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정체

사도들의 정체

가로수 2 8,362 2007.12.21 10:53

6. 사도들의 정체

만약에 4 복음서가 역사적 기록 이라면, 우리는 예수 승천 후의 모든 사도들의 전도 행각이나 가르침이, 예수의 친 제자 11 명 또는 70 명에 의해 조직되고 인도 되었으리 라고 유추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타당한 유추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는 자 들이 어찌 전도를 하고 예수의 말씀을 전파 하겠는가?

현실은 어떠 했는가?

12 제자가 아닌 자들이, 동시 다발로, 광범위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증거 하고 있었던 것 이었다.

 

1 세기 서신 문서에서 "사도"란 성령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를 뜻 하고 있다.

사도는 오직 사도 로써 표현 되었지, 복음서의 12 제자를 지칭 하는 곳은 없다.

"바울", "베드로", "바나바", 그 외 무명의 다른 이들, 이것이 서신들에 나타나는 사도들의 전부이다.

서신들은 예수에 의해 선택된 12 제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환상을 통해 예수를 만났다는 관점은 전기 하였다.

그 후 100 여년 넘도록, 마태 복음이 쓰여 질 때까지,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라고 쓰여진 곳은 아무데도 없다.(See Appendix II)

 

고린도 후서 10 - 12 에 나오는 바울의 라이벌 사도들은 누구인가?

바울 뒤로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그 들.

그 들도 그 들이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 이라고 주장 하였다.

바울은 반격 한다.

나 또한 그러 하노라고.

 

이 중대한 정통성 다툼의 와중 에서도 양쪽 다 나사렛 예수의 친 제자 임을 빌어 사도 직의 정통성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고요?

바울도, 그의 라이벌들도 모두 나사렛 예수를 듣지도 보지도 못 했었기 때문이다. (See Appendix V)

 

바울은 계속 반격 한다.

다른 예수를 전파 하는 자들,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로 라이벌 사도들을 매도 한다.

거짓 사도, 가면 쓴 자들로, 사탄의 사자들로(고린도 후서 11:13).

 

하지만 몇 구절 못가서, 바울은 마지 못해 그들의 정통성을 인정 하고 만다.

고린도 후서11:23: "고린도"인 들이 수용 할 수 있는 기준에 의하면 그 들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사도라는 말이 나사렛 예수의 친 제자 무리를 칭하는 것이 아님은 점점 무게를 받게 된다.

독일의 신학자 Rudolf Bultmann도 12 제자 얘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후에 만들어져 낸 것 (Invention)이라고 서술 했다.

 

라이벌 사도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딱 한 사람은 예외. "아볼로"!

그는 "요한"의 세례 까지 밖에 모르고 있었음에도 사도로 인정 받았다

 

사도행전의 "아볼로"를 보자

사도행전 18:24 - 28: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라 하는 유태인이 '에베소'에 오니 그는 달변가요 경전에 능통 하였다.

그는 주의 도를 전수 받았고 성령 충만 한 지라, '요한'의 세례 밖에는 몰랐으나, 예수에 관 하여 정확히 증거 하며 가르쳤다.

 회당에서 담대히 증거 할 때, '브리시길라'와 '아길라'가 그를 불러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설명 하더라.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자 할 때에 형제들이 그를 장려 하니.......... 그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구약을 인용 해가며 증거 하는데 공공장소에서 많은 유태인들을 강력 하게 설득 시키더라."

 

"세례 요한"의 세례 까지만 알고 있던 "아볼로"가 예수를 정확히 증거 한다고 서술 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이러한 "아볼로"가 어찌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될 수 있었는지?

 

혹간의 학자들은 "아볼로"가 지혜 (Wisdom)의 선생이라고 본다.

"아볼로"를 따르는 무리들은 세상 끝날 의 부활을 기다릴 것 없이 이미 세례로 영생을 받았노라 주장 하였다.

"아볼로"는 그리스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태 지혜 철학자였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지혜 (Sophia)철학과 그리스에서 자라난 로고스 철학(Logos)이 합쳐져서 나온 그리스도 철학의 선생으로 보는 견해인 것 이다.

사도 행전 기자도 그의 달변과 논리 정확 함을 인정 하고 있음을 보시라.

 

결론적으로 "바울"이나, "아볼로"나, "바울"의 다른 라이벌 사도들은 나사렛 예수의 12 제자가 아니었다.

