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럴까요?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비아냥거리는 이유가 왜 일까요? 믿음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현실이 과연 그런가요?
리플 대신 글 하나를 올립니다.
<‘바울’ 냄새가 진동하는 교회>
교회에서 오랫동안 ‘장로’로 시무하고 있는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반골’ 기질이 물씬한 내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나는 ‘바울’의 냄새가 진동하는 짤막한 그의 편지를 받고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느끼고 답답해졌다.
‘바울’의 냄새가 진동한다는 표현을 내가 썼지만, 장로는 아마도 내가 왜 그런 표현을 했는지 조차 모를 것이다. 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모든 장로들의 표준적인 수준이그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그의 글에는 예수가 없었다. 오직 ‘바울’의 히스테릭한 ‘믿음’ 주장만 있었다.
‘청소년 교인’과 ‘무지한 교인’들을 위해서 간단하고 알기 쉽게 ‘바울’의 냄새를 설명해 보겠다.
신앙생활 30년 된 ‘장로’들이 ‘바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기껏해야 성경에 있는 ‘고린도전서’와 같은 서신들과 사도행전의 기록들 뿐이다. 그가 천막 만드는 일을 했고, 기독교인을 잡으러 다녔고,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했고, 꿈에 예수를 만났고, 야고보와 대립했고 등등이다. 그의 글을 유심히 읽어보고 행간의 뜻을 살펴보며 깊이 있게 헤아려 본 장로는 거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
‘바울’은 ‘예수’의 말과 행적을 완전히 왜곡한 인물이다. ‘예수’를 이용하여 종교세력을 만들고 그 집단의 수장이 된 권력욕이 가득한 형편없는 인간이다. 원래 그는 인간성이 좋지 않았다.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이던 현장을 거들던 인물이었다. 기독교인을 잡으러 다니던 사람이었다. 어느날 꿈에서 예수를 만나고 회개했다면서 약간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야고보와 베드로는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를 두려워했고 그의 회심을 의심했다.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다음에 말하기로 하자.
‘바울’은 예수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게다가 4대 복음서를 읽어 본적도 들어 본적도 없다.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가복음’조차 바울이 죽을 무렵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예수 언행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기록했다는 13편의 서신과 그의 이야기가 절반인 ‘사도행전’의 어느 구석을 읽어 보아도 ‘바울’이 예수의 말을 인용한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예수의 말은 커녕, 예수의 핵심적인 사상을 언급한 것 조차 단 한구석도 없다. 과연 신앙생활 30년의 장로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장로나 교인들은 당연히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따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성경을 다시 읽어보라. 눈을 부릅뜨고 연필로 줄을 쳐가면서 읽어보라. ‘바울’은 예수의 말을 단 한줄도 인용한 적이 없다. 그는 예수를 만나보지 못했고, 그의 설교를 들어 보지도 못했으며, 예수의 핵심사상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는 과연 무슨 주장을 했는가 ? 도대체 ‘예수’는 무슨 말을 했기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니면서 그에게 매료 되었는가 ? ‘예수’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했다. 20쪽 정도의 예수의 언행기록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감탄할 만큼 매력적이고 산뜻한 표현으로 대중을 설득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쳐라’
단 한마디로 대중을 제압했다.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 단순한 말재주만 갖고 설교를 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대중들은 그것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예수’의 핵심은 이것이다.
1.‘사랑과 용서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2.‘회개하여 인간성을 회복하라. 그것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다’
3.‘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유를 주어라’
‘마태복음 5장’부터 있는 산상보훈의 예수 말은 우리가 쉽게 실천 할 수 있다. 사람이 행해야 할 도리를 모아 놓은 것이다.
‘나팔을 불며 자선하지 마라’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마라’
‘바울’은 이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바도 아는 바도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자기신학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것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것 뿐이다. ‘사도신경’에도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 있을뿐, 정작 중요한 예수의 가르침은 단 한마디도 없다. 오늘날 수억명의 교인들은 아무 맛도 없고 내용도 없는 ‘사도신경’을 예배 할 때 마다 기계처럼 읽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장로’가 과연 지구상에 몇 명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장로들이나 교인들은 지금이라도 사도신경을 다시 한번 곱씹으면서 읽어보길 바란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보기 바란다.
‘바울’의 핵심은 이것이다.
