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자와 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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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의로운 자와 폭군

가로수 0 1,675 2007.07.14 17:55
의로운 자와 폭군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죄가 없고 의로운 자이다.
유대인 제사장들의 선동에 따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간 예수는 허위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런데 그보다 5세기 전에 씌어진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바카이>에도 똑같은 신화적 주제가 등장한다.
예루살렘의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한 자로서 장발에 수염을 기른 과묵한 이방인이다.

복음서에서 유대인 제사장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그의 가르침은 백성을 미혹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바카이>에서,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를 믿지 않은 폭군이다.
그는 ‘이 땅을 오염시킬 새로운 질병’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디오니소스를 꾸짖으며, 부하들을 보내 죄가 없는 신인을 체포하게 한다. 이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자마자 돌로 쳐 죽여라

그는 바쿠스의 미스테리아를 테베에 전파한 것을 후회하리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에 깜짝 놀란 유대인 제사장들처럼,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의 신성한 출생 이야기를 듣고 분노를 터뜨린다.



그게 어떤 인간이든 간에, 그의 오만불손함은

참람하지 아니한가? 목에 밧줄을 걸겠다는 짓이 아닌가?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는 잠자코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를 체포한 병사가 펜테우스 왕에게 말한다.



그를 체포하여 데려왔나이다. 폐하,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그 짐승은 얌전하였고,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나이다.

그저 두 손을 내밀어 결박을 당했고, 낯빛도 바뀌지 않았나이다.

화사한 얼굴로 미소를 띠며 우리에게 말하기를,

‘나를 묶어 체포하라. 너희를 전혀 수고롭게 하지 않으리라.

다만 너희를 기다렸도다.’ 그러하니 저는 저절로

당황하여 그에게 말했나이다. ‘선생이시여, 용서하소서,

선생을 체포하고 싶지 않으나, 이것은 왕의 명령입니다.’



병사는 디오니소스의 기적을 목격했다면서 펜테우스 왕에게 경고한다.
‘주인이시여, 이 남자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며 이곳에 왔나이다’.
 
그러나 왕은 디오니소스를 심문한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는 왕에게 절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예수가 대답한다(요한복음19:11).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라.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도 펜테우스의 위협에 이렇게 답한다.
‘정해진 일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
박해자들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누가복음 23:34)고 예수가 말한 것처럼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에게 말한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네가 정작 무엇인지도 너는 알지 못한다’.

예수가 십자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8).
자기를 처형한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또 말한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에 무너지라’하며 작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누가복음 23:29-30)



이와 마찬가지로, 형으로 끌려가는 디오니소스는 신이 복수하리라고 겁을 주며 말한다.



그러나 경고하노니, 죽었노라고 너희가 말할 디오니소스는

이 신성모독의 복수를 하기 위해 속히 돌아올 것이다.



미스테리아 전통을 지킨 여러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의로운 자’였다.
그들은 폭군들에게 부당한 죽음을 당했다 소크라테스가 한 예이다.
예수처럼 그는 백성을 미혹케 한다고 고소를 당했다.
 
아테네 법에 따르면 그러한 ‘죄’에 대한 벌은 사망이었다
---재판관들이 수용할 만큼의 벌금을 내면 사형을 면할 수는 있었다.
유월절에 죄수 1명을 풀어 주는 관습이 있어서 예수를 풀어 주겠다고 제안한 빌라도처럼, 아테네 법정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벌금을 내고 조용히 추방됨으로써 기술적으로 사형을 피하기를 바랐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박해자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모욕적으로 적은 금액인 1미나mina만을 벌금으로 내겠다고 함으로써 재판관들로 하여금 사형을 선고하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은 30(냥)’ 을 대신 내겠다고 제안했다.
그것은 참되게 자기 원칙에 따르고자 한 소크라테스의 소망에 배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제는 복음서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예수를 배신한 대가로 유다는 ‘은 30(냥)’을 받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처형 방식대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임박한 처형에 대해 묵상하던 예수는 이렇게 기도한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거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흘 만에 부활할 거라는 예언을 확신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심문을 받을 때 예수가 한 행동은 미스테리아 현자가 취한 행동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예수는 권력자들의 위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견유학파(犬儒學派 : 안티스테네스가 창설한 그리스 철학의 한 파. 무욕의 자연 생활을 이상으로 함. 퀴닉 학파라고도 함)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기존 권위에 적대적이며, 종교 계율을 거부했고, 왕과 관료들을 조롱’한 것으로 유명했다.
로마 당국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순교한 철학자가 많았는데, 예수처럼 그들 또한 기꺼이 처형당했다.

스토아 학파의 현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썼다.
‘내 몸이든 재산이든 모두 가져가라. 그러나 내 도덕적 목적을 지배하려고 하지는 말라’.
 
그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해서 처형을 받게 된 한 철학자 얘기를 남겼다.
‘너는 네 할 일을 하라. 나는 내 할 일을 하겠다. 그러면 무슨 불평할 것이 있겠는가’.
 
BC 4세기 무렵에, 플라톤은 ‘의로운 자’에게 예상되는 운명을 이렇게 기술했다.
‘의로운 자는 채찍질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극단적인 수난을 당한 후, 이윽고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의로운 자’ 예수의 수난 또한 그러한 예상과 일치한다.

‘부당하게 고소된 의로운 자’는 고대세계에 허다해서, 예수가 유일무이한 수난을 당했다고 주장하려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켈수스는 통렬하게 비웃었다.
그는 위트와 풍자를 동원해서 이런 제안을 했다.
---그들이 만일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자 했다면, 역시 ‘영웅적인 죽음’을 당한 수많은 유명 이교도 현자들 가운데 1명을 선택해서 종교의 기초를 세웠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면, 영웅적인 죽음을 당해서 그것으로 인해 존경 받은 옛 사람 --- 이미 한 신화의 주인공이 된 사람---가운데 1명을 중심으로 해서 당신들의 종교를 세우는 것이 휠씬 더 좋았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나 아스클레피오스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약하다면, 오르페우스도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오르페우스는 선하고 성스럽지만, 가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 사람을 다른 종교가 이미 써먹어 버렸다면?
글쎄, 그렇다면 아낙사르코스는 어떨까?
그는 몰매를 맞으면서 정면으로 죽음을 직시한 사람이다.
그는 박해자들에게 말했다. ‘때려죽여라.
 
그러나 너희가 때리는 것은 아낙사르코스가 아니다.
아낙사르코스라는 빈 자루일 뿐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사람은 여러 철학자들이 이미 주인으로 모셔 버렸다.
글쎄, 그렇다면 에픽테토스는 어떨까?
그는 주리를 트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빙그레 웃으며, 완전한 평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부러뜨려라: 다리가 부러지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러라고 했지.’
당신들의 신도 형벌을 받을 때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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