이 모두들 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구원의 비밀을 보여 주는 영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도마 복음의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예수는 역사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 흘리신 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 신화설의 주장이 옳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당시 팽배 해있던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 그 염원을 토양으로 기존의 분파들이 서로 경쟁, 성장 하게 되고, 구약에 능통한 "바리새"인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이 독립적으로 성령의 감화를 받아 영적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을 선포한 것이 기독교의 시작인 것으로 보는 견해는 많은 견해들 중의 하나 이다.

 

사도 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강림, 그 이전 부터 성령은 이곳 저곳에서, "아볼로"에게, "바울"에게, 다른 무명의 사도들에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 사상이 유행 할 수 있었던 토양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사회의 혼란상이었다.

거듭되는 전쟁과, 문화와 문화의 충돌에서 오는 가치관의 흔들림을 비집고 기존의 구원자, 중개자 사상들이 히브리 구약 성경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신화설의 한 견해이다.


이 신화설의 견해들 중 가장 쉽고 간단한 "이방 신화 영향설"을 보자.

예수 탄생 이전에 벌써 많은 구세주들이 많은 문명에 나타 났었고 나사렛 예수의 얘기는 이 메시아들의 드라마들을 집대성 한 것이다 라는 견해이다.

 

당시의 메시아 전통들에 대해 이제 보기로 하자.

 

당시 유대 지방에는 나사렛 예수 이전에 이미 예수와 흡사한 인물들이, 역사적 실체이건 신화적 인물이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화파 학자들이 주장 하는 이들의 이름은 수도 없이 많다.

이들은, 가까이는 가나안의 "타무즈", 그리스 로마의 "헤라클레스", "아도니스", "미트라", "아폴로", "바카스", "프로메테우스", 이집트의 "이시스", 페르시아의 "미트라", 힌두의 "크리시나", 인도의 "부처" 등등 으로써, 그래도 우리에게 낯 익은 이름들이며 나머지 여러 부족들의 생소한 신들도 꾀나 된다.

 

이들의 생애를 종합 하면;

1) 하나님, 또는 하늘의 섭리로

2) 처녀에게 잉태되고

3) 이들의 어머니 이름은 메리이, 마야, 마리 등등 M으로 시작이 대부분 이고

4) 탄생 시 천사 혹은 현자들이 경배 하였고

5) 혹자는 기존의 왕으로 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아 타국, 타향으로 부모 따라 몸을 숨기고,

6) 어려서 부터 경전 학자들을 능가 하였고

7) 혹자는 목수 일을 하였고,

8) 혹자는 양 떼를 인도 하는 목자로 비유 되었고

9) 12 제자를 거느리고

10) 이웃을 사랑 하라고 가르쳤으며,

11) 세상에서 병을 고치고 ,

12) 죽은 자를 살리고,

13) 물 위를 걷기도 하고,

14) 소량의 음식으로 여럿을 먹이고

15) 나는 빛이요 길 이니라 설파 하고

16) 탄신 일은 거의가 12 월 25 일 이고

16) 나무, 바위 등에 매 달려 죽었고

18) 다시 부활 하여 하늘 나라로 오름으로

19) 만인의 죄를 대속 하였다고 한다.

 

위의 서술이 너무나 예수님의 생애와 일치 한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예수를 제외한 모든 구세주들의 행적을 집대성한 정보일 뿐, 이 모든 점을 다 가지고 있는 구세주는 한 명도 없다.

어떤 학자는 예수와 "크리시나"의 공통점을 상기의 것 들을 포함해 300 가지 이상 열거하고 있지만, 맞지 않는 부분도 상당히 있다.

하지만 부분적인 공통 점들이 있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전체적으로 일관 되는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1)신의 아들 이었고

2)기이한 기적들을 행했으며

3)죽었다 다시 살거나, 천국, 하늘, 열반의 세계로 나아 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화는 이 정도는 다 기록 하고 있으므로 크게 의미를 두지 마시도록.

 

우리의 관심은 예수와 똑 같았던 인물이 있었던 가에 있는 게 아니고, 예수라는 개념이 나올 수 있게 한 그 토양의 기원을 고려 해 보고, 신화설의 견해가 얼마나 타당한 가 알아 보는데 있다.

멀리 "부처"의 가르침 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이 들도 있다.

본인은 그리스 로마의 "미트라", 그것이 전래 된 "페르시아" 및 "가나안"의 몇 몇 신들을 돌아 보기로 한다.

Comments

아니야 2014.03.12 14:56
예수님을 바탕으로 나중에 자기의 신화속에 껴 맞추어 놓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비슷할 수 밖에 없지요

다음 링크를 참고하시길

http://blog.naver.com/joodup?Redirect=Log&logNo=80026406675

http://blog.naver.com/holyhillch?Redirect=Log&logNo=60008590410

가로수 2014.03.14 19:18
참 변명도 가지가지 하시네요.
 