1.‘예수는 세상 사람의 원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죽었다. 이 공로는 대단하다. 우리가 이 공로를 인정해 주고 그 공로를 믿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의 공로를 믿어주기만 하면 별달리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일인가 ? ‘예수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 이것이 ‘대속신앙’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하세요 !‘ 하고 목사가 연신 소리치는 연유가 여기에 기인한다. 또한, 아무 의문도 필요없고 그저 막무가내로 믿으면 된다 하고 욱박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게 보내온 장로의 편지에, 내가 믿음이 약해서 그런 모양이다고 걱정하는 투의 말이 써 있었다. 이것은 예수의 말이 아니고 바울의 말이다.
2. 바울은 교회의 설립과 유지관리에 극단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의 편지 대부분이 그런 내용이다. 오늘날 교회는 ‘바울의 기독교’다. 예수의 말을 실천하는 교회가 아니라, 바울의 말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었다.
바울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위세가 커진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 야고보와 베드로에게 예수의 사도로서 자기를 인정해 주기 바라지만 처음에는 거절 당했다. 그의 가르침이 예수의 가르침과는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야보고는 인정해 줄 수 없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수장은 의인 ‘야고보’였다. 바울은 야고보를 두려워했다.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반했던 ‘마가’는 바울의 이상한 교리에 반발하여 그를 뿌리치고 떠나버렸다. 나중에는 ‘바나바’ 마저도 바울과 의견충돌을 일으키며 떠나버렸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서신에 썼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다. 바울을 떠난 후 ‘마가’는 원래의 예수말씀에 충실한 ‘마가복음’을 정리하여 편찬했다. 이러한 앞뒤 상황을 읽어보아도 우리는 ‘바울’의 독선적인 행태를 눈여겨 볼 수 있다. 과연 오늘날의 장로들이 이런 시각을 갖고 성경을 읽어본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럽다.
‘예수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최소투자의 최대수익 원칙은 많은 신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바울의 기독교는 급속히 세력이 커졌다. 마침내 그는 예루살렘의 인정을 받았다. 마치 이단의 ‘순복음교회’가 세력이 커지면서 기존 제도권교회의 인정을 받았듯이 바울은 세를 불린 후에 제도권 진입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큰소리 치기 시작했다. 베드로를 망신 주었음을 자랑했고, 자기가 예수와 직접 교신하고 있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의심나면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을 읽어보라. 바울의 목표는 자신의 교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저 이용물에 불과했다. 내가 바울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바울’의 생애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그는 재산이 많았다. 로마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지배세력과 친분이 있었고 로마인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신분 이었다.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에서 ‘아이젠만’은 바울이 야심을 가진 로마의 첩보원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캘빈이 ‘사해사본’을 읽었다면 지금 같은 교리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개독교’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세상의 온갖 사람들로부터 갖은 지탄을 받는 뿌리가 여기에 있다. 예수의 ‘사랑’은 간 곳 없고 바울의 ‘교회사랑’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교회헌금의 지출항목을 눈여겨 보자. 지출의 95%는 교회안의 ‘교회놀이’에 사용된다. 교회 밖 세상사람들의 구제에 사용되는 돈은 겨자씨 정도에 불과하고 인색하기 그지없다. 세상사람들은 교인들의 이런 행태에 분노하고 있지만, 신앙생활 30년 된 장로도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아전인수로 해석한다.
예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면 세상의 존경을 받는다. 최일도 밥퍼목사와 테레사 수녀가 칭친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교회 안에서 치대면서 그들만의 교회놀이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냥 놀아도 ‘믿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어쨌거나 ‘바울’이 베드로를 눌러 버리고 난 이후, 베드로와 야고보등 제자들은 성경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바울과는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 정신을 그들은 숭고하게 믿고 있었다. 또한 예수의 재림을 믿는 ‘재림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교파를 만들었다. 그것이 ‘기독교 영지주의’다. 이들은 예수의 사랑의 정신을 제일의 신념으로 갖고 있다. 기독교의 위세에 눌려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뿌리는 잔잔히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오늘날 형편없는 ‘바울’의 가르침이 더욱 기세를 떨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여기에는 ‘루터’와 ‘캘빈’이 큰 역할을 했다.
‘루터’는 바울이 쓴 로마서1장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을 맹종했다.
루터나 캘빈도 바울이 주장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는다는 논리를 펴나갔다. 이들도 예수의 말과 의도는 안중에 없었다.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예수의 말은 이들의 헛된 주장 속에서 또 한번 사라지고 말았다.
