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복하게 태어난 찰스 다윈은 과학 교육이라고는 에딘버그 의대에서의 2년이 전부였다
그는 친구들과 바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과정을 간신히 마쳤다
다윈은 삶의 특별한 목표가 없었는데 한 친척의 도움으로 세계를 일주할 비글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그 항해는 1831년 12월부터 1836년 10월까지 약 5년간 계속되었다
찰스 다윈이 남아메리카에서 부족들의 마술을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술 의식 참여 후 그는 정신과 육체에 손상을 받았다
그는 만성적 행동 불능 증상과 떨칠 수 없는 우울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갈라파고스 섬에서 몇종류의 핀치새들을 보고 종들간의 진화를 제시한다고 생각하였다
핀치새에 관한 이론은 그가 영국으로 가지고 돌아온 최초의 진화 증거였다
그러나 핀치새의 부리가 길고 짧은 것이 발견되었지만 여전히 핀치새에 불과하였다
그는 결코 과학자가 아니며 유전학의 실질적 문제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친사촌과 결혼했고 그의 일곱 자녀 모두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를 가졌다
그의 책 종의 기원은 1859년 11월 처음 출간되었다
원래의 제목 : On the Origin of the Species by Means of Natu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생존경쟁에서 자연선택 혹은 선택적 종의 보존을 통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
다윈은 그의 책에서 이론으로부터 사실을 추론했고, 증거는 조금도 제시하지 못했다
현대의 진화론자들조차 그 모순된 주장 때문에 그 책을 부끄러워한다
다윈은 사적인 편지에서 자신의 이론에 증거가 없고 그것이 인류의 도덕성을 파괴시킬 수 있
음을 안다고 자주 언급했다
저변에 깔린 이 사악한 개념은 실제로 인류 역사 최악의 두 전쟁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냈다
바로 히틀러와 공산주의다
Contents
1 생애 ¶
1.1 유년기 ¶
1.2 학창시절 ¶
1.2.1 탐험 항로 ¶
2 학술 활동 ¶
물론 서구권 한정찬반이 오고갔다. 하지만 진화론에 대하여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세계에서 여럿 있었으며 진화론이 나오자 공식적으로 지지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8] 무엇보다 영국을 라이벌 삼던 프랑스에선 오랫동안 묻혀졌던 용불용설을 다시 발굴해내 이 주장을 한 라마르크의 유일한 혈육인 작은딸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이것을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우린 다윈보다 50년은 앞서 진화론 비슷한 주장을 한 이가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고인드립3 늘그막 ¶
그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다윈은 1875년에도 식충식물에 대한 연구 책자도 써서 상당한 인정도 받고 책도 꽤 팔렸다. 그런데 이 책을 본 독일인 칼 리쉬라는 자가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사람도 잡아먹는 거대한 식인나무가 있는 걸 봤다고 할때 다윈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어딘가 미지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선 지금 우리의 상상을 넘는 동식물이 있을테니까 그게 이상한 건 아니다."라는 답장을 보였는데 이 작자가 이걸 다윈도 이걸 공식으로 인정했다는 투로 1878년에 낸 책 서문에 써먹어버린 거였다. 물론 나중에 드러난 것은 당연히 사기극이었다. 당시에도 다윈은 억울하게 이용당했다고 밝혀졌지만..다윈은 이 일로 한동안 활동을 삼가고 꽤 불편하게 지냈다.
우생학 참고다윈은 당당하게 웨스트민스터 성당[12]에 묻혀져서 살아생전에도 대과학자로 국가적 인정을 받음을 보여주었다. 되려 다윈은 형 에라스와 부모와 할아버지가 묻혀진 가족무덤에 묻혀지길 바랬으나 되려 영국신문들과 여론이 그런 위인을 웨스트민스터가 외면하면 국가적 망신이라고 주장하여 성당에 묻혀진 것이다. 오죽하면 당시 더 타임스는 이렇게 기사를 썼다.
한편 다윈 본인은 2012년에 미국의 총선에 출마했다.4 저서 ¶
5 기타 ¶
당연히창조설자들의 반발이 상당했던 듯.뭐 어때 국내에선 아예 개봉도 못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