자 보시지요. 예수보다는 석가가 훨씬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님의 논리대로라면 예수는 석가를 표절한 사기꾼에 불과 합니다.
 
★비록 원수일지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예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불경에 수록되어 있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도 여러 번 되풀이 되고 있다.

불경『열반경 범행품』『아함경』에서 석가모니는 부모를 죽인 원수도 갚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마주 때리거나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다짐을 받는다. 또 부모와 원수를 대할 때에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6:27∼35』『마태복음 5:38∼46』에서 예수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했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 살인마와 길 잃은 양

불경『아함경』에는 99명을 살해한 아힝사카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통해 악인도 바른 마음을 깨치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15:3∼10』『마태복음 18:12∼16』에도 99마리의 양과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이야기를 통해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99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비유해서 죄지은 자를 구원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불경은 99명의 피살자와 한 명의 죄인을 들어 죄 지은 자를 구제하고 있는데, 가르치고자 한 점은 다 똑같이 악(惡)을 선(善)으로 구해주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 경전비방과 성령모독

성경『누가복음 12:4∼10』『마태복음 23:23∼29』에는 예수의 설교를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은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으며 지옥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라고 극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또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는 곧 하나님의 용서를 못받고 최후의 심판에 의해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전도를 위해 파송한 제자들을 박대한 자들도 폐망하게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불경『법화경 비유품』에도 경전을 비방하거나 가르침에 의혹을 품고 믿는 자를 미워하고 천대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법화경 법사품』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한 겁 동안을 부처님을 항상 훼방하고 꾸짖더라도 그 죄는 오히려 가벼우려니와 어떤 사람이 한마디 나쁜 말로써 집에 있는 이나 집을 떠난 이가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것을 비방하고 방해한다면 그 죄는 매우 무거우니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성경에서도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하리라"고 한 것은 석가모니나 예수를 비방하는 것보다 경전을 비방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 신앙과 씨뿌림의 비유

불경『슛타니파아타』『아함경』『미린다 왕문경 6장』과 성경 『마가복음 3:2∼9』『마가복음 3:14∼20』『마태복음 13:31∼32』『마태복음 13:36∼40』에서 석가모니가 자기 자신을 농사짓는 농부로 비유하고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고 설법한 것은 예수가 자신을 씨뿌리는 인자라 비유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예수가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돌밭에 뿌려진 씨앗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든 것과 똑같이 석가모니도 돌과 나무가 무성한 황무지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들어 잘못된 신앙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점은 불경과 성경이 똑같은 비유,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가 씨를 뿌려서 얻는 수확은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이니 곧 불교의 이상이자 목표인 해탈에 이르는 것이요, 예수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추수 때인 종말의 때에 천사들의 구원을 얻게 하는 데 있으니 석가모니와 예수가 씨뿌리는 목적 또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말법시대와 말세

불경『아함경』과 성경『마가복음 13:4∼13』『마태복음 24:6∼22』에는 불경의 말법시대와 성경의 말세에는 똑같은, 비참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미혹하여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잡아 죽이며,

둘째, 기근과 재앙이,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며,

셋째,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형제가 형제를 잡아 죽이게 되고,

넷째,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활과 칼로 죽이려 싸우게 되고.

다섯째, 불법이 횡행하게 되며,

여섯째, 그러나 서로 죽이는 것을 싫어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깨달은 자들이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는 다시 구원을 받아 살 수가 있다는 점에서 불경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말법시대와 말세는 똑같이 묘사되고 있다.

▣ 이 세상의 빛

불경『슛타니파아타』『법화경 안락행품』『법화경 서품』과 성경『누가복음 2:30∼32』『누가복음 11:33∼36』『마태복음 5:14∼16』『요한복음 1:4∼11』『요한복음 8:12』를 보면 석가모니와 예수 모두 자신도 빛이요, 횃불이요, 광명이며, 이 성자들의 가르침도 빛이요, 등불이요, 광명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

▣ 악마와 마귀

성경『마태복음 4:1∼11』『마가복음 1:12∼13』『누가복음 4:1∼13』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도 악마의 시련을 받는 이야기가 『본생경』『아함경』『불소행찬』『불본행경』『잡아함경』등 불경에도 많이 실려 있으며 그 이야기의 구성이나 전개,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려 한 것까지도 불경과 성경이 서로 똑같은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귀가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금식시켜 주리게 해놓고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것이나, 석가모니에게 걸식을 못하도록 해서 주리게 해놓고 다시 걸식하게 권해서 식욕의 유혹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나, 마귀와 악마가 한 짓은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향해 던진 미끼였다.