‘캘빈’은 바울의 ‘교회사랑’에서 한 발 더 나가서 ‘교회규칙’까지 만들어서 정교하게 교회와 교인을 요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교회규칙’은 오늘날 ‘장로교의 규칙’이 되었다. 술도 먹지 말라는 금욕주의까지 덤으로 추가했다. 예수도 포도주를 즐겼던 것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예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 남의 회당에서 거리에서 산에서 설교했을 뿐이다.
‘캘빈’도 바울처럼 냉혹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캘빈이 바울을 좋아한 이유는 서로 죽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캘빈은 한발 더 나아가 ‘구원이란 것은 선행한다고 얻어 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구제’가 맨 꼴찌에서 겨우 생색내기용으로 그치는 뿌리가 여기에 연유한다.
교인들에게 세상에 자선 좀 하라고 권유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교회에서 자선 많이 하거든요’
그들이 하는 자선은 교회안의 자기들끼리의 주고받는 자선에 불과하다. 장학금도 그들끼리 주고받고, 식당봉사도 자기들 밥 먹는 일 봉사하는 것이다. 몇번 나가는 ‘고아원봉사’는 교회홍보가 주목적이지 봉사가 목적은 아니다. ‘교회놀이’를 봉사라고 착각한다. 자기들 끼리는 후해도, 교회밖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바울과 캘빈이 만든 이러한 신앙이 영국과 미국을 거쳐 한국의 교회에 흘러 들어왔다.
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급격히 성장한 한국교회는 토속적인 미신인 기복신앙까지 첨가하여 오늘날 5만개의 교회로 확대 되었지만,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불쌍한 종교가 되고 말았다. 너무 많은 숫자로 인하여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는 추태를 보여주고 있다. 일요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떤 여인이 나에게 침례교회 이름이 적힌 일회용 휴지를 하나 건네 주었다.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 ‘예수 믿으면 오복을 천배만배 받는다’
원래 ‘복타령’은 한국의 무당 전용이었는데 목사 전용으로 바뀌고 말았다. 바울도 놀랐다.
교회 갈 때마다 나는 서글펐다. 신앙초기 새벽기도 백일 할 때, 나는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기도했다. 개신교의 본 모습을 전혀 몰랐다. 먼저 성서를 제대로 연구한 후에 신앙을 갖는 사람은 1%도 되지 않는다.
나는 교회 안에서 하루종일 치대면서 있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전도회를 탈퇴했다. 예수에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교제를 강조한 것은 ‘바울’ 이었다. ‘예수’는 골방에서 홀로 기도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냉혹하고 이기적인 ‘바울’과 ‘캘빈’의 얼굴이 아직까지 나를 덮치고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무슨 믿음을 갖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아무런 지식이 없는 30년 된 교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교회 다니다 보면, 한번씩 회의감이 옵니다’ 그것이 나의 긴 의문에 대한 간단한 답이다.
‘바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다.
‘이젠 내편이 워낙 많거든’
몇 년 전, 카톨릭 성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교구에 성당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신자가 늘어나면 북새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확장신축을 위해 헌금을 모았다. 어떻게 지을 것인가를 성당측은 신자들과 의논했다.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가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신자들을 인근의 성당으로 나누어서 분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모은 헌금은 정신박약아를 위한 병원 건물을 신축하기로 하고 돈을 좀 더 모아서 병원을 지었다. 신자들은 박수를 쳤다.
만약 개신교가 교회를 신축했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는 ‘교육관’ 신축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수련원’ 건축에 들어갈 것이고 더 나아가 ‘선교센터’를 짓는데 목표를 두었을 것이고 이후에는 ‘체인형태의 교회신축’에 나갔을 것이다. 바울의 방정식이다. 우리 목사는 ‘중고등학교’를 짓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수천만원씩 기부하던 장로는 결국 나가 떨어져 은퇴장로로 퇴진하여 위세가 약화 될 것이고, 새로운 시무장로가 넉넉한 헌금으로 ‘하급교인’들의 칭찬표를 받으며 자존감을 즐길 것이다.
‘성당 신축’ 보다는 ‘장애인 시설 건축’을 우선하는 결정을 보고, ‘예수’의 사랑과 희생 정신을 실천하는 카톨릭의 자세에 감탄했다. 면죄부사건 이후 카톨릭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변화해 왔다. 오늘날 카톨릭의 신자가 증가하고 개신교의 교인이 줄어드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글쎄요
단군, 세종대왕 께서 지옥행이라...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다만 마지막날에 각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비아냥거리는 이유가 왜 일까요?
믿음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현실이 과연 그런가요?
리플 대신 글 하나를 올립니다.
