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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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로고스

가로수 0 1,291 2007.07.14 17:39
로고스

흠정역 <성서>(17세기 초에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지지를 얻어 계획 발행된 영역 <성서>)에 의하면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1-4).



이러한 문장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묘한 감동을 느끼면서도 도대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교도 철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위 문장의 뜻을 환히 알 수 있다.

위의 ‘말씀Word’은 그리스어 ‘로고스Logos’를 번역한 말이다.
로고스 개념은 유대인에게 전혀 낯선 것이었고, 전적으로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BC 6세기에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에 공유된 로고스’를 발견했다(C. H. 칸은 이렇게 평했다. ‘지혜는 자기에 대한 앎에서 비롯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에 대한 앎을 찾다가, 자신의 내면에 우주와 맞먹는 로고스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주)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썼다.



나 자신에게가 아닌 로고스에 귀를 기울인 결과, 현명하게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교도 현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설파했다.
‘철학자들의 로고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로고스를 통해 선언한 것과 같은 평화를 우리에게 약속한다’.
로마인 비트루비우스는 BC 27년경에 이렇게 썼다.

‘내가 로고스를 믿는다면 아무도 내가 그르다고 생각지 못하리라’.

클레멘스도 그 점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들이 신성한 로고스를 약간은 엿보았다고 기꺼이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교도의 전설적인 현자 오르페우스의 선언을 인용했다.
‘신성한 로고스를 보라. 인생의 좁은 길을 가며 로고스를 바라보라. 세계의 위대한 지배자, 우리의 불멸의 왕인 로고스를’.
 
그러나 이런 이교도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문헌에 이미 이런 개념이 담겨 있다.
그문서는 그리스도가 오기 2천500년 전쯤에 씌어졌다!

그러한 고대의 로고스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대 그리스에서 로고스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우리의 용어인 ‘말씀’의 뜻으로는 쓰이지 않았다.
교부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는 로고스의 여러 의미 가운데 ‘생각중의 생각’이라는 의미로 로고는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최초의 생각인 셈이다.

전설적인 이교도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도 정확히 같은 뜻으로 그 말을 사음했다.
그는 로고스, 곧 생각 중의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비롯한다고 말했다.
그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위대한 마음Mind에 떠오른 첫 생각이며 그 생각으로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다고 보았다.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또한 그렇게 보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과 로고스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로 의인화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들’ 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이교도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존재의 다른 국면이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패러독스는 요한의 말에도 나타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고대 이교도의 교리이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또한 로고스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했고, 그 밖에도 여러 현자들이 그런 말을 해 왔다.
 
마음과 생각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사실상 하나인데, 서로 분리되면 둘로 나타난다고 헤르메스는 설명한다.
BC 6세기에 헤라클레이토스도 같은 말을 했다.
‘그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존재이다’.

클레멘스는 에우리피데스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묘하게도 미리 알아맞혔다’고 인정했다.

하나님과 로고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불가사의한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아들son은 하나님의 의식이다. 아버지는 다만 아들에게 반영된 세계를 본다.



로고스는 스스로를 의식하는 하나님이다.
또 로고스는 우주의 한영혼0ne sou1인데, 만물을 통해 의식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스스로를 발견하려고 했다가 ‘만물에 공유된 로고스’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본질적으로 우리 모두가 공유한 정체성이 바로 로고스라는 것을 그는 발견했던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개체로 이루어졌지만 각기 한 영혼One soul과 결속되어 있듯이, 하나의 무한한 생명체인 우주 또한 한 영혼One Soul ---하나님의 로고스---과 결속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가 로고스의 화신이라고 요한이 말하듯이, 이교도 입문자인 플루타르코스 또한 오시리스가 ‘초월적이며 고통을 느끼지 않는 로고스 자체’라고 가르쳤다.
이교도에게 오시리스-디오니소스가 곧 로고스이듯 예수 그리스도와 로고스를 동일시함으로 요한은 예수가 인격화된 우주의 한 영혼One soul이라는 것을 명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안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공유한 신성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시대에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철학적 원리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낳고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썼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인과 이교도의 로고스에 대한 이해에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앞서 말했지만, 이교도 로고스의 화신인 신인의 이야기는 ‘신화’인 반면 철학적 원리의 화신인 예수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 차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 철학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교도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육체의 의지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다만 하나님의 의지로 태어났다고.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은 오직 한 인간만이 말 그대로 육신이 된 로고스였다고 믿는다.
그것이 고대세계의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인을 나누는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교도들에게는 우리 모두가 공유한 로고스가 단 하나의 인간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리스도교인의 로고스 개념이 이웃 이교도의 개념과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사렛의 한 목수가 실제로 로고스의 화신이며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러한 주장이 정말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 수세기 동안 논란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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