이 때 예수는 배고픔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식욕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대답하였고, 석가모니 또한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광음천처럼 기쁨을 양식으로 먹고 산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던 것이다.

또 마귀가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려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한다.

마찬가지로 악마도 석가모니에게 나라 전체를 직접 통치하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예수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였으니 이는 곧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살 것이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요, 석가모니가 물욕을 따르는 자 물욕에 결박될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그 결박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진리, 곧 법을 취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예수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돌에 부딪혀 죽게 하려 한 것이나 데바닷타가 높은 산에서 돌을 던져 그 돌에 맞아 석가모니가 죽게 하려고 한 점이나 돌로 해치려고 한 점에서는 그 발상이 같다.

▣ 한 명의 배신과 도망친 제자들 이야기

불경『아함경』과 성경『누가복음 22:20∼21』『마태복음 26:20∼25』『마태복음 26:31∼35』『마태복음 26:45∼56』을 보면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기를 배반하고 팔아넘길 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 데바달타가 자기를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제자들에게 얘기했던 점과 같다.

그리고 예수가 검과 몽치를 들고 온 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되자 그의 모든 제자들이 모조리 다 도망갔듯이 석가모니의 제자들도 그의 스승이 코끼리의 위해(危害)에 처했을 때 5백 명이 모두 도망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경고한 것처럼 석가모니는 악은 악으로 망하는 법이라고 경고한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야기는 불경『본생경 길상초품』『본생경 바수나품』『아함경 카필라성의 비극』『유마경 향적불품』등과 성경『마가복음 6:35∼45』의 오병이어(五餠二魚) 『마가복음 8:1∼9』『마태복음 15:32∼39』의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 이야기가 있다.

불경의 유마힐과 성경의 예수가 똑같이 수많은 사람을 앉혀놓고 없던 음식을 순식간에 만들어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킨 사실이 똑같다는 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먹을 것이 없는 상황, 기적을 일으키는 유마힐과 예수, 배불리 먹는 신자들, 그러고도 남는 여유있는 음식, 이 얼마나 똑같은 구성과 전개이며, 이 얼마나 똑같은 공식에 의해 이야기가 엮어져 있는가?

▣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렵다

불경『방등경』『법사경』과 성경『마가복음 10:21∼30』『누가복음 18:22∼30』에서는 석가모니가 재물을 버리고 법을 따르라고 한 것이나 예수가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한 것이나 그 가르침은 똑같다. 또 석가모니는 재물에 집착하면 열반에 들 수 없다고 하였고, 예수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말씀이 그 말씀인 것이다.

▣ 네 자신을 뒤돌아 보라

성경『요한복음 8:1∼11』에서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잡아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다. 이 는 너 자신부터 죄가 있는지 없는지 솔직하게 되돌아 보라는 이야기이고 여자를 잡아왔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도망쳐 나간 것이다. 불경『불전(佛典)』에도 석가모니가 물건을 훔쳐 도망친 창녀를 잡으려고 찾아다니던 젊은이들에게 죄지은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들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급하냐고 힐문하자 젊은이들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다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더 급하다고 대답하고는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여자와 값진 물건을 훔쳐 도망쳐버린 창녀, 그리고 그 여자를 벌주기 위해 끌고온 사람들과 도망친 창녀를 붙잡기 위해 찾아다니던 젊은이들, 그들에게 너 자신부터 되돌아보라고 요구한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같은 것이다.

▣ 남을 비방하기 전에

불경『사십이장경』『법구경』에서 남의 잘못을 보기는 쉽지만 자기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등겨나 쭉정이처럼 까불어 날리지만 자기잘못은 교활한 도박꾼이 제게 불리한 주사위 눈을 숨기듯 한다고 한 것이나 성경『마태복음 7:1∼5』의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한 것은 똑같은 내용의 비유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이나 불경에서 남 듣기 싫은 성낸 말 하지 말라. 남도 그렇게 네게 답할 것이니라고 한 말이나 그 표현은 똑같은 것이다.

