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죄악사 상

기독교죄악사 상

가로수 0 5,982 2008.06.14 16:25
* 이 문서는 2000년 8월 18일에 초간된 '조찬선'목사의 저서 '기독교죄악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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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독 교 죄 악 사

저자 : 조 찬선
약력 : 전 감리신학대학 (서울 서대문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담임목사
교목실장
전 목원대학 교수
전 전국 기독교학교 교목회장
Yuin University (Compton, U.S.A) 부총장
미국연합감리교에서 목회 후 정년 은퇴

서문

본서는 숨겨져 있는 기독교의 죄악상을 폭로하여 기독교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의도로 엮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에 기독교가 저지른 죄악을 속죄하고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경종을 올리며, 또 기독교가 혁명적인 개혁을 통하여 진정한 예수의 올바른 가르침으로 되돌아가 인류에게 참다운 구원. 희망. 사랑. 평화 등을 보장하고, 타종교와 공존공영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로 혁신하게 하려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다. 즉, 이 책은 기독교의 근본인 사랑의 교훈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위반한 성직자들의 감추어져 왔던 죄악상을 파헤치고, 미래 인류사회를 위한 종교의 개혁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대개의 세계사와 기독교사는 '강자의 정의'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강자의 사고방식에 따라 기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역사의 기만', 혹은 '위선의 역사'를 '진실의 역사'로 탈바꿈시킴으로써 가려져 있던 기독교의 역사와 숨겨져 있던 예수의 참뜻을 확인하고 인류 구원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16세기 초에 천주교가 면죄부를 판매할 만큼 타락하였을 때 신부 마틴 루터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개혁에 나섰다. 그후 개신교 역시 오늘까지 약 400년간 성장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천주교 못지않게 타락한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그 타락의 일부를 독자들은 본서에서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기독교의 정체를 발견하고 인류와 기독교와 또 모든 종교의 나아갈 방향을 발견하게 되기 바란다. 본 저자는 성직에서 은퇴하고 80고개를 넘으면서 다음 나라로 가기 전에 꼭 하나 할 일은 이 일이라고 확신하고 순교의 정신으로..
(생략)

상권

제 1장 : 교회의 존재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
제 2장 : 기독교 세계 선교는 성령의 역사인가, 사탄의 역사인가?
제 3장 : 콜럼버스는 성자였는가, 악마였는가?
제 4장 : 십자군은 하나님의 군대였는가?
제 5장 : 로마 천주교의 존재는 인류 사회에 도움이 되었는가?

하권

제 6장 : 유럽의 천주교인들이 중남미를 침략한 후에 나타난 죄악상
제 7장 : 30년 전쟁
제 8장 : 장 칼뱅은 진정 개혁자였는가?
제 9장 : 두 얼굴을 가진 청교도들
제10장: 인류 구원의 종교

상 권

제 1장 : 교회의 존재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

1. 성직자들의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하는 교회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요 2:16 )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 눅 19:45 - 46 )

백범 김구선생은 "경찰서 열 개를 세우는 것보다는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
고 하였다. 백범의 말대로 교회는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지역 사회에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인가? 혹은 그와는 정반대로 지역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
가? 한국에 있는 48,000 개의 교회와 1,400 개의 성당, 그리고 전세계 방방곡곡에 산재하여 있는
약 220만 개의 성당과 교회는 약 20억 가까운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이렇게 많은 교회와, 인적.물적 조건을 갖춘 강력한 기독교라는 집단이 인류 사회에 얼마나 크고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가? 무수한 교회가 있기 때문에 살기 어려운 세상이 구원의 낙원으로 변화
되어 가고 있는가? 혹은 병든 세상이 치유되고 있는가? 그리고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과연 망할 세상을 망하지 않을 세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동시에 대립된 인류 사회를 서로
사랑하고 도우는 화목한 사회로 통일되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독선과 차별을
제도화하고, 분열과 대립 분쟁을 장려하며 격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등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생략)

1996년 7월 6일자 크리스챤 라이프지 제 129호에는 서울의 어떤 한 빌딩에 교회 간판이 15개나
걸려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는 교회가 장터로 변하고 있는 현상이다. 좀더 현실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상업화 혹은 성직자가 교회를 밥벌이하기 위한 장터로 만들고 있다는 주장
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세 교회가 함께 들어 있는 한 빌딩의 지하다방에서 어떤 노신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정중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요즘 목사질해서 밥벌이하려면 한 백 명만 끌어오면 되지요. 만일 목사 생활비가
좀 부족해봐요? 거, 말라기서를 펴들고 한바탕 야단하면 모두 벌벌 떨며 십일존가,
뭔가를 바칠 것 아니오? 목사란 성경만 들고 다니면 밥벌이하긴 편리한 직업이오.."


한국 교회 100주년 종합조사연구보고서 ( 1982년 ) 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지출예산 (전체예산)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교회 건물 관리비 24.2%
2. 성직자 생활비 38.5%
3. 교육 사업비 16.8%
4. 상회비 5%
5. 선교 사업비 15.5%

이 조사 결과는 성직자의 생활비가 총 예산의 약 4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교회가 성직자들의 구멍가게라는 비난의 소리도 웃어 넘길 일만은 아니다.
성직자의 생활수준에 대하여 신도들에게 물은 설문에서 30%가 '사치스럽다'고 답하였다
한다. 이는 성직자가 신도들이 바친 헌금으로 사치스러운 삶을 즐기며 신도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편안한 삶을 누린 적이 있었던가?

2. 교회는 죄인을 만드는 곳인가?

교회라는 구조 안에 살기 위해서는 모두가 위선과 기만으로 가장하는 죄인이 되어야만 한다.
이는 비단 성직자뿐만 아니라 장로. 권사. 집사도 신도들 앞에서 위선을 행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을 모범적인 신도로 혹은 일종의 성자로 가장하려는 기만과 위선의 죄이다.
 
