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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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은 없다

가로수 0 1,060 2007.07.14 16:40
정통은 없다

전통적으로 주도 면밀하게 조장되어 온 영지주의자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이 속한 정통파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변방에서 활동한 광신적 극단주의자들의 작은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물론 반영지주의자들이 만든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흥망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아시아와 이집트에 두루 존재했으며, 로마에 중심지를 두고, 때로 서구 여러 지방에도 자리를 잡았다’.
 AD 첫 몇 세기에는 사실상 ‘교회’라는 게 없었고 서로 경쟁하는 종파만 있었는데, 그종파 가운데 하나가 문자주의자들이었다.

문자주의자인 순교자 유스티누스, 비타협적인 영지주의자 마르키온, 그리고 영지주의/문자주의의 분열을 해소하고자 한 발렌티누스, 이들 세 사람은 정확히 같은 시대에 로마에 살았던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스승들이었다.

교인들 공동체가 가지각색으로 나뉘어진 것은 2세기 중반이었다.
그런데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위대한 그리스도교 영웅으로 기억되기에 이르렀고, 다른 두 사람은 하찮은 이단자로 배척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전에는 발렌티누스와 마르키온이 유스티누스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자기 이름을 딴 그리스도교 운동을 일으켜 수세기 동안 크게 번성했다.

영지주의가 4세기와 5세기에 혹독한 박해를 받기 전까지는, 초기그리스도교에서 영지주의자들이야말로 대다수 교인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은 지성인들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컨대 발렌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철학자이자 시인이었으며, 이집트의 주교로 선출된 사람이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막강한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레나이우스는 문자주의자 공동체의 수많은 주교와 사제, 과부, 순교자가 발렌티누스파의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성격이 편협한 테르툴리아누스조차도 발렌티누스가 ‘지성과 설득력을 갖춘 유능한 인간’ 이라는 것을 시인했다.
마찬가지로, 문자주의자 제롬은 마르키온이 ‘진정한 현자’ 라는 것을 시인했다.

한편 문자주의자들의 영웅인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로 여겨지기를 필사적으로 원했다.
그러나 수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 학파에 가입하지 못하고 퇴짜를 당했다. 그런 직후에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영지주의 현자들은 수많은 복음서와 영적 문서를 집필한 것으로 추앙되었다.
물론 신약의 마가복음으로 개작된 예수 이야기의 원래 버전을 쓴 것도 그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서들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단것도 그들이었다.

117년경에 활약한 바실리데스는 주석서 24권을 쓴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후대에 정경(正經)이 된 복음서들을 언급한 적이 없다.
바실리데스는 또 직접 복음서 하나를 썼고, 인도 구루들의 가르침에 관한 책도 썼다!
약 170년경에 프톨레마이오스와 헤라클레온은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신약<성서>에 대한 최초의 주석 역시 영지주의자들이 쓴 셈이다.

이와 달리 문자주의자들은 실질적인 문서를 집필한 게 거의 없다.
다만 이단자들을 공격하는 글만 집중적으로 썼다.
이러한 반영지주의 저술이 씌어지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중반 무렵이었다---문자주의는 그때 비로소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4세기의 교회 선전자 유세비우스의 말에 따르면, 최초의 반 이단저술가는 아그리파 카스토르(활약 시기 135년경)라는 인물이었다.
물론 순교자 유스티누스(150년경)도 반 이단 저술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저술은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후대의 정통과 그리스도교인들이 보기에 그 저술이 너무나 ‘반정통적’ 이었기 때문이다.

이단자를 논박하는 글 가운데, 2세기 말에 씌어진 이레나이우스의 저술보다 앞선 것은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이후의 모든 논박은 다소간에 이레나이우스를 기초로 삼았고, 그의 촌평과 편견을 그대로 베껴 쓰기만 하는 일도 빈번했다.

그러나 이단자를 공격한 이런 문서들은 정통 그리스도교에 대해 명확한 진술을 하지 않는다.
AD 첫 몇 세기에는 우리가 오늘날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다만 문자주의를 정통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단지 문자주의자들이 후대에 교회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첫 몇 세기에는 여러 종파가 서로 다른 시기에 크고 작은 세력을 떨쳤고, 가장 광신적인 정통과 그리스도교인들조차도 결국에는 이단자로 낙인 찍힌 경우가 허다했다.

3세기 전반기에 문자주의자인 히폴리토스는 한때 노예였던 영지주의 스승 칼리스투스가 로마에 제안한 정책을 거절한 적이 있다.
칼리스투스는 신도들이 노예와 결혼하는 것을 인정해 주길 원했고, 죄의 사면을 확대해서 성범죄자도 용서해 주기를 원했다.

히폴리토스는 칼리스투스를 일반 범죄자로 몰아붙였지만,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 대다수는 그를 스승으로 존경했고, 주교로 선출했다. 그러자 이단자 사냥꾼 원조인 히폴리토스는 이제 그가 그토록 열심히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헌신했던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힐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문자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변자들 일부는 실제로 생애 말년에 영지주의로 돌아섰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제자였던 타티아노스가 그랬고, 심지어 광신적인 이단자 사냥꾼 테르툴리아누스조차 그랬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가 이끈 영지주의자 집단에 들어갔다.
몬타누스는 전에 이교도의 신인 아티스 미스테리아의 사제였다.

이제 테르툴리아누스는 전에 그가 이단자를 공격했던 것과 똑같은 독설로, 심적 수준의 교인들만 모인 ‘정통’ 교회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영적인 사람들을 위한 영적인 교회’가 아니라 ‘수많은 주교’ 들의 교회일 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과거 여성혐오증을 돌이켜보면, 몬타누스의 무리에 여성 사제가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권위자는 이렇게 썼다.



몬타누스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리스도교 교리는 발랄하고 자극적인 여성들의 감독 아래 전혀 다르게 발전했을 것이다.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 무리를 떠나 자기만의 종파---테르툴리아누스파---를 세웠다.

놀랄 것도 없지만, 전통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영지주의로 개종한 것은 교묘히 은폐되었다.
그리고 그가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한 글만 무수히 복제되었다.
문자주의 교회에서는 그의 저술을 모범적인 문헌으로 간주해서 다른 모든 종파를 말살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정통’ 운운했다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교인들 다수가 공통으로 지닌 어떤 견해가 항상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견해가 정통이었는지를 시사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채택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정통이 되었을 뿐이다.

비로소 그때에 문자주의 종파는 자신들의 특수한 견해를 강화할 수 있는 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영지주의는 수세기 동안 계속해서 번창했다.
정통으로 간주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 다수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항상 유력한 주교들의 견해를 반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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