<‘바울’ 냄새가 진동하는 교회>
교회에서 오랫동안 ‘장로’로 시무하고 있는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반골’ 기질이 물씬한 내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나는 ‘바울’의 냄새가 진동하는 짤막한 그의 편지를 받고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느끼고 답답해졌다.
‘바울’의 냄새가 진동한다는 표현을 내가 썼지만, 장로는 아마도 내가 왜 그런 표현을 했는지 조차 모를 것이다. 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모든 장로들의 표준적인 수준이그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그의 글에는 예수가 없었다. 오직 ‘바울’의 히스테릭한 ‘믿음’ 주장만 있었다.
‘청소년 교인’과 ‘무지한 교인’들을 위해서 간단하고 알기 쉽게 ‘바울’의 냄새를 설명해 보겠다.
신앙생활 30년 된 ‘장로’들이 ‘바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기껏해야 성경에 있는 ‘고린도전서’와 같은 서신들과 사도행전의 기록들 뿐이다. 그가 천막 만드는 일을 했고, 기독교인을 잡으러 다녔고,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했고, 꿈에 예수를 만났고, 야고보와 대립했고 등등이다. 그의 글을 유심히 읽어보고 행간의 뜻을 살펴보며 깊이 있게 헤아려 본 장로는 거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
‘바울’은 ‘예수’의 말과 행적을 완전히 왜곡한 인물이다. ‘예수’를 이용하여 종교세력을 만들고 그 집단의 수장이 된 권력욕이 가득한 형편없는 인간이다. 원래 그는 인간성이 좋지 않았다.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이던 현장을 거들던 인물이었다. 기독교인을 잡으러 다니던 사람이었다. 어느날 꿈에서 예수를 만나고 회개했다면서 약간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야고보와 베드로는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를 두려워했고 그의 회심을 의심했다.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다음에 말하기로 하자.
‘바울’은 예수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게다가 4대 복음서를 읽어 본적도 들어 본적도 없다.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가복음’조차 바울이 죽을 무렵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예수 언행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기록했다는 13편의 서신과 그의 이야기가 절반인 ‘사도행전’의 어느 구석을 읽어 보아도 ‘바울’이 예수의 말을 인용한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예수의 말은 커녕, 예수의 핵심적인 사상을 언급한 것 조차 단 한구석도 없다. 과연 신앙생활 30년의 장로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장로나 교인들은 당연히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따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성경을 다시 읽어보라. 눈을 부릅뜨고 연필로 줄을 쳐가면서 읽어보라. ‘바울’은 예수의 말을 단 한줄도 인용한 적이 없다. 그는 예수를 만나보지 못했고, 그의 설교를 들어 보지도 못했으며, 예수의 핵심사상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는 과연 무슨 주장을 했는가 ? 도대체 ‘예수’는 무슨 말을 했기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니면서 그에게 매료 되었는가 ? ‘예수’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했다. 20쪽 정도의 예수의 언행기록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감탄할 만큼 매력적이고 산뜻한 표현으로 대중을 설득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쳐라’
단 한마디로 대중을 제압했다.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 단순한 말재주만 갖고 설교를 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대중들은 그것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예수’의 핵심은 이것이다.
1.‘사랑과 용서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2.‘회개하여 인간성을 회복하라. 그것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다’
3.‘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유를 주어라’
‘마태복음 5장’부터 있는 산상보훈의 예수 말은 우리가 쉽게 실천 할 수 있다. 사람이 행해야 할 도리를 모아 놓은 것이다.
‘나팔을 불며 자선하지 마라’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마라’
‘바울’은 이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바도 아는 바도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자기신학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것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것 뿐이다. ‘사도신경’에도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 있을뿐, 정작 중요한 예수의 가르침은 단 한마디도 없다. 오늘날 수억명의 교인들은 아무 맛도 없고 내용도 없는 ‘사도신경’을 예배 할 때 마다 기계처럼 읽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장로’가 과연 지구상에 몇 명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장로들이나 교인들은 지금이라도 사도신경을 다시 한번 곱씹으면서 읽어보길 바란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보기 바란다.
‘바울’의 핵심은 이것이다.
1.‘예수는 세상 사람의 원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죽었다. 이 공로는 대단하다. 우리가 이 공로를 인정해 주고 그 공로를 믿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의 공로를 믿어주기만 하면 별달리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일인가 ? ‘예수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 이것이 ‘대속신앙’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하세요 !‘ 하고 목사가 연신 소리치는 연유가 여기에 기인한다. 또한, 아무 의문도 필요없고 그저 막무가내로 믿으면 된다 하고 욱박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게 보내온 장로의 편지에, 내가 믿음이 약해서 그런 모양이다고 걱정하는 투의 말이 써 있었다. 이것은 예수의 말이 아니고 바울의 말이다.