교회는 의도적이든 혹은 비의도적이든 신도들이 기쁨과 화평과 희망 속에서 살아가게 하기
보다는 도리어 죄의식을 심어주고 죄인으로서 불안하게 살게 하는 데 주력하여 온 것 같다.
그 증거의 하나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목이 터지도록 죄를 회개하며 통곡하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인간의 면죄를 위해서는 그런 기도가 필요하다고 누군가가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통성기도 시간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기도를 할 때는 대체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 이나 혹은 '부족한 종, 이 죄인' 등으로
시작한다. 즉 신도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그리고 노예로 스스로를 격하시키고 있다.
예수는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 (요 15:15) 라고 하였다.

부흥회가 열리면 그때는 교회가 신도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드는 '즉석 죄인 대량 생산공장'
으로 변한다. 부흥강사는 성경을 펴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도들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
해 어깨에 힘을 주고 목에 핏줄을 세운다. 그때 사용되는 주무기들은 물론 하나님의 이름과
뜻이라고 은근히 공갈 협박으로 위협한다. 이 공갈 협박에 넘어간 순진한 신도들은 스스로를
천하에 없는 대죄인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통성기도 시간이 되면 신도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신도들은 그들의 죄의식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그만치 은혜가 넘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같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죄를 사하는
곳이 아니라 죄인을 만드는 곳으로 변모했다.


3. 통성기도 시간은 위선과 기만의 연습시간인가?

통성기도 시간만 되면 모든 신도들은 큰소리로 "주여!"를 세 번쯤 외치고 나서 교회가 떠나갈
듯한 통곡의 기도를 올린다. 가슴을 치는 자, 마룻바닥을 구르는 자,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자,
두 팔을 들고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자, 모두 각양각색이다. 이때 교회는 온통 비통함이 넘
치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만다. 그런데 집사쯤 되고 보면 체면상으로라도 일반 교인들보다는
좀 더 두드러진 고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집사가 그렇게 톤을 올리게 되면 옆자리에 있던 권사는
체면상 집사보다는 일단 더 높은 고음을 발하며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쇼를 보일만도 하다.
장로는 말할 것도 없다. 최고조로 음을 올리고 마루가 꺼지도록 쿵쿵 소리도 내고, 그 동안
습득한 모든 쇼를 연출할 수 밖에 없다. 안 나오는 눈물도 뿌려야 하고 콧물.눈물로 뒤범벅 된
얼굴을 보여주어야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통성기도 후에 강사는 때를 놓칠세라 계획했던 헌금을 강요하는 때도 있는데, 신도들은 마치
교도관 앞에 선 죄인의 심정으로 강사가 불러대는 액수에 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구원과
은혜에 대한 감사헌금이 아니라 죄에 대한 벌금이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식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통성기도 그 어디에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는가? 통성기도는 기도의 참뜻과 원리에서 벗어난
과장되고 일그러진 형태의 제스처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변질되고 변형된 기도 형태를 만들어
놓고 천박한 군중심리까지 동원시켜 가면서 위선과 기만의 연습장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한
졸렬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리라고 믿고 있는가?

어떤 집의 자녀들이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불효
자식이라며 용서를 구하였다고 치자. 그러면 부모의 마음이 과연 기쁠 것인가? 365일동안 새벽마다
통곡을 해댄다면 부모의 마음을 도리어 괴롭히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까?

조물주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든 인간이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살고 번성하라고 지으시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그 조물주를 신봉한다는 기독교는 인류를 죄인으로 묶어 버리고 죄의식
속에서 매일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집단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4. 원죄는 있는가?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자가 혹 있을까 하여 기독교는 원죄까지 동원하였다.
원죄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후의 모든 인류도 아담의 후손인 까닭에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의 죄가 아닌
아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죄는 아무리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회개하여도 없어지지 않는 죄라고 한다. 기독교는
결국 그런 죄명으로 이 지구촌을 온통 종교적.정신적.심리적인 형무소로 만들 속셈이었는가?
기독교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날은 전 인류가 죄인이 되는 날이며, 결국 그날은 지구촌
의 형무소화가 완성되는 날이 되지 않겠는가?

1) 영혼 선재설

인간의 육체가 생기기 전에 벌써 영혼이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아 천상에 존재하고 있다가
지상에서 인간이 탄생할 때마다 그 육체안으로 하나씩 들어간다는 설 - 교부 오리켄의 주장

2) 영혼 창조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하나씩 창조하여 육체 속으로
넣어주신다는 설 - 펠라기우스의 주장

3) 영혼 유전설

인간의 영혼은 부모의 영혼에서 나온다는 설. 원죄를 제일 먼저 주장한 터툴리안과 후에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유전설에 입각한 원죄를 주장해 기독교의 교리로 만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전설에 입각하여 원죄를 인정하고 있지만, 창조설을 주장한 펠라기우스는
원죄는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였다. 누가 어떤 것을 주장하든 그것은 모두 개인의 학설이며
인위적인 결정에 불과하다. 학설에 따라 또 교부들의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교리이다. 그런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주장을 절대화하여 전 인류를 영원토록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얼마나 무지하고 잔인한 죄악인가?
 
제2계명에 의하면 아비의 죄는 아들 3,4대까지만 이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죄가 원죄라는 명목으로 수천대 후손에까지 유전되고 있다는 궤변이 성립하
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이 계명보다 더 우월하고 강력한가? 칼벵의 주장이 계명을 무효
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원죄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원죄는 십자가의 보혈로 2000년 전에 벌써 무효화되지
않았는가? 2000년전에 없어진 죄가 지금 우리에게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주장은 보혈을 모독
하고 무효화시키려는 죄가 아닌가? 천주교에서 원죄는 세례를 받을 때 사함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세례는 보혈보다 더 강력한 것인가? 세례가 원죄를 사함 받는 상징은 될 수 있어도
사할 수는 없다. 오직 보혈만이 사할 수 있다.