▣ 신통술과 기적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대목이 곳곳에 수없이 나오고 있다. 장님을 눈뜨게 하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4천명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벼라별 기적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예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도 병자를 고치면서 복음을 펴고 다녔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가 행하고 다녔다는 기적들의 유형은 이미 불경의『본생경』에 거의 다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 이야기는 불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독룡(毒龍)을 잡아 밥그릇 속에 담기도 했고, 허공 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기도 했고, 용왕의 세계에 나타나기도 했고, 병자를 고쳤으며, 전염병을 물리치고 홍수를 물리쳤으며, 하늘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를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했으며 석가모니의 제자가 하늘 나라 향적국을 마음대로 왔다갔다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 음식을 얻어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했고, 하늘나라의 왕 제석천왕으로 하여금 하늘밥, 하늘옷을 내리게도 했는가 하면, 석가모니의 제자는 지옥에까지 내려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은 형용할 수 없이 먼 거리도 잠깐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신통자재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불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과 이적의 원형은 수많은 불경 여기저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불경의 기적들이 조금씩 변형되어 성경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불경『방등경』『유마경』『미린다 왕문경』에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병든 환자로 비유하고 있으며 병든 자에게만 의사와 약이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와 약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성경『누가복음 5:30∼32』『마가복음 2:16∼17』에도 예수가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괴로움의 바다를 헤매는 중생을 병자로 비유한 불경이나 죄인을 곧 병자요,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성경이나 똑같은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을 의사로 비유하고 있는 부분이나 예수가 자신을 의원에 비유한 것도 똑같은 이야기이다.

▣ 깨우침의 경지와 하나님의 나라

불경의 해탈의 경지와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석가모니와 예수의 대답은 똑같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다. 불경『원각경 보안보살장』을 보면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속에 있다 즉 心卽是佛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누가복음 17:20∼21』에서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한 예수의 가르침이나 네 마음이 곧 부처다고 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 진정한 보물

불경『소송경(小誦經)』『잡아함경』과 성경『마태복음 6:19∼20』『요한복음 17:14∼16』에서 세속적인 재물은 참다운 보물이 아니며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다운 보물은 자비, 경건, 절제, 침착함이라고 가르친 석가모니의 말씀과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가르친 예수의 말씀은 똑같으며 그 다음에 계속되는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고 도둑이 훔쳐갈 수 없는 보물을 가지고 떠나라는 석가모니의 말씀이나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한 예수의 말씀도 똑같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가 엄청나게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들려준 가르침은 서로가 서로의 경전을 옮겨놓은 듯이 똑같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대단한 경전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평등한 사랑

불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면 석가모니의 길고 긴 설법 내용 가운데서 그 핵심부분만을 간단히 추려내어 다이제스트처럼 축약시켜 놓은 대목이 성경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경『법화경 약초유품』『법화경 신해품』과 성경『마태복음 5:39∼47』의 경우도 이와같은 예(例)라 할 것이다.

석가모니가 어떤 차별도 없이 골고루 비를 내리듯이 모든 중생들에게 가르침의 비를 내린다고 했듯이 예수 또한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하나님이 해를 비춰주시고,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 서로 돕고 존중하라

불경『백유경(百喩經)』과 성경『고린도전서 12:14∼31』에서는 서로 아끼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화합하라는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석가모니는 뱀의 머리와 꼬리를 비유해서 설법했고, 바울은 같은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몸과 지체(肢體)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불경과 성경이 똑같이 강조하고자 했던 점은 교단의 화합과 결집이었다. 머리라고 해서 귀중하고 꼬리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 아니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자기만 제일이라고 주장하고 우기다가는 뱀의 몸통은 물론 머리와 꼬리 전체가 다 죽는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만일 한 지체(肢體)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석가모니의 수명과 예수의 수명

불경『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는 낳고 죽는 일에서 벗어난 분이요,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미래까지도 그 수명이 늘지도 줄지도 않고 항상 머무르며 무한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깨우치고 지켜주며 괴로움의 바다에서 건져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영원히 살아 있으되, 중생들의 깨우침을 위하여 인간의 모습을 잠시 보였을 뿐이라고 불경은 강조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24:13∼53』『마가복음 16:1∼20』『마태복음 28:5∼20』에서 예수도 이와 똑같이 세상 끝날이 있음을 알려 주고 그들을 구원에 들게 하기 위하여 잠시 그 모습을 이 세상에 보였다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 갔을 뿐, 결코 죽은 것이 아니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깨어 있으리라고 하였으니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살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석가모니도 그 수명이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無量壽)니 영생(永生)이요, 예수도 영생(永生)이라, 불경과 성경은 교조(敎祖)의 죽음 그 이후까지도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 무덤에서 일어나는 기적

불경에는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성경『마가복음 16:1∼6』『누가복음 24:1∼6』『마태복음 28:1∼4』『요한복음 20:1∼14』에서는 불경의 무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설명 그대로를 재현시켜 놓고 있다.

