왜 세속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논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설령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여 헌금이 하나님의 돈이라고 해도 그것이 한국은행의 발행권이고, 또 그들이 아무리 성직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에 주소를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아무리 목사들의 양심상 세금을 안 내는 것이 정당하다 해도 일단 실정법에 대한 의무로라도 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라 하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같이 갑론을박 하다 만 것은 왜일까? 솔직히 말해 지금껏 안 내던 세금을 이제 와서 내자니 돈이 아까웠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목사들의 경우, 실제로 일반 직장의 봉급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봉급을 받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현재 성직자라고 하는 우리나라 목사님들의 윤리의식의 현주소다. 우리 주위에 목사의 자제로서 유학을 간 사람들을 많이 본다. 목사의 자제라고 유학하지 말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70년대, 혹은 80년대 초까지 유학을 시도해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듯이 당시 유학이란 것이 어지간한 경제력을 가지더라도 어려운 일이라 일반인은 도무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의 봉급으로 유학을 시킬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한다면 잘못된 일인가? 우리는 공직자들이 많은 재산이 있을 경우, 그들이 어떻게 박봉이라는 공무원 월급으로 그와 같은 재산을 모았는가 하고 의심의 눈으로 보게 마련이다. [ 지방에서 감독까지 하셨다는 K목사님은 아들이 이곳 북가주에서 사업을 하기 때문에 자주 오신다. 이분은 아들을 유학시켰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의 사업자금을 대 주셨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하신 적이 있는데 설교에서 자기 아들의 사업자금을 충분히 대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는 목회자에 대해 더 좋은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분은 그렇기 때문에 실일조는 최소의 의무이고 그 이상 소득의 20%, 혹은 30% 정도는 헌금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 이분은 골프도 보기 플레이 이상의 수준이다. 아들을 유학시키고, 미국에서 사업을 하도록 아들에게 자금까지 대 주고, 또 한국에서는 아직도 상류층의 운동인 골프를 즐기기 위해 평신도로부터 소득의 20-30%를 헌금으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면 좀 지나친 일이 아닌가? ] 2) 목사의 교만 [ 1996년 A목사는 예배시간에 광고하기를 "담임목사가 매우 바빠 교인을 일일이 심방할 수 없으니 목사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교회 입구에 비치한 목사 면담신청서를 기록하여 면담을 신청해 달라"고 강조했다. A목사는 같은 광고를 그 다음 주, 또 그 다음 주에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교회는 교인이 약 300명 정도였다. 300명 정도의 신도를 가진 교회의 목사는 면담신청서를 작성하여 면담을 요청해야 할 만큼 바쁘고 대단한 분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중략) ] 내 중학교 때의 동창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오지에서 전도사로서 목회활동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이야기 하는 도중 내게 하는 말이 어떤 미국영화(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브루스 윌리스가 나오는 영화로 어떤 아이가 갑자기 자신의 위에 서서 명령을 내리게 되는 상황...) 를 예를 들며 지금은 너와 내가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이 내게 명령을 내리는 경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느끼는 교회에 대해, 내가 만난 많은 사람에 대해, 타종교에 관해 이야기했고 함께 이야기하고자했으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너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는 나의 마음에 믿음이나 신앙이라고 보이는 최소한의 건덕지도 없다, 믿음을 더 키운 다음에 나를 찾아오라는 이야기만 했고 자신은 다만 나에게 걸어가는 방향을 제시해 줄 뿐 이라면서 교회나 목사들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자 너는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상당히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세상사람 들에게 배운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고 명령을 내린다는 생각, 자신이 학교에서 몇 년 동안 공부한 성경과 신학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그 외의 것은 무가치하게 단정 짓고 있는, 내가 가진 주장이나 생각이 틀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면서 머리로만 아는 교리, 마음으로 전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앙.. 과연 그 친구가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삶은 어느 쪽이었으며 그가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 있는 것이 어느 쪽일까 하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마음이 착잡해 져갔다. 위의 경우만이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목사들은 자신이 교인들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자처하며 상당히 교만한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은 자신이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신도는 목사들의 교육이나 지적 수준이 높아서 목사를 존중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는 자신보다 조금은 더 예수를 닮은 모습을 목사에게서 기대하는 것이다. 목사들은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존경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겸손을 몸소 실천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이 남보다 겸손하지는 못할망정 교만하다면 이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처사가 되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겸손은 미덕일지 모르나 목사에게 겸손은 사명이다. 