또 원죄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 원죄는 노아 때 홍수로 인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창세기 6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이 크고 악함을 보시고 전 인류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노아의 자손들을 통해서 인간 재창조를 단행하셨다. 인간 재창조 과정에서 원죄가
적용되는 인간을 또 창조하셨겠는가?

원죄를 처음으로 주장한 자는 터툴리안이다. 그러므로 그보다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원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엘리샤도 그랬다. 그들이 원죄를 알지는
못했으나 그들에게도 물론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보혈의 공로를 입지 못하고
죽었으니 모두 멸망의 백성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5. 십일조와 공갈협박

십일조 제도는 모세의 율법으로 제정되어 유대교에서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지켜 내려오는
전통적인 제도 가운데 하나이다. 십일조를 받고 살던 제사장들과 레위족들은 성전봉사는
물론 국민교육을 책임지는 국가공무원의 역할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십일조는 국민이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의 일종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기독교
인들이 국민으로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그 위에 또 신도로서 교회에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본인이 자진하여 십일조를 바치든
십이조를 바치든 오직 본인의 자유이고 또 본인의 신앙과 재정 사정에 맡겨야 한다.

실제로 교회라는 기관은 재정없이는 운영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만일 어떤 성직자가 십일조
를 신앙생활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한다면 이는 일종의 공갈이며 강요이다.

예수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인류의 구원이 가능해졌으며, 모세의 옛 율법이
폐지되었고 새로운 언약이 성립되었다는것을 교회는 잘 알고 있다.

" 전에 있던 계명은 무력하고 무익했기 때문에 폐기되었읍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했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읍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 히 7:18-19 )

" 율법을 행함으로 살려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끊임없이 지키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 고 씌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 갈 3:10-11 )

위의 두 성경 구절에서 '율법은 폐지되었다' 고 하였으니 유대교인들이 아닌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금 모세의 옛 언약, 즉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의 새로운 복음의 언약 아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고 모세의 율법 600여개의 금지령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는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규정이 없다.

만일 기독교인이 아직도 율법아래 있다면 십일조는 물론 할례도 받아야 하고, 돼지고기는 먹을
수 없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은행 이자도 받아선 안되고, 형님이 자손 없이 타계하였을
때는 형수 방에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은 매년 적어도 세 번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제물을 바치고 레위인과 제사장을 통해 제사를 드려야 한다. 또 지금
처럼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없고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로 유대교의 모세 율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교로 탈바꿈되어 위의
율법을 엄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율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율법의 조항들은 다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서 모세 율법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십일조 하나만을 끄집어내어 그것만은 필수라고 강조하며 엄수하라고 하는 것인가? 그것은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폐지된 율법을 추종하는 것이며, 보혈을 무효화 혹은 약화시키는 처사가
아닌가? 한국 교회에서는 성직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을 펴들고 십일조를 강요하며 공갈
협박까지 해댄다. 십일조를 안바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까지 목에 힘줘 협박
한다. 천주교,루터교,성공회 등 대 교파에서는 십일조를 의무화하고 있지 않다. 저자도 목회할때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십일조 제도를 인정하였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회개하고 있다.

교회 주보에 헌금자의 명단까지 발표하는 교회도 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성직자가 헌금자의
명단을 하나하나 호명하면 기립하여 성직자로부터 폭포수 같은 축복의 기도를 받기도 한다.
이는 헌금액수를 올리려는 고차원의 수단이다. 이때 여기에서 제외된 신도들은 말없는 간접
협박을 받고 죄책감과 수치감 때문에 저자세가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주에는 자기 이름도
올라가게 하려고 무리한 헌금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인가?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한 체면 유지금인가? 혹은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한 위안금인가? 또는
성직자의 협박에 굴해 마지못해 바치는 과태료인가?

그러한 헌금은 하나님과는 무관하다. 그러면 그는 결국 하나님 앞에 헌금 없는 신도가 되어버린다.
특히 악덕 성직자 중에는 신도들을 한 사람씩 자기 사무실에 불러놓고 직접 십일조를 강요하는
자도 있다. 십일조도 부족한 듯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까지 등장시켜 착취에 여념이 없다. 이러한
행동은 보이지 않는 칼을 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도 짓을 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지금 교회에서는 신의 이름을 팔아 십일조를 거두어서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다.

교회를 운영하려면 예산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헌금이 그 중요한 재원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재원 확보 때문에 신도들에게 고민과 압박감을 주는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곧 예수의 가르침에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 내에서의 지위와 대우가 신앙이나 인격과는 관계없이 헌금 액수와 직접 관련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돈으로 환산될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면 그 교회는 이미 타락한
교회이다.

6. 교회는 신도들을 보이지 않는 쇠사슬로 묶어 구속하는 곳인가?

많은 성직자들은 교회를 사유화하고 자기의 권위를 유지하며 교회를 운영하는 수단으로 신도들에게
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강요한다. 십일조,순종,충성,전도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을 펴들고 복음 전파라는 미명하에 강요된다. 성직자 편에서 볼 때, 어떤 신도가 십일조
를 바치고 교회생활에 말없이 순종하며 맡은 직분에 충성하며 새 교인을 많이 인도해 온다면 세상에
그렇게 좋은 신도는 없을 것이다. 특히 유능한 유명인사를 인도해 왔을 때 그는 교회의 보배와 같은
존재가 된다.