『미린다 왕문경』에서 나아가세나 존자가 향이나 화환이나 의복 중 한 가지를 탑, 묘에 바치면 죽은 자를 묻은 탑이나 묘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설명한 그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미리 준비해둔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으며 무덤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무덤의 기적은 이미 불경의 『미린다 왕문경』에 이론과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 불경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 이른바 예수의 무덤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 기타

석가는 49일 단식했을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예수는 40일간 단식 후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

석가는 12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파견했다.

예수는 12제자를 이스라엘 전역에 파견했다.

석가는 갠지스강을 걸어서 건넜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서 건넜다.

석가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예수는 과부의 한 냥 헌금이 거룩하다고 했다. [ S. 라다 크리슈난 <석가와 예수의 대화> 중에서 ]

불경과 신약성서가 왜 이렇게 같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인도에서의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와 기독교의 영지주의와 불교와의 관계 등을 알면 자동적으로 풀리는 문제이다.

영지주의가 활짝 꽃 피었을 당시는(서기 80년 ~200년) 그리이스-로마 세계와 극동 지역간의 무역로가 열리고 있었던 중이었고, 불교 포교사들은 여러세대에 걸쳐 알레산드리아에서 포교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이스어를 아는 기독교인이었던 로마의 히폴리투스(225년경)가 인도의 브라만교도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전승을 이단의 원천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 일레인 페이젤 <성서밖의 예수> 방건웅,박희순譯, p24, 정신세계사, 1989 ] 볼 때 불교나 힌두교가 기독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영지주의 복음서인 『도마복음서』에 있었던 말씀 중에 하느님은 너희들 안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는 말은 불교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이고 또 그 다음에 계속된 문장은 『법화경 방편품』의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다 『도마복음서』의 존재는 예수의 사상이 불교 사상 그 중에서도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을 역설한 『법화경』과 유사하다. 유태교의 토양에서는 이러한 사상이 발생할 여지가 없으므로 불교의 『법화경』사상이 실크로드를 거쳐 이스라엘에까지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예수 자신이 인도와 간다라, 티벳트에서 배워 왔을 가능성도 있다.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p27, 가이아, 1999 ]

이러한 불교적인 색채들이 비단 영지주의 복음서뿐 아니라 필자가 앞에서 Bible과 불경을 비교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소위 정경(正經)으로 분류해 놓은 복음서에서조차도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불교적인 요소들을 빼어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예수가 영적인 스승이었다기보다는 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으며, 종말을 예언한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뿐이다.[ 루이아모르著, 류시화譯 <성서 속의 부다> p257 ]

다음의 비교표[ 루이아모르著, 류시화譯 <성서 속의 부다> p251~3 ]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관련된 불경의 내용

2:8 ~14
목자들이 천사를 보다
본생경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

21~24
할례와 이름짓기
이름 지어주기 의식

25~35
시므온의 예언
아시타의 예언

4:1 ~13
유혹, 금식, 사탄과의 대화
불본행집경
고오타마의 금식과 악마 마라와의 대화

6:20~22
팔복의 가르침
간법165~68
진정한 행복

27~36
분노하지 말라
280~81
분노하지 말라

37~38
판단하지 말라
271~72
판단하지 말라

39
장님의 인도와 개천에 빠짐
무문 9.7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짐

43~45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간법 258
어리석은 자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46~49
잘 지어진 집과 나쁘게 지어진 집
간법 219~220
지붕이 잘된 집과 좋지 못한 집

7:36~38
예수의 발아래 엎드린 여인
불본행집행
고오타마의 발 아래에 엎드린 여인

9:28~29
모습의 변화와 얼굴의 빛남
장아함경 16
고오타마의 피부가 밝게 빛나다

57~62
집 없이 사는 것이 좋다
법구경 91~2
집없이 사는 생활

10:1
칠십 명의 선교 사업
율장
육십 명의 사명

11:34
눈은 등불이다
무문 22.5
등불을 든 현명한 사람

37~39
내면의 사악함
간법 2
내면의 사악함

12:16~21
하늘의 보물을 갖지 못하다가 갑자기 죽은 부자
무문 1.20~22
하늘에 보물을 간직하지 못한 부유한 바보는 죽을 수밖에 없다

22~31
걱정하지 말라
법구경 92~3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

33
도둑맞을 염려가 없는 하늘의 보물
무문 10.11
도둑으로부터 안전한 하늘의 보물

15:11~32
탕자의 비유
법화경4
탕자의 비유

16:13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무문 13.5
니르바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 간법: 간다라어 법구경, 무문:무문자설경


예수님과 부처님의 마지막 생애를 나름대로 비교해보세요.


