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3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제임스 오스틴 박사는 런던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철로에서 시선을 돌려 템스江을 바라보았다. 영국에서 안식년을 취하고 있던 이 신경학자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지저분한 지하철역, 칙칙한 건물 몇 채, 찌푸린 잿빛 하늘 등등. 그는 약간 멍한 정신으로 지금 자신이 가고자하는 선불교 명상센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에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 주위 세계와 자신이 동떨어진 별개라는 의식이 새벽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는 “사물의 참모습이 보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나’라는 인식은 모두 사라졌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영원의 느낌이 왔다. 그 전에 품고 있던 여망, 혐오감, 죽음에 대한공포, 그리고 자아개념의 암시가 사라졌다. 나는 사물의 궁극적 본질을 파악하는 은총을 얻게 됐다.”
이를 두고 신비한 체험이니 영적(靈的) 순간이니, 또는 종교적 직관이니 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오스틴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그 은총의 순간을 인간의 감각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의 증거로 보지 않았다. 하물며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않았다.
오스틴은 그것을 “뇌가 존재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가 잘난 체하는 것은 아니다. 신경학자의 입장에서 그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뇌에 의해 전달되거나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스틴은 그 지하철역의 체험을 계기로 신비한 영적 체험의 신경학적 배경을 연구하게 됐다.
시간과 두려움과 자의식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뇌의 특정 회로가 차단돼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문제는 어떤 회로인가 하는 점이었다.
위협적 상황을 감지하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소뇌편도(小腦扁桃)의 활동이 차단돼야 한다.
공간 감각을 관장하고 자아와 세계를 명확히 구별하게 해주는 두정엽(頭頂葉) 회로도 멈춰져야 한다. 시간 감각을 관장하고 자기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전두엽(前頭葉)과 측두엽(側頭葉) 회로도 분리돼야 한다.
오스틴은 최근 논문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우리가 자아의 ‘고등’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잠시 ‘떨어져 나가거나 사라지거나 의식에서 지워진 것’같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98년 그가 발표한 ‘禪과 腦’(Zen and the Brain)라는 8백44쪽짜리 논문은 신빙성이 적은
뉴에이지 서적 전문 출판사가 아니라 매사추세츠 공대(MIT) 출판부가 발간했다.
그 뒤로 점점 더 많은 과학자가 신경 생물학 차원에서 종교와 영성(靈性)을 연구하는 ‘신경 신학’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미국 심리학회는 가사(假死)상태 체험과 신비체험 등 불가사의한 체험을 다룬 ‘다양한 비정상 체험의 세계’(Varieties of Anomalous Experience)를 발간했다. 美 컬럼비아大에 신설된 ‘과학과 종교 연구센터’의 한 프로그램은 영적 체험을 할 때 인간의 뇌에서 어떤 특이한 주기적 활동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했다.
학술지인 의식연구저널은 지난해 12월호에서 ‘구세주와 하나가 되는 느낌’과 ‘무속적 의식 상태’를 포괄하는 종교적 순간을 집중 조명했다. 이달에는 종교의식이 뇌의 전두엽에 어떻게 작용해 낙천적 생각과 창의력을 길러주는가 하는 등의 주제를 다룬 ‘머리 속의 종교’(Religion in Mind)라는 책이 미국 서점에 깔린다.
또 지난 4월 출간된 ‘왜 신은 사라지지 않는가’(Why God Won’tGo Away)에서 펜실베이니아 大의 앤드루 뉴버그와 이제 고인이 된 그의 공동 연구자 유진 다퀼리는 깊은 명상에 잠긴 티베트 불교 신자들과 한창 기도에 몰입한 프란체스코회 수녀들로부터 수집한 뇌 이미지 데이터를 사용했다.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뇌엽(大腦葉) 및 열구(裂溝·대뇌피질의 깊은 주름)와 관련된 신경학적 용어가 많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요점만 말하자면, 그들은 뇌의 영적 회로를 파악하고 종교의식?어떤 경위로 신자와 비신자를 다같이 감동시키는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 데이터를 이용한다.
새로운 연구들의 공통점은 신비한 영적 체험의 신경학적 배경을 밝혀내고자 하는 열정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매사추세츠州 휘턴 칼리지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울프의 표현을 빌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현실과는 다른, 어떻게 보면 일상적 현실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현실에 직면했다”고 느낄 때 우리의 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아내고자 하는 열정인 것이다.