( 생략 )

천주교의 쇠사슬은 더욱 강력하다. 교회가 부부 생활의 침실까지 지배한다. 산아 제한, 피임약 및
피임기구 사용 금지 등 이불 속까지 철저히 관장한다. 결혼, 이혼 금지, 혼인 무효도 교회가 관장한다.
사실은 지배나 통솔이 아니고 구속,감시이다. 즉 인간의 탄생전부터 시작하여 사후 저 세상까지
지배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평생 사는 동안에 매월 고해성사를 의무화해야 한다. 즉 이것은
생활 보고이다. 이것은 교회가 성도라는 미명하에 신도들을 보이지 않는 쇠사슬로 꽁꽁 묶어 놓고
통제하는 정신적인 노예제도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 생략 )

교회가 투자한 자본이란, 성경을 들고 '축복' '구원' '사죄' '사랑' 등의 몇가지 미끼를 던진 것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소액의 투자로 대 수익을 올리는 기관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최대의
무기는 성경을 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거대해진 재벌 교회는 얼마나
많은가? 또 그런 교회를 부러워 하는 성직자는 얼마나 많은가?

( 생략 )

7. 신앙은 생활화되었는가?

1996년도에 한국을 방문하였던 하버드대학 교수 하비 콕스는 8월 24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그가 몸담고 있는 그 사회, 그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질적 향상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 안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며, 교회의 역할은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즉 한국교회는 사회참여가 부족하다는 질책이다. 이것이 그가 한국교회를 보고 느낀 소감이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시려고 읽으신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가 누가복음
4장 18절이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음미하면 우리는 사회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엿볼수 있다. 교회는 자기의 구원과 축복
만으로 만족하는 곳이 아니다. 만일 교회가 그런 것만으로 사명을 다한 줄 알고 만족한다면 그런
교회는 그 사회에서 쓸모 없는 교회, 끼리 끼리들만이 모이는, 빛이 없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
하고 말 것이다.

저자는 수년 전에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거주하는 교포에게 공적으로 전해야 할 중요한 메시지
가 있었다. 그러나 그 교포는 전화가 없었으므로 근처의 한 한국인 목사에게 전화하여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목사는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습니다" 라는 한 마디
말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런 목사의 교회는 이기 집단으로써 사회 분열의 요인이 되어 사회악의
거점이 될 뿐이다.

198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하는데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된 죄수 중의 25%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가 있는가? 예수의 정신은 말뿐이고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십일조를 바치고 새벽기도회에 나가 가슴을 치고 통곡만 하는
곳인가? 그런 교회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한국일보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일반 불신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기독교인은 더 애국적인가? - 아니다
기독교인은 더 양심적인가? - 아니다
교회가 더 많아지기를 원하는가? - 아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이 바라보는 기독교의 인상이며 번지수이다.
교회는 믿음과 정의와 건전한 인간 생활과, 사회 번영과 향상의 길을 안내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즉 신앙생활이란 교회안에서 습득한 진리와 정의의 교훈을 교회 밖에서 실천하는 생활이다.
교회가 그러한 행함이 없는 집단이라면 사회와 인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8. 타락한 성직자들

예수는 시골의 무명 청년이었으나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저명인사로 행세하며, 예수는 낮아지라고
하였으나 그들은 높아지려고 한다. 이런 것을 적 그리스도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들의 교회를 예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악용되는 성경에서 진리를 찾고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무덤으로 만들어 놓고 입장권을 팔아 먹는 묘지기와 같은
자들이다. 이러한 교회는 세상에 존재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 신도들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와
같기 때문이다.

( 생략 )

목회자 200명을 대상으로 크리스천 리서치가 설문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교회가 극복해야 할 당면 과제는?

1. 목회자의 자질 - 89.9%
2. 물량주의 - 66.8%
3. 교단 분열 - 52.3%

둘째, 한국 교회가 시급히 고쳐야 할 문제점은?

1. 신앙과 생활의 차이 - 71.6%
2. 목회자의 자질 - 67.5%
3. 물량주의 - 51.8%

1994년 신학대학원생 456명을 설문한 통계는 다음과 같다.

기존의 교회상은?

1. 교회의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교세 확장에 더 관심하고 있다 - 88.4%
2. 교회가 삶의 의미를 제시해 주지 못한다. - 60%
3. 교회가 지나치게 헌금을 강요한다 - 60%
4. 교회 수가 너무 많다 53.6%

위의 통계를 단적으로 설명하면 교회수는 너무 많고,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하고 있으며, 교회는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원인은 교역자의 자질 부족에서
왔다는 결론이다. 문제는 교역자의 자질은 앞으로 더욱 저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수백개의 알쏭달쏭한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그 수많은 교역자의 자질을 점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 2장 기독교 세계 선교는 성령의 역사인가, 사탄의 역사인가?

1. 기독교는 선교지의 전통 문화와 고유 종교의 말살을 중지하라

세계의 모든 민족이나 종족들은 각기 그 나름대로의 윤리.행복.구원 및 축복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기독교보다 더 오랜 역사와, 더 깊고 더 고차원적인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불교,힌두교,유교 등이 기독교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동양의 종교와 정신문화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예배의 형식이나 구원관이나 윤리관이
기독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고유성과 독자성을 무시하고 강제로 기독교적인 것으로 대체하려 한 것
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이는 마치 유대인에게 기독교나 회교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만이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 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야 한다. 어떤 종교가 우월감과 독점욕에 사로잡혀 타종교를 무시하고 정복하는 것은 침략행위이다.
영토나 재산을 약탈하는 것보다 타종교의 신앙을 부인하고 말살하려는 행위는 더 큰 죄악이다.

그러한 강제적인 정복의 심각성은 너무나 크다. 왜냐하면 그 정복은 사회적으로 대립과 분쟁을
조장하고 결국 종교전, 즉 성전의 원인이 되어 인류를 고통과 신음속으로 이끌고 가는 끝없는 죄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무지한 기독교의 선교운동과 세계 정복욕 때문에 지구촌은 실로
인류의 종말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하고 남의 것은 부정하면 피차의 공존은 불가능해진다.

