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회를 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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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4 08:53
창조론자라는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노리는 바는 무엇인가?
그들은 바이블을, 특히 '창세기'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교 정통주의 신봉자들[fundamentalist protestants]이다.
그들의 목표는 진화에 반대되는 '대안모델'인 그들의 견해를 모든 공립학교 과학시간에 가르치게 하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한 집단이 보수파의[혹은 창조론의] 새로운 운동을 조직한 이래로 이 운동은 그 범위가 전국적으로 퍼졌고 국제적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지금은 전국에 다수의 창조론 연구소들, 대학들, 협회들 및 클럽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들의 회원과 교직원들에게 '창세기'에 있는 창조와 노아의 대홍수를 축자적 역사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서를 요구한다.
창조론자들은 과학자들간에도 진화에 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진화의 이론들과 진화의 '사실[fact]'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방면의 일치하는 증거들로부터 생물학자와 고생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생물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과학이론 그 자체는 사실이 아니다.
이론이란 다름아닌 견해들(예를 들면, 다윈의 자연선택이론)로서,그것들은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고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짐에 따라 계속 발전되어간다.
그러므로 이론들은 새로운 견지를 열어놓는 신발견에 맞추어 때때로 수정되어야 한다.
창조론자들을 고민케 하는 과학적 개념들의 하나는 사람이 동물뿐 아니라 다른 모든 생물과도 유연관계가 있다고 보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만이, 신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유연관계의 개념은 그들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진화의 사실을 기초적으로 뒷받침하는 고생물학은 창조론자들에 의해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그들의 주되는 근거는, 우주가 매우 오래되었고 끊임없이 변화해왔다고 하는 그리고 기나긴 지질시대를 통하여 생물이 서서히 진화해왔다고 하는 과학적 견해가 '창세기'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지질학적 시간, 화석기록 및 층서학은 모두 관찰상의 증거에 근거한 것이지 결코 가설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의 초보적인 적용만으로도 창조의 연대, 지구상의 옛 생물 및 노아의 홍수에 관한 창조론자의 견해들을 충분히 허물 수 있다.
흥미있는 일은 지질학적 시간척도와 세계적 층서체계[양자는 모두 창조론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음]는 유정[油井] 시추가 예상된 층위에서 성공을 거둘 때마다 검증되고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조론자들은 만일 바이블의 문자 그대로가 사실이 아니라면 바이블의 도덕적, 윤리적 교훈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반면, 자유롭고 교양있는 그리스도교인,유대교인 및 이슬람교인들은 바이블을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그 속에서 위대한 정신적 및 도덕적 교훈들을 이끌어 낸다.
그들은(많은 과학자들을 포함) 신은 무소부재하며(어디에나 있으며), 신이 바로 전체 우주이며, 어디나 다 그분의 중심지이며, 아무데도 그이에게서 먼 곳이란 없다<God is everywhere, God is the entire cosmos; His center is everywhere and His periphery nowhere>고 본 聖 어거스틴에 동의할 터이다.
바이블의 독자들은 누구나 바이블 속의 이야기들은 대개가 어렵고 모호하여 그것들을 번역하거나 그것들에 관하여 생각함에 자유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알고 있다.
지금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은 위안을 얻기위하여 종교를,심지어는 의사종교를 찾아간다.
날이 갈수록 새로운 사이비종교들의 놀랄만한증가와 보수주의의 상당한 성장이 있다.
정통파 종교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비판없이 받아들인다.
이리하여 그 이른바 목자들은 신의 대변자로서의 특전과 권위를 누린다.
하지만 역사는 이 지도자들이 그 권위의 힘을 사용함에 늘 현명치만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적 창조론이 왜 과학이 될 수 없는가 ?
과학은 증거가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려는 연구자의 마음가짐으로 특정지워진다.
과학은 새로운 증거와 새로운 견지가 대두됨에 따라 계속 전진하는 것이고 검증 가능한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과학은 필연적으로 자기 수정적이다.
반면, 창조론자들의 '확증들'은 시험 가능한 관찰들이나 또는 창조의 기본과정들의 분석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으로 일관하고 있다.
창조론자들의 지도적 대변인인 기쉬[Duane Gish]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신의 창조방법과 그가 사용한 과정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은 현재 자연 우주의 어느 곳에서도 진행되고 있지 않는 과정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창조론자들이 이런 식으로 말할 때 그들은 과학자들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종교적 신조에 과학이란 딱지를 붙여서는 안된다.
창조 설화는 2,700년 전보다 더 오랜 옛날에 원시부족인들에 의해 '창세기'가 만들어진 이래 수정되거나 변경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렀다.
그것은 자연적 원인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그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그것을 우주역사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침서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과거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들은 옛날에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사실을 밝히는 학문이다.