목사의 교만은 우리 평신도에게 실망을 넘어 신앙 그 자체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목사 같은 성직이 아닌 초등학교 교사라도 제자들의 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실족케 하려거든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까지 강경히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목사는 교만하게 처신하느니 차라리 목회를 그만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3) 목사들의 세자랑, 줄서기 [퍼온글] [ 1994년으로 기억한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근처에 있는 한 호텔에서 한국의 모교단의 선교대회가 열렸던 적이 있다. A목사는 수 개월 전부터 이 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인들에게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목사가 워낙 중요하게 강조하고 참여를 독려하므로 성가대원은 몇 달 전부터 연습하고, 일부 교직자는 아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이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하루 시간을 내어 여기에 참석했었다. 목사님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한 번쯤 참석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생각해서였다. 대회 내용은 한국의 그 교단에서 세계에 파견된 많은 선교사들과 또 그 교단의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선교사들의 여러 가지 사례나 문제점 등을 발표하고 또 지원을 다짐하는 대회로 일종의 워크샵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 남미의 오지 등으로부터 온 많은 선교사들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교회의 목사들과 교회의 대표들도 많은 교직자와 성도들을 대동하고 대규모로 참석했다. 아무튼 목요일 저녁 이 대회에 참석했던 나는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회는 그 호텔 일층에 있는 연회실 여러 개를 터서 족히 일천여 명 이상이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연회장에서 일 주일 동안 진행되는 것이었다. 한국의 재벌그룹에 간부로서 여러 해 근무했던 나는 회사의 경영관계로 간부직원을 교육하거나 경영지침을 준비하는 대회에 여러 번 참석했던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의 규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관계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같은 대회의 경우 수십만 달러가 소요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대회를 보는 나의 마음은 착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성격의 대회라면 선교 추진의 본거지인 한국에서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 소규모로도 효과적인 대회를 얼마든지 치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 있는 교단이 그들의 대회를 굳이 이곳 미국에 와서 해야 하는가, 또 왜 그 같이 대규모로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대회는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의 세자랑, 돈자랑이었다. 한국의 목사님은 모두 성도들이 정성껏 바치는 헌금으로 부부가 여행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교회의 헌금이 하나님의 돈이라 소득세도 낼 수 없다는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돈을 이렇게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가? 또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곳 미국 현지의 목사들의 태도였다. 엄격히 말하면 한국의 교단과 미국의 교단은 같은 교파라도 별개의 교단이며, 직접적 관계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곳의 여러 목사님들은 헌신적으로 이 대회를 도와주고 특히 A목사 같은 분은 거의 온 교회를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협조를 한 것이다. 돕고, 협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이곳 미국의 이민생활이란 대부분 부부가 맞벌이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 많은 교포가 소규모 소매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시간을 낸다는 일이 쉽지 않다. 왜 생업에 바쁜 교포들을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이같이 많은 사람을 참석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 미국의 한인 목사들은 이 "능력 있는" 한국의 목사님들과 교분을 두터이 할 좋을 기회이니 교인들을 동원하여 그들 앞에서 능력발휘를 하는, 말하자면 일종의 줄서기인 것이다. 물론 목사도 직업이니 더러 줄서기가 필요할 수 있겠다고 인간적으로 이해해 주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은 개인적으로 할 일이지 왜 무고한 교인들을 동원하여 들러리를 세우는가? 4) 목사들의 사회적 지위 [ A목사는 96년 서울에 전통 있는 S교회이 담임목사로 "영전"했다. 그 후 A목사의 부인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는 목사에 대한 대우는 미국보다 나은 것 같으나 목사의 사회적 지위는 미국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한다. A목사의 의식구조가 충분히 짐작가는 대목이다 .] 목사들 중에 설교를 통해 정치인을 한두 번 비난한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감리교나 장로교나 할 것 없이 개신교의 선거를 보면 세속의 국회의원 선거보다 더한 것 같다. 몇 년 전 서울에서는 교단장의 자리를 놓고 형제 목사가 혈전을 벌인 적이 있다. 이 선거가 돈 선거였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최소한 선거자금에 대한 법이라도 있어 더러 통제라도 되지만 목사는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퍼온글] [ 내가 한국에 있을 때니까 16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1982년으로 기억) 나의 상관이었던 B전무는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는 지방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B전무가 한탄하는 것은 대 그룹의 전무로서 아버지를 노회장 한번 시켜드릴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내용인 즉 그 아버지가 노회장을 한 번 해보고 싶어하시는데 선거에 당시로 1억 5천만 원 정도의 경비가 드는데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수원에서 1,600만 원으로 25평 아파트를 샀으니까 대략 이 아파트 9채 값이 있어야 노회장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목사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장이 된 후에야 비로소 노회장이 될 수 있었다. 이 B전무의 아버지는 그래도 잘난 아들 덕분에 노회장이 되었지만 다른 노회장이나 감독들도 모두 잘난 아들의 덕택으로 출세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