(생략)


2.기독교 선교는 그 선교지 주민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는가, 불행을 가져다주었는가?

(생략)

예수는 왜 십자가에 달렸는가? 그것은 당시 기성 종교의 독선과 배타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 때문에 말살당한 민족과 인종과 문화가 얼마나 많은지를 헤아려보면 오히려 기독교 자체가
예수를 죽인 그 유대교보다 더 심한 독선과 배타성을, 그리고 타종교를 부정하는 전통을 이어받은
것 같다. 빌리 그레험 목사는 기독교의 신앙 없이는 행복이나 구원도 없다고 세계 도처에서 수없이
단언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건설한 미국 땅에서 원주민들은 지금도 사회 밑바닥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가 들어간 곳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진실로 고통과 죽음과 박해를 뜻하는 종교였다.

3. 기독교 세계 선교의 전망

(생략)

기독교의 본질 자체는 '예수의 사랑'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사랑'
의 정신과는 상반된 '증오'와 '탐욕'이다. 이는 전달과정에서 빚어진 일부 타락한 성직자들 때문
이다. 그러나 이를 일부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 일부가 기독교를 좌지우지 했기 때문이다.
(생략)

제 3장 콜럼버스는 성자였는가, 악마였는가?

(생략)

콜럼버스 일행이 서인도제도 일대를 발견하고 탐험한 후, 제 2차 항해 때부터 비인도적인 만행은
시작되었다. 몇 가지만 실례를 들겠다.
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5개의 왕국이 있었던 시대의 실화이다.

1. 마리엔 왕국의 최후

콜럼버스 일행이 이 섬에 처음으로 도착하였을 때, 원주민(마리엔 왕국)들은 신기한 배와 이상한
사람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줄 알고 전원을 초대하여 성대한 환영 만찬을 베풀어주었다.
또한 콜럼버스가 타고 온 배가 한 척이 파선되었을 때도 온 국민이 나서서 구조하는 일을 도와
주었을 뿐 아니라 필요한 재료를 모두 제공하고 배수리까지 도와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콜럼
버스 일행은 죽음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Lequnne, op.cit., p 170)

그러나 콜럼버스 일행이었던 천주교인들은 은인들을 배은망덕으로 보답하였다. 며칠 후에 안정을
되찾은 그들은 원주민들의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악마로 돌변하였다. 그들은 원주민 촌을 포위,
기습공격으로 순식간에 거의 전 주민을 살해하고 그들의 왕국을 점령해버렸다. 그들에게 아낌없는
도움을 베풀었던 왕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남은 사람들과 함께 숲속으로 피난가야만 했다. 진실로
배은망덕하고 교활하고 비인간적이며, 사악한 학살 행위였다. 이것이 콜럼버스가 인솔하고 온
천주교인들이 그들이 발견한 섬들에서 일으킨 천인공노할 만행의 시작이었다. (Ibid)

2. 하라과 왕국의 비화

도미니카 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왕국으로 비옥한 땅과 가장 발달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콜럼버스 일행 (천주교도들) 이 처음 이나라에 왔을 때 낯선 손님에게 베푼 호의와 또 콜럼버스
일행을 수차 죽을 위기에서 구하여준 이야기는 많다. (Ibid., pp.171-172 참조)

그런데 여기서도 콜럼버스 일행은 그들의 고마움을 배은망덕으로 갚았다. 60여명의 기병과 3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일시에 그들을 불로 태워 죽였다. 그들의 계략은 먼저 그 나라의 유력자,
귀족들 300여 명을 은혜를 갚는다는 구실로 만찬에 초청하여 몇 채의 가옥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일시에 불을 놓아 태워 죽였다. 불을 피하여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귀족들은 사전에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으로 찔러 죽였다. 도망가다 넘어진 어린애는 칼로 다리를 잘라 버렸다. (Ibid.,
P173).
 
여왕은 경의를 표시한다며 총이나 칼을 사용하지 않고 목매달아 죽였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국민들은 카누를 타고 다른 무인도로 도피해야 했다. 그러나 콜럼버스 일행의 천주교도
지휘관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사로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악마가 바로 그들이었다. 많은 원주민을 잡아 노예로 혹사한 콜럼버스는 다음과
같은 구실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원주민들은 잔인하고 욕심이 많고 타락한 영혼이기에
이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시켜야 구원의 백성이 될수 있다. 그 방법으로 노예들을 합숙시켜
남자들은 금을 채굴시키려고 광산으로 보냈고, 부녀자들은 땅을 개척하여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노예부부가 함께 거하면 아기의 출산으로 노동력이 저하될 것을 우려하여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의 식사는 잡초였다. 그들은 동물로 취급되었는데, 아이가 태어나 산모의 영양부족
으로 젖이 나오지 않아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Ibid)

이러한 콜럼버스에게 신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일에 '성자'라는 칭호를 주자고 교황에게 청원서
를 보냈다니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하고 아이러니한가? 신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제로 전세계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을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울분은 얼마나 격화되었을까? 콜럼버스의
도착은 원주민들에게는 악마의 도착이었고, 멸망의 서곡이었다. 잔존한 원주민들은 생활 면에서
지금도 노예 상태와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발견' 이라는 말을 극구 반대
한다. 그것은 '도착'이었을 뿐 '발견'이 아니다. 그들이 이미 수만 년 전부터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타당한 주장이다.