창조론은 과학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론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정 내지 시험할 수가 없는 경직된 가정, 곧 모종의 확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이 증거를 앞서는 것이다.
계시란 전혀 과학의 영역 밖의 것이다.
창조론자들의 소위 '연구'는 기원들에 관한 모든 과학적 탐구에 대한 편견적, 파괴적인 비평이다.
창조론의 기본 입장은 부정적인 것으로, 창조론자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확립하려 하지 않고 반대편을 파괴함으로써 자기네들의 신뢰성을 높이려 한다.
창조론자들은 그들이 만일 반복된 강조와 엄숙한 태도로 시간을 끌면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을 마침내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형적 주장이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진화는 증명될 수 없다. 그것은 일방적이고 독단적이며, 인간의 출신에 대한 대안적 설명들을 가지고 얼마든지 맞설 수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진화적 설명에 환멸을 느끼고 있으며 창조론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특수 창조가 진화에 대해 유일한 대안이므로 그것은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해야 한다."
"창조론자의 모델이 진화이론의 그것보다도 화석기록과 많은 지질학적 현상들을 더 잘 설명한다."
"진화의'복음'은 예수복음의 적이며,기원의 문제들은 과학적 방법으로는 해결할수 없다."
슬로건이 되어 있는 이러한 모든 주장들은 무책임하며 명백한 거짓이다.
진화에 관한 공허한 논쟁을 가지고 창조론자들은 시민들로 하여금 과학사회에 분열이 있다고 믿게 하고 싶어하지만 창조론자들은 과학사회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과학 사회의 분열이란 당치 않은 말이다.
대개 그들은 시간제 복음전도자, 교사, 그리고 기술자로 종사하는 종교적 행동가 들이다. 그들 중 몇몇은 비록 고등한 과학 훈련을 받았더라도 스스로 고립을 자초 하였다.
그들은 공통된 동기로 조직되고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있기 때문에 터무니 없이 열심이다.
과학이 원자를 쪼개고 유전암호를 해독하며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는 때에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창조론자들의 노력은 소름이 끼칠 만큼 저질의 것이다.
그들은 맨발의 山族도 아니면서 과학과 고등교육에 대해 회의적이며, 과학교육을 자기네 손아귀에 넣으려는 무척 진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개종자들을 얻고 있다.
진화과학과의 싸움에서 창조론자들은 필요하면 바이블을 내세우는데, 이는 종교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동정을 얻는 데는 극히 유효하다.
바이블은 서유럽 문명을 만들었고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영향력있는 책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과학적 지식의 대용품으로 삼을 수는 없다.
바이블이 축자적으로 사실이라는 해석을 고집하면 이성과 맹목적 수용간의 끝없는 충돌이 따른다.
우주 중심의 평평한 지구, 여자보다 수가 적은 남자의 갈비뼈, 전세계적 홍수와 그리고 잠시만 해수에 잠겨도 견딜 수 없는 모든 육상동물과 담수생물을 구조하기에 충분히 편리한 마법의 방주와 같은 환상이 그것이다.
창조연구소 소장이며 어디에서나 창조론자의 자칭 대변인인 모리스는 그의 소책자 '성서적 천변지이와 지질학'(1974)에서 자기 패배적 흑백논리식 견해를 말하고 있다.
이 책자는 그것을 읽는 생각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바이블의 훌륭한 도덕적 교훈들로부터도 멀어지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말한다.
바이블을 존중할진대 그 속의 '정신적' 가치뿐 아니라 과학적 및 역사적 가르침도 거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연구에 의해 실제로 입증이 되는 데도 그 가르침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이블의 그 증명도 안 되는 '정신적' 가르침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인류의 위대한 교사들은 흔히 은유 혹은 비유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가르친다.
바이블은 모든 훌륭한 문학이 그러하듯이 은유, 비유 및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바이블의 은유와 비유를 여러 다른 방법으로 해석한다.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 간주한다.
바이블은 중동지방에 살던 종족들의 구전으로 시작되었고 실수하기 쉬운 무수한 인간의 필경을 거쳐 편집, 복사되었으며 번역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바이블의 권위가 손상되지는 않는다.
바이블 독자들은 그들 자신의 양심과 이해수준에 따라 바이블의 여러 부분을 자유로이 해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교파의 독단을 받아들이는 양자택일을 하게된다.
창조론자들은 후자를 강요하는 축이다.
창조론자들은 성서적 계시는 진리의 최고의 형태라고 하며 바이블내용과 일치하지 않거나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은 허위라고 정의한다.