신경 신학에서 심리학자와 신경학자들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 같은 체험을 하는 도중 뇌의 어느 부위에 불이 들어오고 어느 부위에 불이 꺼지는지를 집어내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같은 연구는 명상을 하면 뇌파가 변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기초 연구와는 다르다. 당시의 연구는 왜 뇌파가 변하는지 혹은 뇌의 어떤 부위가 그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당시에는 살아서 움직이는 뇌의 신경 이미지를 포착하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연구는 우리가 신의 존재를 느꼈다고 생각하거나, 기도에의 몰입이나 종교의식 또는 종교음악을 통해 환희를 느낄 때 활발하게 움직이는 뇌회로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비록 이 분야는 생소하고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영적 체험은 문화·시간·신앙을 초월하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뇌 구조와 작동과정을 반영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는 공통의 핵심요소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울프는 말했다.
“내 몸속에 에너지가 집중된 뒤 무한한 공간으로 뻗어나갔다가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의 이원세계가 이완되고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내 주위의 경계를 떼어내 버리고, 명확하고 투명하며 즐거운 환희의 경지와 어떤 에너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사물에 연결된 깊고 심오한 느낌도 들면서 실은 진정하게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은 앤드루 뉴버그의 동료 마이클 J. 베임 박사가 티베트 불교 명상을 수련하면서 초월적 순간에 오는 느낌을 묘사한 것이다.
베임은 14세인 1969년부터 티베트 불교 명상을 수련해 왔다. 어릴 적부터 신의 존재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던 그는 뉴버그에게 자신의 뇌를 연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펜실베이니아大에서 방사선학을 연구하는 뉴버그는 유진 다퀼리와 팀을 이뤄 영적 체험 도중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영상기술을 활용했다. 과학자들은 베임과 다른 티베트 불교 신자 7명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했다. 모두들 숙련된 명상가였다.
보통 명상을 할 때 베임은 촛불 몇 개만 켜고 재스민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작고 어두운 방 바닥에 앉았다. 옆에는 노끈을 놓아두었다. 그는 머리 속의 이미지에 집중하면서 계속 초점을 맞춰 본인이 말하는 진정한 내적 자아가 발현될 때까지 의식을 가라앉혔다.
베임은 나중에 “시·공간을 초월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세상 만인과 만물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영적 집중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옆의 노끈을 잡아당겼다. 그 노끈의 다른 쪽 끝을 잡고 방밖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뉴버그는 노끈이 당겨지는 순간 베임의 왼팔에 닿아 있는 정맥주사 라인에 방사성 추적자를 주입했다.
잠시 후 뉴버그는 베임을 SPECT(단일광자단층촬영) 기기 앞으로 속히 데려갔다. 그 기기는 추적자를 감지해 뇌 속 피의 흐름을 추적한다. 피의 흐름은 신경활동과 상관관계가 있다.
SPECT 이미지는 과학자들이 초월적 체험을 찍은 사진 중 가장 근사치에 가깝다. 역시 예상대로 주의력을 관장하는 전전두엽피질(前前頭葉皮質)이 붉게 변했다. 결국 베임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돋보인 것은 활동을 잠재우는 순간이었다.
뇌의 상부와 후부를 포괄하는 상두정엽의 신경다발이 어두워졌다. ‘위치·방향 인식 영역’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부위는 공간과 시간 정보, 공간 속에서 몸의 위치와 방향에 대한 정보를 처리한다.
이 부위는 자신의 몸과 외부세계의 경계선을 인식하게 해준다. 특히 좌측위치·방향 영역은 몸이 다른 물체와 구분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우측위치·방향 영역은 몸이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감각을 형성한다(우측 위치·방향 영역에 부상을 입으면 물리적 공간에서 움직이는 능력이 손상돼, 의자 앞으로 가는 데 필요한 거리와 각도를 계산할 수 없게 된다). 위치·방향 영역이 계산을 하려면 감각정보가 입력돼야 한다.
뉴버그는 “깊은 명상에 빠질 때처럼 이 부위로 가는 감각정보를 차단하면 뇌는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감각정보가 도착하지 않으면 좌측 위치·방향 영역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뇌는 “만인 및 만물과 완전히 뒤섞인 자아를 인지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뉴버그와 다퀼리는 ‘왜 신은 사라지지 않는가’에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우측 위치·방향 영역에 감각정보가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무한한공간의 느낌을 갖게 된다. 명상자는 자신이 무한대의 공간에 이르렀다고 느낀다.
“새로운 경험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영적 교감과 평화를 느꼈다. 내 곁에 하느님이 와 계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의 임재(臨在)라는 충만함을 느끼는 동시에 정신이 한가운데로 집중되면서 차분해지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느님이) 내 몸속에 스며들었다.”