열 반


부처님의 나이도 여든이 되었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 강가강을 건너 밧지족의 서울인 베살리에 이르렀을때 장마철을 만났다. 그 해에는 인도 전역에 심한 흉년이 들어 많은 수행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내기가 어려웠다. 여럿이 한데 모여 밥을 빌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베살리 근처에 각각 흩어져 지내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아난다만을 데리고 벨루바 마을에서 지내시게 되었다. 이때 부처님?혹심한 더위로 몹시 앓으셨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통을 참으면서 목숨을 이어가셨다. 병에서 회복한 지 며칠 안된 어느날 부처님은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계셨다. 아난다는 곁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께서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부처님의 병환이 중하신 것을 보고 저는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교단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없이 이대로 열반에 드실 리는 없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 나는 이제까지 모든 법을 다 가르쳐 왔다. 법을 가르쳐 주는 데 인색해 본 적이 없다. 이제 나는 늙고 기운도 쇠했다. 내 나이 여든이다. 낡아빠진 수레가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내 몸도 겨우 움직이고 있다."

부처님은 베살리 지방에 흩어져 있는 비구들을 모이게 한 뒤 석 달 후에는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하셨다.그 날 부처님은 거리에 걸식하러 나갔다가 거리의 여기저기를 돌아보시며 이것이 베살리를 보는 마지막이 라고 곁에 있는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베살리를 떠나 파바라는 고을에 이르셨다. 여기에서 금세공(金細工) 춘다가 올리는 공양을 드시고 다시 병을 얻게 되었다. 이때 춘다가 올린 음식은 부처님에게 올린 마지막 공양이 되었다. 이 공양을 마치자, 부처님은 고통을 참으시면서 쿠시나가라로 다시 길을 떠나셨다. 많은 제자들이 걱정에 잠겨 뒤를 따랐다. 이 길이야말로 부처님이 걸으신 최후의 길이 되고 말았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하자 부처님은 아난다에 게 말씀하셨다.

"아난다,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해 눕고 싶다. 저기 사라수 아래에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아 다오. 나는 오늘 밤 여기에서 열반에 들겠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말을 듣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처님은 한쪽에 가 울고 있는 아난다를 불렀다.

"아난다, 울지 말아라. 가까운 사람과 언젠가 한번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인연이다. 한번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너는 그동안 나를 위해 수고가 많았다. 내가 간 뒤에도 더욱 정진하여 성인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여라."

아난다는 슬픔을 참으면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 그 몸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출가 수행자는 여래의 장례 같은 것에 상관하지 말아라. 너희는 오로지 진리를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여래의 장례는 신도들이 알아서 치러 줄 것이다."

그날 밤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말라족 사람들은 슬퍼하면서 사라수 숲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쿠시나가라에 살던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도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평소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허둥지둥 사라수의 숲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님을 번거롭게 해드려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은 지금 피로해 계십니다."

하고 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수바드라를 가까이 오도록 이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말아라. 그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그는 내 말을 들으면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수바드라를 위해 설법을 들려 주셨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것이다. 이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시간이 가까와 온 듯했다. 부처님은 무수히 모여든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물어보셨다.

"그동안 내가 한 설법의 내용에 대해서 의심나는 점이 있거든 묻도록 하여라.승단이나 계율에 대해서도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제자들은 한 사람도 묻는 이가 없었다. 부처님은 거듭 말씀하셨다.

"어려워 말고 어서들 물어보아라. 다정한 친구끼리 말하듯이 의문이 있으면 내게 물어보아라."

이때 아난다가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수행자들 중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문을 지닌 사람이 없습니다."

아난다의 말을 들으시고 부처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라.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에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라. 함께 내 교법(敎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道)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 말씀을 남기고 부처님은 평안히 열반에 드셨다. 진리를 찾아 왕자의 자리도 박차고 출가하여 견디기 어려운 고행 끝에 지혜의 눈을 뜬 부처님, 사십 오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해 몸소 자비를 구현한 부처님은 이와 같이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육신의 나이 여든으로 이 세상을 떠나갔지만 그 가르침은 어둔 밤에 등불처럼 중생의 앞길을 밝게 비추고 있다. 이 지상에 인류가 살아 있는 한부처님의 가르침도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세계관과 나름대로 비교해보세요.