자연계의 놀라운 양상들은 우주 창조 당시 신의 마음속에 있던 이념(ideas)이라고 창조론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와 같은 방향의 연구는 창조론자들에 의해서건 과학자들에 의해서건 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과학자들은 이른바 '계시된 진리'를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규칙성을 재촉한다.
그들은 그 질서정연함의 의미, 즉,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엇으며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알아내는데 특히 흥미가 많다.
만일 그것이 '신의 의지'의 표현이라 하자.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자연이 '신의 의지'를 수행할 것인가.
그것은 과학의 할 일이다.
과학자들은 인간 지성의 엄청난 잠재력에 신념을 두고 있다.
수천년의 인류 역사는 학자들에게 전통과 권위만을 연유하는 지식을 조심할 것을 가르쳐왔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진리를 탐구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전체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 창조론은 과학과는 유사성이 없고, 말하자면 불화를 조장하는, 특별히 비타협적이고 편협하고 호전적인 신학이다.
창조론자들의 노력은 비참하게도 방향이 어긋나 있다.
그들 종교의 본래의 관심은 도덕성과 영성일 터이지 우주의 본질, 기원 및 역사가 아닐 터이다.
이러한 문제는 과학에 속한다.
우리들에게 미래가 있고 우리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과학과 그 방법에 관한 분명한 이해가 요구되는 이 때에 창조론자들은 그들이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과학적 노력을 짓밟을 것임에 틀림없는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가지지 않은 사람도 그렇지만) 시민으로서 말할 충분한 권리가 있고 오류를 범할 권리 또한 있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이 그들의 견해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묶으려 한다면 종교적 및 지적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러 신앙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신의 메시지의 의미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는, 또는 싸울 수밖에 없도록, 신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그렇게 많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며, 이는 종교의 부정적 측면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신은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힘이며, 그이를 가장 잘 안다고 공언하는 것은 겸양지덕이 결여된 행위라는 입장을 취한다.
주: 여기서 말하는 창조론자는 창조과학회와 관련된 사람들을 지칭하오니 이외의 다수 신자들께서는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데카르트의 우주의 기원에서 그의 설명을 보면 상상적 고찰이 많을 뿐 굳이 증거를 갖추려는 노력이 없었고 '창세기'에서 많은 부분을 도입하였다.
그의 그러한 생각 중 다섯 가지는 나중에 '홍수'지질학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첫째, 지구는 불덩이로 기원하였다.
둘째, 차례차례의 냉각단계들을 거치면서 진화, 변천해왔다.
셋째, 마침내, 전세계적인 지각붕괴가 일어났다.
넷째, 온 지구를 덮고 있던 대양이 밑으로 확 꺼지면서 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섯째, 그때의 급류로 인해 지면이 패이고 깎이어 현재의 지형이 이루어졌다.
지구의 기원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러한 해설이 마음에 든 영국의 버네트[Thomas Burnet] 목사는 1681년 그것을 더 발전시켜 노아의 홍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정리하여 책으로 펴내었다.
버네트의 요점들은 성서적 천변지이설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저술들 속에서 오늘날에도 인용되고 있다.
버네트 목사는 그의 저서'신성한 지구 이론'에서 바이블에 적혀 있는 규모의 전세계적 대양이 있게 되려면 물의 양은 현재의 해양보다 훨씬 더 많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실로 우리가 아는 해수량의 3배 이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필요한 물을 대기로부터의 강우량으로 충당시키고 홍수 후에는, 지구 안의 거대한 동굴들 속으로 물을 처리하였던 것이다.
지구에 관한 모든 것이 샅샅이 밝혀진 오늘날 지구 깊은 곳에 거대한 동굴들이 있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상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의 창조론자들은 노아 홍수의 잉여수량을 처리할 다른 하나의 기적을 고안해내야 할 판이다.
미국 지질조사소의 개략적 계산에 따르면 지하수의 양은 지구상에 있는 물의 총량의 약 0.6퍼센트일 뿐이다.
미국 지질조사소는 미국 정부기관으로, 다른 임무와 함께, 수리학적 정보를 책임지고 있다.
만일 대기의 모든 수증기가 전세계적으로 돌연히 비가 되어 계속 내린다면 바다의 수면은 5센티미터 정도 상승할 것이고, 또 만일 세계의 모든 빙하가 다 녹아버린다면 낮은 해안평야들이 잠길 만큼 60미터 정도의 수위상승이 있을 것이다.
노아 홍수설에서 발전된 가설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퇴적암은 바다의 개흙과 자갈들이 급격하게 떠밀려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고, 그 후(홍수가 끝난 뒤] 바닷물이 갑자기 육지에서 물러나게 되자 대기중에 노출되었으며, 퇴적물이 미처 굳어지지 않았을 때 급격한 물의 흐름에 깎이고 패이는 침식작용을 받아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의 지형은 이 어설픈 주장과는 명백히 모순된다.