콜럼버스가 4차에 걸쳐서 개척한 침략수로를 뒤따른 천주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량한 원주민
들을 약탈.강간.학살하였으며, 그들의 조상을 모시던 산소와 성지는 물론 국토 전체를 유린했다. 그뿐
만 아니라 그들은 원주민들의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고 원주민 말살작전을 전개하였다. 살아남은
원주민들 가운데 건장한 사람들을 생포하여 노예로 팔아 돈을 번 콜럼버스와 뒤를 따른 기독교인
들이 자행한 침략을 인류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 것인가? 역사는 왜 이 심판을 게을리 하고 있는가?
면역성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처음에 전달한 가장 살인적인 선물은 천연두. 홍역.매독
같은 전염병이었다. 수백 만의 원주민들이 기독교인들이 옮긴 전염병에 걸려 전멸하다시피 멸종되
고 말았다는 기록을 기독교인 자신들이 남겨놓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천주교인들이 처음에 도착하였을 때 중남미 원주민 인구는 약 2,500만이었는데, 침략이 시작된
후 약 100년 동안에 그 인구가100만으로 줄었다는 백인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stannard,D.E.,
American Holocaust, 1992, p. 11.. pp. 85-86 참조)

복음 전파와 선교라는 신성한 목적을 가지고 온 천주교도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예수의 교훈이나
계명도 아랑곳없이 목전에 보이는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살인단체로 변모하였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살작전을 강행하였다. 이렇게 무고한 원주민들을 살해하고서도 고해성사만
하면 모든 죄는 흰눈처럼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

요약하면 콜럼버스가 시작한 중남미 침략은 그 후 천주교 세력의 중남미 침략과 지배를 확고하게
하는 선도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천주교라는 종교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그들이 생각
하는 미개지에 식민지를 확장하는 일에 예수의 이름과 복음 전파라는 미명으로 가장하고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침략자들은 자기들의 침략행위를 개척과 발전이라는 미명과
기독교 선교라는 명목으로 자화자찬하면서 약 350년 동안에 유럽의 네 배가 넘는 광대한 땅과
자원을 빼앗고, 1억 2천만의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북중남미를 정복하고 말았다. (Sannard,
op.cit,p.151)

1500년도 초기에 유럽에서 온 천주교인들은 남미 페루지방 일대에서 840 - 1,35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다. 그것은 그 지방 인구의 94%였다. (Ibid.,p.87)
또 그들은 16세기 중에 중남미에서 6,000 - 8,000만의 원주민을 학살하였고 그 학살은 계속되었다.
(Ibid.,p.95.151.305.317 참조)

저자가 원주민 촌을 방문하였을 때에 반드시 복수하러 올 조상의 영혼과 정의의 천사인 우주인이
기다려진다는 그들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제 4장 십자군은 하나님의 군대였는가?

(생략)

당시의 십자군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대의 군대처럼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현지조달 방식으로 연명하면서 전투에 임했다. 노자가 떨어지면 그들은 약탈자.강도
등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고, 행군이 길어지면서 십자군의 행패는 점차 추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약탈이나 강도 행각을 벌였으나 그들은 점차 살인등의 중범죄를 저지르는 악랄
한 폭력배 집단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부녀자 성폭행을 일삼았고, 세탁부라는 명칭
하에 위안부까지 강제로 동반하면서 행군하였다. 이와 같이 무차별 살인,강간.강도의 집단이 된
십자군이 가는 곳마다 그 지방 일대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성지 탈환'이라는 성스
러운 목표 때문에 잔인한 행동도 정당화,이상화되어 그들은 양심의 가책이나 신앙상의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특히 이교도들을 죽이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하나님께서 십자군에게 주신
특권이요, 축복으로 믿었다. 이미 출정할 때에 교황이 허락한 특권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교황에게 사전허가를 받은 무장강도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하는 도중에 시리아 지방의 안티옥을 점령하고 그 남쪽에 위치
한 마랏 안뉴맨 성을 점령하였을 때에 일어난 일이다. 십자군은 성벽을 넘어 성내로 진입한 후,
가가호호에 들어가서 값있는 물건이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무엇이든지 약탈하였으며, 남녀노소
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죽이는 전멸작전을 폈다. 성내는 어디를 가나 회교도들의 시체가
산적했으며 그 시체를 밟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십자군의 악명을 듣고 있던 주민들은
안전지대로 인정되었던 궁궐로 피했으나 십자군은 거기까지 쫓아가 주민들의 재산들을 약탈한
후에 살해하였고 노예로 팔 수 있는 주민들을 납치하여 안티옥 노예시장에서 매각하였다 ( Tate,
op.cit.,p.139)

(생략)

십자군이 예루살렘 탈환작전 때 종군하였던 프랑스의 한 성직자가 쓴 수기의 일부가 그 잔인한
학살 후의 아수라장이 된 장면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성전이나 회랑은 물론이요, 말 탄 기사가
잡은 고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모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
혀졌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찬양할
만하다'

이것이 사랑과 자비의 희생정신으로 충만한 복음을 전파한다는 성직자의 수기이다.
회교도들이 천주교도들인 이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사수하는 것은 알라신을 위해 싸우는
성전이었다. 또 천주교도들이 회교도들인 이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탈환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성전이었다. 이 '성전'이란 미명하에 두 종교는 서슴지 않고 피차의 교리인
사랑과 살인금지의 계명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약 200년 동안이나 피비린내나는 살상을 계속
했다.

당시 십자군의 출정을 역설하였던 성 버나드 의 설교를 살펴보자.