이상은 프란체스코회의 수녀 셀레스테가 SPECT 검사를 받기 직전 45분 동안 기도하면서 느낀 감정이다. 그녀가 기도에 완전히 몰입해 신의 임재를 뚜렷이 느끼고 자아가 신에 동화됐다고 느꼈을 때 그녀의 뇌는 티베트 불교 명상가들과 같은 변화를 보였다.
뇌의 위치·방향 영역이 어두워진 것이다.
뉴버그는 셀레스테와 연구에 참여한 다른 수녀들의 느낌과 명상가들의 체험은 “착각도 아니고 소망도 아니었다. 그들의 뇌에서 실제로 생물학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활동이 일어났다”고 강조했다. 명상이 두뇌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심리학자와 신경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체험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 체험이 왜 경이로운 저녁 노을을 보거나 발가락을 다칠 때 만큼이나 실제적인지를 설명해준다.
종교적 체험이 뇌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은 사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천둥 소리, 푸들의 모습, 공포심, 물방울 무늬 城의 이미지 등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은 뇌에 흔적을
남긴다. 신경 신학은 단순히 영적 감정이 신경에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신경 신학자들은 영적 체험에 관여한 뇌의 영역을 설명하고 그런 체험이 발생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누구나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는지, 또 영적 체험이 왜 특정 성질을 띠는지를 알아내고 싶어한다.
“행성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고 빛의 물결이 끊임없이 내게 밀려왔다. (행성개념이 없는 고대인이라면 당연히 종교 체험중 현대적 우주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고 원시적인 우주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 그러나 나 역시 그 빛의 일부였다. 이제 별개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우주의 구조를 들여다보았다. 지식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얻고 모든 것을 일견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은 작가 소피 번햄이 1997년 출간된 ‘황홀한 여행’(The Ecstatic Journey)에서 마추픽추
유적지를 방문했을 때의 체험을 기술한 것이다. 당시 그녀의 뇌를 SPECT로 검사해 위치·방향 영역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음을 확인해 줄 과학자는 없었지만 정지 상태였음은 거의 확실하다. 어떤 체험이 신경과 관계가 있다고 해서 그 체험이 다만 뇌 안에서만 존재한다거나 현실과는 무관한 뇌 활동의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애플파이 먹을 때를 생각해 보자.
뇌의 후각기관은 계피와 과일의 향기를 기록한다. 체지각 피질은 혀와 입술을 통해 얇은 파이 껍질을 감지한다. 시각 피질은 파이의 생김새를 기록한다. 과거에 할머니의 주방이나 길모퉁이 빵집에서 경험했던 파이에 대한 기억들은 연상 피질들을 활성화한다.
시간이 남아도는 신경 과학자라면 ‘파이 생각을 하고 있는 뇌’에 양전자단층 촬영(PET)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재하는 파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뉴버그는 “영적 체험들이 분명히 뇌 활동과 관계가 있다고 해서 그런 체험들이 신경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과를 먹는 즐거움을 체험하게 해주는 신경적 변화 덕분에 사과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영적 자극이나 감각이 뇌 활동에 의해 유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영적 체험과 결부된 신경의 변화와 관련해 뇌가 그런 체험을 유발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재하는 영적 현실을 감지하는 것인지를 규명할 방법은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뇌신경학적 변화를 인위적으로 주면 영적 체험이 인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
실은 파이 맛을 느낄 때 관여하는 뇌의 일부 영역이 종교적 체험도 같이(같은 역할) 만들어낸다. 불상이나 십자가나 토라(유대경전)를 보며 종교적 경외감을 느끼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을 해석하고 이미지들을 감정과 기억에 연결시키는 뇌의 시각연상 영역이 그런 이미지를 감정에 연결시키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기도나 종교의식 때 나타나는 환영도 역시 연상 영역에서 발생한다. 측두엽(뇌의 측면에 위치하며 언어·개념적 사고·연상을 담당하는 회로가 들어 있는 부분)의 전기 자극은 환각을 만들어 낸다.
이 부위들의 전기 활동이 비정상적으로 폭발하면서 일어나는 측두엽 간질은 이 현상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측두엽 간질과 깊은 신앙심간의 상관성 여부는 의심스럽지만 그런 상태에서 잔다르크 스타일의 강렬한 종교적 환영과 환청이 유발된다는 결과가 나온 연구도 있다.
소설가 마크 솔즈먼은 신간 ‘라잉 어웨이크’(Lying Awake)에서 여러해 동안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다가 환각을 느끼기 시작하는 수녀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 원인은 측두엽 간질이다. 소설 주인공인 십자가의 요한 수녀는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수술을 받으면 병은 고쳐질지 몰라도 신의 환영까지 사라지리라는 것이 고민이다.
