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침묵

바울의 침묵

가로수 0 10,414 2007.12.21 10:55

4. 바울의 침묵

이제 이야기를 성경 쪽으로 옮겨보자.

먼저,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 한글 본 성경과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린다.

영어 성경을 토대로 더 쉬운 우리 말로 제 자신이 직접 번역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원래 뜻이 변질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약 성경은 4 복음서, 바울의 편지, 그 외 몇몇 편지 및 계시록으로 되어있다.

그중 4 복음서가 쓰여지기 전에 나타난 제 1 세기의 문서들을 보자. (See Appendix I).

바울의 서신들이 가장 중요한 문서들 일 것이다.

이방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한 그를 기독교의 사조로 부르는데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포한 복음을 편견 없이 들여다 보면 4 복음서와 상치되는 것 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인식 하고 있던 예수는 누구일까?

 

복음서들은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행적을 기록 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서,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이적을 행하고, 특정한 가르침을 베푸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 가시고 부활 해서 어떻게 하셨는지, 또 친구들은 누구였고, 부모 형제들은 누구였으며, 음식도 드시고, 시장기도 느끼시고, 분노도 하시고 슬퍼도 하시고, 탄식도 하신 예수를 묘사 하고 있다.

복음서의 이러한 예수를 "육체적 예수 또는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겠다.

바로 우리가 찾아 나선 그 분이다

 

"바울"은 예수가 승천 하신 직후 기독교로 개종 하였고, 이방 선교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전해 진다.

이상한 것은 바울이 이 육체적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언급도 없다.

불과 20-30 년 전에 당대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 하나님의 성육화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 하다.

몇 군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썼지만 이는 "육체적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이러한 메시아를 "영적 예수"라고 부르겠다.

 

왜 바울의 예수는 육체적 실체가 없는 영적 예수인가?

먼저 바울은 육체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사도 행전에서 묘사된 그의 만남은 환상을 통한 영적 계시였다.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 했을 때 에도 그가 예수의 생가나 그의 무덤, 또는 골고다 언덕을 순례 했다는 기록이 없다.

여러분이 바울이었다면 어떻게 하였겠나?

 

그의 가르침을 보자.

갈라디아서 1:16 "하나님이 나에게 그의 아들을 보이셨고 나를 통해서 그 아들을 이방에 선포케 하셨다."

바울의 "아들"에 관한 지식은 온전히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에서 왔으며, 육체적 예수에 대해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에베소서 3:3-5: "전 세대에게는 숨겨졌던 이 그리스도의 비밀이 이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통해 나타내졌다."

 

여기서도 역시 영을 통 했다고 말한다.

많은 기독도들이 곡해하기 쉬운 것은 그리스도 하면 육체적 예수를 지칭 하는 것으로 아는 것 인데, 당시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의 "크리스토스"에서 나온 말로 특정한 인물을 칭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 하며, 관념적 존재를 칭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유태인의 구원자 메시아는 육체적 존재를 지칭 하며 이스라엘을 재건할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를 묘사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기독도의 편견은 "사도" 하면 예수가 친히 거느린 12 제자를 칭 하는 것으로 쉽게 단정 해 버린다.

당시 사도들이란 예수를 직접 보지도 못 했고 그들의 선생이 불과 수 십년 전 갈릴리에서 활동 하신 줄도 모르고 있던 사람들임이 차차 밝혀 진다.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나 유태 사회나 몹시 혼란스러웠고,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요구 하고 있었다.

여기 저기에서 자칭 그리스도들도 나타나고 독립적으로 "사도"들도 나타났다.

서로가 서로의 교리를 비판하고 교세를 키우기 위해 경쟁 하였다.

 

바울이 내세운 "아들"의 비밀도 이들 중 하나였다.

독립적으로 구약 성경을 연구 통달하고 영적인 깨달음을 가진 자들이 구원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 했던 것이며, 바울의 교리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던 자들은 사도로 불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사도들에 관해 나중에 더 언급 한다.

바울과 쌍벽을 이루며 라이벌이었던 "아볼로"와 함께 다시 부연 설명 한다.

 

예수의 12 제자는 어찌 되었나?

성경은 이들의 행적을 완전 무시 하고 있다.