"그리스도의 전투사로서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싸우기를 바란다. 적을 살해하였다고 죄책감을 갖거나 혹은 자신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죽이든지 죽임을 당하든지 어떤 죽음도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은 전혀 죄에 더럽힘이 없는 아주 명예스런 죽음이다. 적을 죽이는 것은 주님께
쓰임받는 행동이며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주님 곁으로 가기 위한 행동이다.... (중략)
악인을 처형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고 말하자면 악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주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일이다... (중략)

죄를 범한 자들, 예루살렘에 있는 셀수 없이 많은 천주교인들의 재산을 훔치려고 하는 자들,
성지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성역을 가로채려는 자들, 이런 놈들은 성도에서 저 멀리로 격퇴
해 버려야 한다. 우리 하나님의 믿음, 즉 천주교 신앙에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절멸하기
위하여 천주교의 두 개의 칼, 즉 '교황의 영적 지배권과 세속권' 을 원수들 머리 위에 뒤흔들
어야 한다. 이교도들 입에서 '천주교의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

십자군은 위와 같은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잔인무도한 살인 집단으로 변하게
되었다. 인간이 주도하는 종교전의 참상과 잔인성을 뒷받침하는 철학이다.
(생략)

결과적으로 십자군은 다음과 같은 죄악을 범하고 종결되었다.

첫째, 십자군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한 교황들의 거짓
증언에 의하여 동원된 군대였다

둘째, 천주교의 독선 배타성이 발휘되어 회교라는 타종교를 적대시하여 회교도들을 살상한 죄를
범하였다.

셋째, 인종을 차별하였다.
넷째, 타종교의 신앙과 자유를 침범하였다.
다섯째, 교황의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십자군이 범한 모든 죄악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일이라고 믿는 잘못된 신앙을 육성하였다.

만일 기독교가 성전을 주장할 수 있다면 다른 종교들, 특히 회교나 유대교는 물론 힌두교나 불교도
성전을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 현대판의 실례를 보스니아에서 보고 있다. 모든 종교가 다같이
성전은 옳은 것이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하여 다같이 출전하여 그 정당성
을 주장하면서 이교도들을 서로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한다면 수많은 종교가 있는 이 지구촌에
과연 진정한 평화가 실현될 수 있을까?

우리는 타종교인을 말살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말살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예수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종교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타인종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은가?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고 고집할 수 있을까?

저자는 미래 인류와 평화 정착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제안한다.

1.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은 종교 간의 대립과 분쟁을 영원히 제거하고 모든 종교인들의 신앙과
생존을 보장하기 위하여 세계종교협의회를 제도화할 것

2. 세계의 모든 종교는 자기 종교만이 절대이고 또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는 독선과 배타적인
교리를 버리거나 혹은 수정하고 모든 종교가 서로 공존공영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할 것

3. 모든 나라, 모든 종교, 모든 종파는 성전이란 미명하에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종교전쟁도
무조건 불법화하고 반대하는 법적 제도를 확립할 것

4. 핵무기.생화학무기와 레이저 등 기타 인류를 전멸할 수 있는 살인무기의 제조.판매.소유.
운반을 불법화하고 폐기처분할 것

5. 세계의 모든 종교는 다 함께 인류의 미래와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구체적인 공동목표를 설정
할 것

제 5장 로마 천주교의 존재는 로마 사회에 도움이 되었는가?

1. 면죄부의 타락상

1) 면죄부

면죄부 판매 책임자인 수도사이며 웅변가였던 요한 텟젤은 막대한 수입을 올리려고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그는 면죄부가 하나님의 고마우신 선물이라고 선양했다.

"지금은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권세를 받은 교회가 천국과 지옥문을 열어 놓았다.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과거.현재.미래의 죄가 이 자리에서 곧 사함을 받을 것이요, 회개의 필요없이 현재
살아 있는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나 또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이 표를 사면 그 돈이 헌금 궤
속에 쩔렁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곧 천국으로 올라 갈 것이다." (Walker.W.,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3rd., 류형기 역, 1979, p.369)

이 설교를 들은 순박한 신도들은 이 사기꾼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믿고 하나님을 친히
맞이하는 심정으로 환영하고 다투어가며 가산을 팔아 자기의 죄를 위하여 또 사랑하는 자녀, 친척의
죄를 위하여 면죄부를 사려고 장터를 이루었다. 면죄부 판매로 사제들의 재산은 증가하였다.

그들의 화려한 저택과 사치스런 식탁은 백성들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건이 생기기 약 백년
전에 이미 영국의 존 위클리프는 그 당시의 천주교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 로마의 사제들은 질병처럼 우리를 좀 먹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백성들은 멸망할 것이다." ( White.E,g., Great Controversy )

이와 같이 당시의 로마 천주교회는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어 백성들을 괴롭히고 빈곤과 멸망으로
끌고 가는 집단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이런 악한 짓을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했던 것이다.
천주교는 면죄부에 대하여 이제 더 구구한 변명을 중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한 변명은
하면 할수록 더 큰 눈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참고로 루터의 95개 조항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만을 소개한다.

5번 : 교황은 자기 교회가 만든 법을 범한 죄 이외엔 아무의 죄도 사면할 의지도, 권한도 없다.
10번 : 신부가 사망자의 연옥 고를 사죄로 면케 한다는 것은 못된 짓이요, 무식에서 나온 소치이다.
87번 :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사죄 받은 사람을 어찌 교황이 또 사죄할 수 있단 말인가?
90번 : 신도들이 질문하면 설명하지 못하고 어찌 폭력으로만 나가는가? 교회는 원수들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다. ( 당시 심각하게 교리에 관해 질문하면 모독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므로 질문도 못하였다. 후에 개신교도 이단이란 명목으로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냈다.)

2). 종교의 상업화

(생략)
성직자들이 필요에 따라 개인의 생각이나 해석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하도록 신도들을 유도하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자기 개인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가장하여 신도들을 오도하는 것은 죄악
이며, 진실과 영리 추구를 위한 수단방법으로 하는 비양심적인 종교인들의 기만행위이다.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데 영생불사를 약속하고 또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돈을 가로채거나 재산을 갈취하는 종교가 얼마나 많았던가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토인비는 왜 기독교를 암적인 존재라고 하였는가? 그가 지적한 암이란 순한 양과 같은 신도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포로로 만들어 놓고 그들을 종신토록 끌고 다니면서 하나의 국가처럼
정기적으로 재산, 즉 세금까지 헌납하게 하는 것을 의무화할 수 있는 기술과 조직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진리와 진실을 보지 못하게 인간을 마취시키는 암세포와 같은 요소를
기독교 안에서 발견한 것인가? 또는 지구를 분할하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전세계를 독점지배하기
위하여 전쟁으로 끌고 가는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의 호전성이 인간사회에 대립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현실을 암적인 존재로 본 것일까?