2. 바울은 교회의 설립과 유지관리에 극단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의 편지 대부분이 그런 내용이다. 오늘날 교회는 ‘바울의 기독교’다. 예수의 말을 실천하는 교회가 아니라, 바울의 말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었다.
바울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위세가 커진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 야고보와 베드로에게 예수의 사도로서 자기를 인정해 주기 바라지만 처음에는 거절 당했다. 그의 가르침이 예수의 가르침과는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야보고는 인정해 줄 수 없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수장은 의인 ‘야고보’였다. 바울은 야고보를 두려워했다.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반했던 ‘마가’는 바울의 이상한 교리에 반발하여 그를 뿌리치고 떠나버렸다. 나중에는 ‘바나바’ 마저도 바울과 의견충돌을 일으키며 떠나버렸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서신에 썼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다. 바울을 떠난 후 ‘마가’는 원래의 예수말씀에 충실한 ‘마가복음’을 정리하여 편찬했다. 이러한 앞뒤 상황을 읽어보아도 우리는 ‘바울’의 독선적인 행태를 눈여겨 볼 수 있다. 과연 오늘날의 장로들이 이런 시각을 갖고 성경을 읽어본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럽다.
‘예수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최소투자의 최대수익 원칙은 많은 신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바울의 기독교는 급속히 세력이 커졌다. 마침내 그는 예루살렘의 인정을 받았다. 마치 이단의 ‘순복음교회’가 세력이 커지면서 기존 제도권교회의 인정을 받았듯이 바울은 세를 불린 후에 제도권 진입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큰소리 치기 시작했다. 베드로를 망신 주었음을 자랑했고, 자기가 예수와 직접 교신하고 있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의심나면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을 읽어보라. 바울의 목표는 자신의 교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저 이용물에 불과했다. 내가 바울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바울’의 생애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그는 재산이 많았다. 로마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지배세력과 친분이 있었고 로마인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신분 이었다.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에서 ‘아이젠만’은 바울이 야심을 가진 로마의 첩보원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캘빈이 ‘사해사본’을 읽었다면 지금 같은 교리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개독교’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세상의 온갖 사람들로부터 갖은 지탄을 받는 뿌리가 여기에 있다. 예수의 ‘사랑’은 간 곳 없고 바울의 ‘교회사랑’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교회헌금의 지출항목을 눈여겨 보자. 지출의 95%는 교회안의 ‘교회놀이’에 사용된다. 교회 밖 세상사람들의 구제에 사용되는 돈은 겨자씨 정도에 불과하고 인색하기 그지없다. 세상사람들은 교인들의 이런 행태에 분노하고 있지만, 신앙생활 30년 된 장로도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아전인수로 해석한다.
예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면 세상의 존경을 받는다. 최일도 밥퍼목사와 테레사 수녀가 칭친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교회 안에서 치대면서 그들만의 교회놀이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냥 놀아도 ‘믿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어쨌거나 ‘바울’이 베드로를 눌러 버리고 난 이후, 베드로와 야고보등 제자들은 성경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바울과는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 정신을 그들은 숭고하게 믿고 있었다. 또한 예수의 재림을 믿는 ‘재림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교파를 만들었다. 그것이 ‘기독교 영지주의’다. 이들은 예수의 사랑의 정신을 제일의 신념으로 갖고 있다. 기독교의 위세에 눌려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뿌리는 잔잔히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오늘날 형편없는 ‘바울’의 가르침이 더욱 기세를 떨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여기에는 ‘루터’와 ‘캘빈’이 큰 역할을 했다.
‘루터’는 바울이 쓴 로마서1장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을 맹종했다.
루터나 캘빈도 바울이 주장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는다는 논리를 펴나갔다. 이들도 예수의 말과 의도는 안중에 없었다.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예수의 말은 이들의 헛된 주장 속에서 또 한번 사라지고 말았다.
‘캘빈’은 바울의 ‘교회사랑’에서 한 발 더 나가서 ‘교회규칙’까지 만들어서 정교하게 교회와 교인을 요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교회규칙’은 오늘날 ‘장로교의 규칙’이 되었다. 술도 먹지 말라는 금욕주의까지 덤으로 추가했다. 예수도 포도주를 즐겼던 것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예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 남의 회당에서 거리에서 산에서 설교했을 뿐이다.