 기독도 자신들도 정경으로 채택 하기를 거부한 외경들에 간간이 그 들의 행적과 말로가 기록 되어있다.

너무나도 신화적인 이야기라 기독도 자신들도 배척한 문서들이다.

 

고린도 전서 8:6 "우리에게 오직 한 분의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모든 존재가 그로 부터 오도다.

또한 한 분의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를 통 하여 모든 사물과 우리가 존재케 되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지칭 하는 "예수" 그리스도란 누구인가?

그리스도가 관념적 용어임은 이미 밝혔다.

여기서 "예수"는 육체적 나사렛 예수인가?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매우 유행 되었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와 비슷한 "구원자, 하나님은 구원 하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구약의 인물 "여호수아"에서 유래 되었다.

아직도 "여호수아"(Joshua)나 "예수"나 동일한 단어로 쓰여지고 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유지를 받들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유태 민족의 전설적 영웅이었다.

다윗 왕과 더불어 메시아의 표본이었다.

당시 많은 유태인들이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고대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호수아", 즉 "예수"는 어떤 특정의 인물을 묘사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구원자를 지칭하는 관념을 표현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위 구절의 예수가 육체적인 예수를 지칭 하지 않음은 바울의 저술을 읽어 볼 수록 더욱 자명 해진다.

고린도 전서 15:3-4: "경전(구약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땅에 묻히셨고, 구약 말씀에 따라 3 일 만에 부활 하셨다."

 

어째서 바울은 그의 구원자의 부활을 논 하는데 그 근거를 구약 말씀에서 찾는가?

불과 십 수년 전에 살아 계셨던 나사렛 예수는 벌써 잊었는가?

 

고린도 전서 1:18: "믿지 않는 자들 에게는 예수가 저들을 구원 하기 위하여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 스럽게 들리는가.

그러나 구원 받은 자들은 이 소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기느니라.

즉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를 '인간이 고안 해 낸 그 어떠한 구원의 계획도 파괴해 버릴 것이요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인간의 생각도 무시 하겠노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음성을 인용 해가며 방어 하고 있다.

왜 살아 있던 하나님, 나사렛 예수를 증거 하지 않는가?

그보다 더 유용한 방어가 어디 있는가?

 

빌립보서 2:5-11: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본 보인 대로 친절 하라.

그는 하나님 이었지만 하나님으로 써의 권리를 주장 하지도 않았고 집착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능한 힘과 영광을 버리시고 노예의 가면을 쓰시며 인간과 비슷하게 되셨느니라.

 더욱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순종 했으며 십자가 상의 죽음 까지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런 연고로 하나님이 그를 하늘 나라로 들어 올리셨고 모든 이름 중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느니라.

 예수 이름 앞에 하늘, 땅 땅 밑의 모든 무릎은 꿀릴 것이요 모든 혀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하고 자백 하리라."

 

여기서도 바울은 예수가 누구인지 길게 설명 하고 있는데 "빌라도"며 "골고다" 언덕이며, 부활 해서 "도마"에게 상처를 만져 보게 하신 "육체적 예수"는 무시 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을 들어 증거 하는 것이 어떤 인물을 소개 할 때 당연한 순리가 아닌가?

 

하지만 십자가상의 죽음의 대목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십자가와 십자가 처형에 대해 좀 더 알아 보기로 한다.

십자가는 예수 탄생 훨씬 전부터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에 이미 신과 인간의 중재자가 인간의 대속을 위해 영적 차원의 세계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신앙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십자가에 대해서 "미트라의 비밀" 란에서 다시 언급 하겠지만, 바울의 십자가는 "골고다"에 세워졌던 그 십자가가 아니고 하늘에 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참고로 로마 시대 처형에 쓰여진 십자가는 열 십자(+)의 형태가 아니고 오히려 T자 또는 X자에 가까운 형태의 것으로 유추 되고 있다.

 

골로새서 1:15-20: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똑 같은 형상이며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 하시기 전 부터 존재 하셨다.

 실제로 그리스도 자신이 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 그리고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 모두를 만들어 내신 창조자 이시다.

영혼의 세계도 그 세계의 왕과 왕국도, 통치자와 권위자들도, 오직 그가 사용 하기 위하여 또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지으셨느니라.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 부터 그는 있었고 모든 것을 다룸이 그의 힘 이니라.