3).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는 성직자들의 죄악

(생략)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자신을 위해 행동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판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과 뜻으로 미화하는 습성은 종교가 인류에게 범하는 가장 큰 죄악이다.
이러한 문제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종교악은, 소수의 이기적이며 타락하고 또 위선적인 종교인
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뜻과 이름을 수시로 들고 나오는 독단적인 사기성이
그 근본 원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사리사욕을 추구한다는
것뿐이다.

2. 천주교는 개신교나 타종교와 공존공영할 수 있는가?

천주교 교리문답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문 : 천주교 밖에 구원이 있는가?
답 : 천주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
문 : 천주교 밖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답 : 천주교 밖에 있는 사람은 영세를 받지 않은 비신자들과 천주교의 교리를 일부러 믿지 않는
열교인들과 천주교의 최상 통치권을 배척하는 이교도들과 파문받은 자들이다.

천주교의 교리문답서를 보면 구원은 오직 천주교에만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와는
물론 타종교와 공존공영할 수 없는 종교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10억의 신도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종교, 천주교는 말끝마다 '인류 구원' 이란 대 목표를 외치고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과거에 인류를 전쟁과 종교재판으로 괴롭힌 조직체였다. 사랑이란 간판을 내걸고 뒤로는 잔인
무도한 침략과 살상을 자행한 사실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천주교의 모든 추기경과 주교들이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는 이렇게 한다.

" 나는 교황과 그 후계자에 대하여 이단과 분열과 반역을 일으키는 자에게는 최선을 다하여
반대하고 박해하겠나이다. " (White, 천세원 편 하, op.cit., p.406)

천주교편에서 볼 때 개신교는 이단이고 또 분열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충성 맹세에는
개신교를 포함한 모든 이단들을 반대하고 박해하겠다는 뜻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

세인트 루이스 대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 이단과 불신은 죄악이다. 천주교가 그 국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크리스트교 국가
에 있어서 이단과 불신은 다른 범죄와 같이 처벌될 것이다 " (Ibid., p.405)

이단과 불신에 개신교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개신교도는 천주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 범죄자와 동일한다는 주장이었다. 즉 개신교도는 곧 범죄자란 뜻이다. 그러므로 만일 천주교
가 중세기처럼 막강한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개신교는 물론 타종교도 무력으로 잔인무도하게
박해를 가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측하는 식자도 있다.

그러던 천주교도 세계종교 정세를 관찰하고 타종교와의 공존을 위한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한
증거가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다.
(생략)

3. 교황은 진정 베드로의 계승자인가?

1) 베드로가 받은 세 가지 특권은 유효한가?

제 1대 교황 베드로부터 지금까지 로마 천주교는 2000년 현재 264대의 교황체제를 이어왔다고 자부
하고 있다. 교황 영도하에서 약 2,000년동안 '하나의 교회'를 유지하고 있는 교황체제는 실로 천주교
조직의 핵심으로, 교황은 그 통치자이며 또 국가 원수이기도 하다.

그 교황체제를 뒷받침하는 교리의 근거는 '마태복음' 16장 13-20절에 있다 (그 밖에 막 8:27-30, 눅
9:18-21, 마 18:18-18 등을 참조)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며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마태복음' 16:5-23

베드로의 고백 (16절) 을 들은 예수는 만족하신 듯 그에게 세 가지 특권을 주셨다. 첫째는 베드로라는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는 권리 (18절) , 둘째는 천국의 열쇠 (19절), 셋째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푸는 특권 (19절) 이었다.

베드로가 받은 이 세 가지 특권은 제2대 교황에게로 전승되었고 또 2대는 3대에게로, 3대는 4대 교황
에게로 각각 전승되어 현재의 263대 교황에게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세 가지 특권을
받은 교황은 그 특권을 자기만 갖지 않고 각국의 주교들에게 전승하여 주었고, 다시 주교들은 자기
수하에 있는 모든 신부들에게 전승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부는 베드로가 받은 세 가지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특권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부가 고해성사에서 신도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논리에서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마가복음' 8장 27-33절과 '누가복음'9장 18-21절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사건에 대하여 세 복음서는 각기 달리 표현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하여 예수의 칭찬(16:17-19)과 책망(16:22-23)이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
에는 예수의 책망만 있고 칭찬은 없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칭찬도 책망도 없다.

또 '마태복음' 16장 17-19절은 베드로가 받은 특권을 기록한 핵심부가 되는 중요한 부분인데, '마태
복음'에만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다. '마태복음' 16장 13-18절까지는 자연스럽고 친근
한 대화로 엮어졌으나, 19절은 예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초대교회에서 베드로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후일 누군가가 삽입했다고 뜨루 대학 신학교수 데이비스는 주장하고 있다. (Abingdon Bible
Comm entary, 1930)

그러므로 교황이 베드로의 세 가지 특권을 전승받았다는 것은 성서적 근거가 희박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그 이유를 열거한다.

첫째,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나오는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라는 말씀은 사람이 땅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의 정신(말씀)과 모순되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판단이나 심판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그때는 예수의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사람을 가르치시고,
감화시키고,병을 고치시고,사랑하셨으나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그것은 '요한
복음' 5장 30절과 8장 15-16절 등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도 사역할 수 없었던
그 높은 영역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실 리가 있었겠는가?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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