전세계의 평지와 언덕의 대부분은 바다의 개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천의 퇴적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단지 수천년 전일 뿐인 가까운 과거에 전세계에 걸친 대양이 존재했었다는 홍수가설의 설명과는 도저히 부합되지를 않는다.
노아의 방주에서 동물들을 풀어주었던 장소로 생각되고 있는 아라랏[Ararat]산의 작고 별 특징 없는 동식물 집단은 세계의 거의 모든 다른 지역의 동식물 집단들과 거의 유사성이 없다.
창세기의 설명은 생물분포의 사실과는 전혀 부합되지 안았다.
특히 이상한 것은 어떤 특정 생물이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서 발견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코뿔소의 별개의 종들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와 또 멀리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되며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種을 달리하는 맥[tapir]들은 열대 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에만 살고 있고, 낙타科는 남아메리카 서부, 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에 국한되어 살고 있다.
관찰된 동식물분포의 사실들은 특수창조나 홍수 전설에서 기대되는 바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은 다수의 분산 중심지들, 심지어는 다수의 창조 중심지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였다.
이런 따위의 생각은 이단임이 분명하였으나,사실은 명백한데 바이블은 아무런 설명이 없으므로 생각을 않는 편이 나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다윈의 설명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생물지리구[地理區]들은 격리에 따른 진화적 분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시간, 다양한 환경 및 지질학적 사건들은 동식물이 여러 다른 지역에서 격리된 채 여러 종류로 갈라지면서 진화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포의 사실들은 에덴동산에서의 단 일 회의 창조와 그리고 종(種]의 불변성의 개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알대로 다 알면 바닥이 드러나서 신앙이 성립될 수 없다거나 과학적 지식을 다 수용하면 종교가 무너진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종교를 늘 미신과 무지 위에다 붙들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무너질 부분은 빨리 허물어버리고 집을 개수 내지 개축함이 마땅하다.
종교는 끊임없이 개혁되어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은 묵은 집이 무너질까봐 안간힘을 쓴다.
진화와 진화론을 위험시하는 그들나름의 이유중 하나는 그것이 휴머니즘에 반대된다는 우려이다.
이는 전혀 터무니없는 우려만은 아니다.
이 세상에 좋은 그 어떠한 것도 오해나 악에 휘말려들고 도용 혹은 오용을 당하는 예가 있게 마련인데 진화도 그 예외가 아니어서 한때 유물론에 연루되는가 하면 히틀러에게 도용당하는 변을 겪기도 하였다.
사람들 가운데는 진정한 책임의 소재를 묻지 않고 매사를 피상적으로 보아 말썽을 일으키는 과학과 진화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무슨 좋은 결론을 내렸다는 듯이 자부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 자신은 과학의 소산인 문명의 혜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누릴대로 누리고 있으면서 말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진화가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도 위험성의 소지가 있는 진화를 가르치기보다는 무식하고 단순한 옛날 그대로의 것을 가르쳐서 무사하고 무난한 의식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마치 무식해야만 효자가 되니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말자고 하는 어리석은 아버지와 같다.
종교로부터 미신을 추방한 후에도 남는 그것이 진정한 종교일터이다.
종교는 과학과 모순됨이 없도록 개혁되어야 한다.
사실과 진상에 관해 알 것을 다 알고도 도덕적일 수 있는 고등한 도덕을 가르쳐서 도덕적으로 장성한 현대인을 육성하여야 할 것이다.
지옥에 간다든지 염라대왕 앞에서 벌을 받는다든지 하는 전제로 권선징악이 되는 수준이 앞으로 얼마나 유지되겠는가.
아무런 보상개념 없이도 다만 자기 즐거움으로 인해서 자발적으로 착하게 사는 현대인이 되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진화면 어떻고 창조면 어떤가? 짐짓 문제를 만들어 편지풍파를 일으키는 것 아니냐?"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진화를 바로 이해함으로써 인간관, 우주관, 신관 및 창조관을 자연의 진상에
접근시킬 수 있다.
'신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 '과연 무엇이 창조인가?'라는 문제 속에는 우리가 어릴 때 살던 사고의 집을 허물고 어릴 때의 관념을 허물벗고 장성한 사람으로서 사물을 보라는 신호가 들어 있다.
그러한 문제를 붙들고 뒹구는 동안 우리에게는 크고 높은 소견을 가진 장성한 어른으로의 길이 열리느니만큼 '창조와 진화'라는 주제는 예사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창조냐 진화냐'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진화가 곧 창조'라는 논리에 접근한다면 어린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 것만큼이나 정도가 놓아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애처럼 생각했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애 다운 것들을 버렸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