도스토예프스키·聖바울·아빌라의 聖테레사·프루스트 등의 위인들도 측두엽 간질에 시달리며 영적인 것에 집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측두엽 간질은 흔치 않은 병이지만 연구자들은 전기 활동이 집중적으로 폭발하는 현상인 ‘측두엽 과도전류’를 통해 신비 체험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캐나다 로렌시언大의 마이클 퍼신저는 이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지원자의 머리에 전자석이
장착된 헬멧을 씌웠다.
헬멧은 컴퓨터 모니터와 비슷한 정도의 약한 자기장을 발생시켰다. 퍼신저는 자기장이 측두엽에서 집중적 전기 활동을 자극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따라 지원자들은 초자연적 혹은 영적 체험, 즉 유체 이탈현상이나 영기(靈氣)를 느꼈다고 말했다.(자기장이 정상이상인 지역에서 귀신출몰현상 보고가 많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그런 지역을 인간 뇌는 음산하다고 느끼고 환영을 촉발하는 것이다. 자기 몸에 해로운 환경을 피하려는 몸의 자동작동 현상이 귀신현상이다.)
퍼신저는 종교적 체험은 측두엽에 소규모의 전류 폭풍현상이 일어나 발생하는 것이며 그 같은 폭풍은 불안감, 개인적 위기, 산소부족, 저혈당, 그리고 단순한 피로에 의해 유발된다고 추측했다. 그런 순간에 ‘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하필이면 왜 측두엽일까.
퍼신저는 인간의 좌측두엽이 자아 의식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좌측두엽에 자극이 가해지지만(우측두엽은 정지상태) 좌측두엽은 그것을 영기나 유체이탈 또는 신의 존재로 해석한다(이 현상도 몸이 몸을 보호하려는 본능적 현상이다. 영기나 유체이탈로 해석함으로써 좌측두엽이 우축두엽의 본상회복 에너지적. 시간적 휴식과 여유. 고통과 통증의 감소와 일시 해소를 할당해 준다.).
“나는 바닷가에 홀로 있었다. 개체적 존재의 고독으로부터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의식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땅과 하늘과 바다가 조화의 둘레를 에워싼 하나의 방대한 세계가 돼 울렸다. 내 자신이 그들과 하나임을 느꼈다.”
1900년 독일 철학자 말비다 폰 메이젠부르크가 기술한 이런 체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일까. 뉴욕市 헌터大에서 비교 종교학을 연구하는 로버트 K.C. 포먼은 “명상을 하는 사람이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으로나 체질적으로 신비한 능력을 갖기 쉬운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신비 체험을 하기 쉬운 사람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이며 관심분야가 넓고, 모호한 것을 잘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또 환상을 좇는 경향이 있어 “상상과 실제 사건을 구별하는 판단과정을 중지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데이비드 울프는 말했다.
(순진하고 단순한 사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으로 자신의 자아를 통제하는 힘이 약한 사람들이 종교에 광적으로 빠지는 것도 뇌의 현상이면서 또한 게으름으로 자신의 통제를 방치한 탓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나 명상중 환영이 나타나면 그 환상에 대해 스스로 "이건 환영에 불과하다. 나는 이 환영을 비현실,내 뇌의 한 에러로 취급한다 사라져라"라는 자기 객관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이 종교에 몰두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이런 현상을 마야(maya;전도몽상)라고 하고 이를 모두 삿된 것,비현실로 취급한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는 영적 체험을 전달하는 뇌회로가 있어 아마도 대다수 인간이 그런 체험을 할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저지할 수도 있다. 이성적이고 통제력이 있으며 쉽게 공상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런 체험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이것이 수행자들의 최고 수단이다).
1960년대 이래 계속된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의 30∼40%는 적어도 한두번은 “유체이탈과 같은 강력한 영적 힘에 가까운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53%는 “갑작스런 종교적 깨달음이나 통찰력의 순간을 겪어봤다”고 응답했다.
신비적 체험의 보고 사례는 교육·소득·나이 수준(40∼50대가 가장 많았다)에 비례했다. 그러나 날아서 금성에 가지 못하듯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1999년에 한가지 설명이 나왔다. 호주의 연구자들은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을 보고한 사람들은 대체로 특이할 정도로 용이하게 잠재의식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애들레이드大의 심리학자 마이클 샐버른은 “무의식적 사고가 좀더 쉽게 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서 영적 체험과의 연관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과학자들은 잠재적 사고가 의식으로 표출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밝혀줄 단서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짐작케 해주는 가장 강력한 단일 요인은 ‘분열’이라는 것이다.