그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몸체 즉 그가 시작한 그의 교회의 머리니라.

그는 시작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 사신 자니 만물의 첫 번째 이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존재 하기로 원 하셨기 때문이니라.

아들의 업적으로 하늘이나 땅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음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의 피로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 하게 되었음이라."

 

여기서도 바울은 고집스레 영적인 그리스도를 얘기 하고 있다.

또 바울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 처음 사신 분으로 썼는데, 이것을 보아도 복음서의 예수는 모르고 있음이 자명하다.

예수보다 먼저 죽음에서 일어난 자 들을 바울이 왜 모를까?

 

복음서에는 예수가 직접 죽음에서 살린 사람들이 있다 (예; 나사로 - 마리아 자매의 남동생) 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무덤들이 열리며 한 떼의 성자들이 살아 나왔다고 기록 되어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나?

 


이쯤 에서 다시 되돌아 보자.

 

우리는 흔히 예수가 먼저 세상에 오시고 그 후에 바울이 그의 가르침을 전파 한 줄 알고 있다.

눈치 있는 독자들은 짐작 하셨겠지만 신화파에서는 그 거꾸로를 주장 하는 것이다.

 

조금 더 보자.

바울은 물론 모든 1세기 성경 기자들도 나사렛 예수를 모르고 있다

"이웃을 사랑 하라" - 예수의 말씀 중 유명한 말이다.

"야고보"서, 바울서신, "요한" 일서 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 하는데 아무도 이것이 예수의 말씀인 줄 모르고 있다.

바울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4:9)

 

히브리서 1:2, 2:11, 3:7, 10:5 - "오늘 날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얘기 하는데, 왜 전부 구약에서 인용 하나?

불과 몇 년 전 살아 설교 하던 나사렛 예수의 목소리는 어디 갔나?

 

로마서 8:26: "우리가 아직 기도 하는 법을 모른다"

바울은 예수가 가르치신 주기도 문도 몰랐나?

 

"인자 - 사람의 아들" 예수는 즐겨 자기 자신을 이렇게 호칭하 였다.

왜 바울의 서신에는 이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을까?

 

로마서 10:14-15: "......듣지 못하고 어찌 믿겠는가.

하지만 누군가 알 해주지 않으면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보냄을 받지 않으면 누가 가서 기쁜 소식을 말해 주겠는가?

이 연고로 경전에 이렇게 쓰여있다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 시키는 이 기쁜 소식을 설파하는 자의 발은 어찌 아름다운지'........."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소명을 옛 경전에 의지 하고 있다.

분명히 예수가 땅 끝까지 가서 전 하라고 직접 명령 했었는데도...

 

이어서

로마서 10:16-17: "그러나 듣는 자 마다 믿는 것은 아니니, 선지자 이사야가 '주여 내가 말했을 때에 누가 믿었사옵 나이까?' 하였다.

그래도 믿음은 이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는데서 오니라."

 

이사야 까지 거슬러 올라 갈 필요가 있었을까?

불과 십 수년 전 예수 자신의 말도 배척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불 신자들을 얘기 할 때 "나사렛 우리 구주의 말씀 조차도 믿지 않는 자가 많았더라" 라고 썼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어서

로마서 10:18: "그런데 유태인들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가?

그렇다. 그들이 어느 곳에 있었던지 말씀은 함께 있었다"

 

로마서 10 장은 유태인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는 글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가? 하고 물은 후 유태인중에 살아 계셨고 십자가의 부활을 보이신 예수를 증거 하는 대신, 유태인과 항상 함께 했던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을 언급 하고 있다.

이 기쁜 소식이란 나사렛 예수의 것이 아닌 구약의 하나님 말씀이라는 얘기이다.

 

당시 까지 예수는 한 번도 이 땅에 오신 적이 없었다는 주장도 아래와 같이 가능하다.

"예수 재림" - 서신 문서에서, 세상 끝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을(Coming) 얘기 할 때, 한 번도 "다시 오심 - Second Coming" 또는 "돌아 오심 - Return"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 않다.

즉 처음으로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내포 하고 있다.

역으로 바울의 때 에는 아직 그리스도가 세상에 온 적이 없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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