불교의 세계관

불교에서는 창조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창조신이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그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는지 하는 물음에 매달려서 밤새도록 입씨름을 한다고 하여도 그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상상과 추측을 바탕으로 출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보고, 듣고, 먹고, 느끼는 현실세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대한 문제부터 꼼꼼하게 따져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음들을 해결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求? 그 광활한 우주가 끝이 있는지 없는지, 이런 우주를 누가 만들었는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바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내가 산다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나는 무엇인가와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산다는 것은 쉼 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펴봅시다. 우리가 눈으로 무얼 보고 있다는 것은, 바로 눈을 통해서 내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푸른 하늘의 구름도, 바다에 펼쳐지는 수평선도 모두 눈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알게 됩니다. 광활한 우주의 수많은 별들도 눈을 통해서 만나고, 아주 작은 생물들의 움직임도 눈으로 알게 됩니다. 눈으로 만나서 알게 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만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런 만남은 눈이 아닌 귀를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소리들과 만나게 되고 그 소리를 통해서 갖가지 다양한 소리들의 세계를 알게됩니다. 우리는 귀로 듣는 소리의 세계와 눈으로 보는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시금 우리는 코를 통해서 여러 가지의 냄새를 맡게 되고 그 냄새들이 서로 다른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입으로 들어와서 우리와 만나는 다양한 음식들을 혀로써 그 맛을 보고, 그것이 짠지 신지 매운지 하면서 음식의 맛을 알게 됩니다. 이것 또한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통해서 덥다거나 춥다거나 아니면 부드럽다거나 딱딱하다거나 하는 촉감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렇게 끊임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며, 그 만남을 통해서 무언가를 자꾸 알아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 만나서 만들어진 경험세계 이외에도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 의지는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라는 특질을 나타냅니다. 이와 더불어 자연은 객체적인 존재로서의 특징인 법(法)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을 우리가 우리의 의지(意志)를 통하여 각각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함께 생각을 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엇일까요? 과연 태초에 창조신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고 믿어야 할까요? 잘 알 수 없는 것이니 믿어야 한다는 태도는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세계는 여기 있는 나와 그리고 나와 만나는 모든 것들을 모두 합한 것을 세계, 즉 일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즉 일체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 즉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성질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대체로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첫째,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변한다(諸行無常)”는 것입니다. 거대한 우주에서 작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상(無常)이란 말을 ‘덧없다’거나 ‘허무하다’라는 뜻으로 알고, 마치 불교의 가르침이 허무주의인양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은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이미 생성된 것이 파괴된다는 뜻이 있는가 하면, 아직 생성되지 않은 것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한 예로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만 무상이 아니라 말기 암환자가 병을 극복하고 건강해진 것도 무상입니다. 만일 무상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고,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물이 변하고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그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닐 뿐더러, 또한 죄악의 대가도 아닌 것입니다. 또한 무상이란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닌 만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법(法)인 것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은 어떤 일에 몰두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망아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무아(無我)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법은 무아’라고 할 때 이것이 인간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게도 다 적용됨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의 원인과 근거가 된다는 연기의 가르침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이 연기적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무상의 진리에서 본다면 어떤 존재도 불변의 실체나 자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존재를 유지시키는 원인과 조건도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딸기잼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저장을 잘못하면 부패하고 썩어버리게 되어 쓰레기로 변하고 맙니다. 또한 딸기잼은 딸기와 설탕과 향료와 굳게 만드는 물질 등 여러 가지가 함께 모여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를 딸기잼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성, 유지되며 그러한 모든 것은 고정 불변하는 성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무아라고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셋째,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법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해서 마치 불교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로 오해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괴로움, 고(苦)란 말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일체(一切)가 모두 고(苦)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불편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힘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한 마디로 고(苦)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즉 일체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이라는 진리 속에 서 있는 존재가 가진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한 개체를 지속시키려고 ‘힘들이는’ 모든 작용까지도 함축한 것이 바로 고(苦)인 것입니다. 꽃이 피는 것도, 어린아이가 배고파 우는 것도,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고(苦)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따라서 ‘일체의 모든 것이 고(苦)이다’는 결코 염세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혀낸 법(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법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해서 마치 불교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로 오해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괴로움, 고(苦)란 말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일체(一切)가 모두 고(苦)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불편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힘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한 마디로 고(苦)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즉 일체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이라는 진리 속에 서 있는 존재가 가진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한 개체를 지속시키려고 ‘힘들이는’ 모든 작용까지도 함축한 것이 바로 고(苦)인 것입니다. 꽃이 피는 것도, 어린아이가 배고파 우는 것도,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고(苦)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따라서 ‘일체의 모든 것이 고(苦)이다’는 결코 염세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혀낸 법(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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