분열 상태에서는 뇌의 다른 부분들이 각기 따로 논다. 불가사의한 현상을 파헤치는 데 전념하는 스켑틱스 소사이어티의 마이클 셔머 소장은 “최면술을 잘 설명해 주는 이 이론이 신비 체험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일부 모듈이 나머지 피질로부터 분리되면서 뇌에서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분열은 하나 이상의 뇌 영역에서 특이한 전기 활동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1997년 신경학자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은 신경과학회 연례 총회에서 “종교적 체험에는 신경 기반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의 잠정 결론은 종교적 감정의 깊이, 즉 신앙심은 측두엽 전기 활동의 자연적 증대에 달렸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흥미롭게도 측두엽은 언어 인식능력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다. 영적 체험 중 가장 흔한 것은 신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내부의 소리(본인이 하는 말임을 알고 있는 머리 속에서의 ‘작은 목소리’)를 외부의 소리로 착각할 때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런 체험을 하는 동안 언어 생산을 담당하는 뇌의 브로카領에 불이 켜진다. 대다수 사람은 이것이 자기 내부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이나 기도를 하는 동안 흔히 그러듯 감각정보가 제한되면 사람들은 “내부에서 만들어진 생각을 외부의 소리로 착각하기 쉽다”고 영국 맨체스터大의 심리학자 리처드 벤톨은 ‘다양한 비정상 체험의 세계’에서 말했다. (기독교.이슬람..등 여러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계시나 환상 방언이란 현상도 모두 뇌 안에서 일어난 이미지 작동이나 스스로의 목소리를 착각한 것으로 해석된다.)
스트레스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도 음성의 발생지를 찾는 뇌의 기능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벤톨은 덧붙였다. 1998년의 한 연구에서 과학자들은 환경에서 음성이나 소리를 들었을 때 또는 환청이 들릴 때 右전띠라는 뇌의 특정 영역이 작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무언가가 들린다고 상상하고 그것이 자신의 뇌에서 나온 것이라고 확신할 경우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 부위가 “외부 소리 인식기능이 있는 신경회로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고 벤톨은 말했다.
거기에 불이 잘못 들어오면 우리는 방금 들은 소리를 밖에서 난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영혼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종교의식이나 예배 등에 참여해 감동받을 수 있다. 거기에 의식의 위력이 있다. 북을 치고 춤을 추며 주문을 외우는 모든 행위는 신체의 움직임을 포함해 하나의 진한 감각적 자극 원천에 정신을 집중시킨다.
의식은 또 강력한 감정 반응을 부를 수도 있다. 다른 감각적 자극이 배제된 데다 감정이 고조되는 것이 요건이다. 그 두가지 상황이 갖춰지면 극도의 공포감을 느낄 때처럼 뇌의 흥분체계가 정점에 이르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평형감각을 유지하는 뇌의 구조 가운데 하나인 측두엽 해마가 작동을 멈춘다고
뉴버그는 설명했다. 혼잡한 고속도로에서 차량 진입을 통제하는 교통경찰처럼 신경 간 신호의 흐름을 막는 것이다.
그 결과 뇌의 일부 부위에 감각 공급이 차단된다. 그렇게 차단되는 부분 하나가 명상이나 기도할 때 조용해지는 부위인 위치·방향 영역인 것 같다. 감각 공급이 중단되면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서부터가 세계인지 분간하는 감각을 잃게 된다. 종교의식과 예배가 뉴버그의 표현대로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동질감과 영적 일체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느린 찬송가, 구슬픈 멜로디, 속삭이는 듯한 기도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마술을 부리는 것 같다. 해마를 직접 작동시켜 뇌의 일부 부위로의 뉴런 전달을 막는 것이다.
그 결과 “뇌의 자아인식 능력이 모호해지고 종교의식의 주목적인 일체 상태로의 문이 열리게 된다”고 뉴버그는 말했다.
최근 신경 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새 도구가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심리학과 신경 과학은 오래전부터 종교를 등한시해 왔다. 많은 사람의 정신세계 중심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울프의 표현대로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무관심 혹은 냉담’의 대상이었다.
기독교 신자인 한 심리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의 삶에서 믿음의 역할을 다루고자 했으나 출판사가 독자들 눈치를 겁내 내용 대부분을 편집했다. 신경 신학의 부상은 그런 태도가 극적으로 변했음을 말해준다. 과학이 영적 세계를 얼마나 탐구할지는 미지수지만 영적 세계는 보답할 준비가 돼 있다. 신비 체험은 신경 과학의 최대 미스터리인 ‘의식’에 대한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고 포먼은 말했다.
With Anne Underwood
펌 - 뉴스위크 / 신들은 인간의 뇌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