‘캘빈’도 바울처럼 냉혹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캘빈이 바울을 좋아한 이유는 서로 죽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캘빈은 한발 더 나아가 ‘구원이란 것은 선행한다고 얻어 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구제’가 맨 꼴찌에서 겨우 생색내기용으로 그치는 뿌리가 여기에 연유한다.
교인들에게 세상에 자선 좀 하라고 권유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교회에서 자선 많이 하거든요’
그들이 하는 자선은 교회안의 자기들끼리의 주고받는 자선에 불과하다. 장학금도 그들끼리 주고받고, 식당봉사도 자기들 밥 먹는 일 봉사하는 것이다. 몇번 나가는 ‘고아원봉사’는 교회홍보가 주목적이지 봉사가 목적은 아니다. ‘교회놀이’를 봉사라고 착각한다. 자기들 끼리는 후해도, 교회밖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바울과 캘빈이 만든 이러한 신앙이 영국과 미국을 거쳐 한국의 교회에 흘러 들어왔다.
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급격히 성장한 한국교회는 토속적인 미신인 기복신앙까지 첨가하여 오늘날 5만개의 교회로 확대 되었지만,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불쌍한 종교가 되고 말았다. 너무 많은 숫자로 인하여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는 추태를 보여주고 있다. 일요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떤 여인이 나에게 침례교회 이름이 적힌 일회용 휴지를 하나 건네 주었다.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 ‘예수 믿으면 오복을 천배만배 받는다’
원래 ‘복타령’은 한국의 무당 전용이었는데 목사 전용으로 바뀌고 말았다. 바울도 놀랐다.
교회 갈 때마다 나는 서글펐다. 신앙초기 새벽기도 백일 할 때, 나는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기도했다. 개신교의 본 모습을 전혀 몰랐다. 먼저 성서를 제대로 연구한 후에 신앙을 갖는 사람은 1%도 되지 않는다.
나는 교회 안에서 하루종일 치대면서 있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전도회를 탈퇴했다. 예수에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교제를 강조한 것은 ‘바울’ 이었다. ‘예수’는 골방에서 홀로 기도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냉혹하고 이기적인 ‘바울’과 ‘캘빈’의 얼굴이 아직까지 나를 덮치고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무슨 믿음을 갖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아무런 지식이 없는 30년 된 교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교회 다니다 보면, 한번씩 회의감이 옵니다’ 그것이 나의 긴 의문에 대한 간단한 답이다.
‘바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다.
‘이젠 내편이 워낙 많거든’
몇 년 전, 카톨릭 성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교구에 성당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신자가 늘어나면 북새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확장신축을 위해 헌금을 모았다. 어떻게 지을 것인가를 성당측은 신자들과 의논했다.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가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신자들을 인근의 성당으로 나누어서 분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모은 헌금은 정신박약아를 위한 병원 건물을 신축하기로 하고 돈을 좀 더 모아서 병원을 지었다. 신자들은 박수를 쳤다.
만약 개신교가 교회를 신축했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는 ‘교육관’ 신축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수련원’ 건축에 들어갈 것이고 더 나아가 ‘선교센터’를 짓는데 목표를 두었을 것이고 이후에는 ‘체인형태의 교회신축’에 나갔을 것이다. 바울의 방정식이다. 우리 목사는 ‘중고등학교’를 짓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수천만원씩 기부하던 장로는 결국 나가 떨어져 은퇴장로로 퇴진하여 위세가 약화 될 것이고, 새로운 시무장로가 넉넉한 헌금으로 ‘하급교인’들의 칭찬표를 받으며 자존감을 즐길 것이다.
‘성당 신축’ 보다는 ‘장애인 시설 건축’을 우선하는 결정을 보고, ‘예수’의 사랑과 희생 정신을 실천하는 카톨릭의 자세에 감탄했다. 면죄부사건 이후 카톨릭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변화해 왔다. 오늘날 카톨릭의 신자가 증가하고 개신교의 교인이 줄어드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해사본’이 최근 해독 되면서, ‘바울’이 크게 걱정하는 모습도 어른거렸다. ‘끝’. [출처] 반기독교 안티예수 - http://antiyesu.net/bbs/board.php?bo_table=99999&wr_id=3793
날카로운 지적 정말 잘 들었습니다...
사람의 체험으로 얻어진 신앙은 정말 뚫기가 어렵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참회로 인한 깨달음이라면 말이죠...
지성의 날카로움으로도 소용이 없죠...
그래서 더 신기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