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들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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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주교들의 교회

가로수 0 1,217 2007.07.14 16:39
주교들의 교회

영지주의자들은 입문자에게 그노시스를 제공했다.
즉 이 세계라는 환상너머의 진리를 지금 이 자리에서 영적으로 체험케 했다.
문자주의자들은 복음서 이야기의 역사성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곤혹스러운 딜레마에 빠졌다.
예수 이야기와 같은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사실을 기록한 역사라고 누구나 믿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2세기 말의 저술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인했다
---보통의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한 인간이 무덤에서 육체적으로 되살아났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다고.
이러한 합리적인 의심에 대해 테르툴리아누스가 내세울 수 있었던 주장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진실이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는다’.
역사책에서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라고 추앙되는 사람이 고작 그런 말밖에 하지 못했다!

예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하기 위해 문자주의자들은 영적 계보를 고안해 냈다.
그래서 문자주의자들이야말로 사도들의 직계 제자라고 주장했다.
더러는 150년 전에 죽은 사도에게 직접 배운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당시에 살아 있던 자들의 개인적 증언으로써 예수 이야기의 역사성이 증명된다며, 그 증언은 직계 제자인 주교들에게 충실하게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이처럼 조작한 계보를 강력한 무기로 사용했다.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자들이 전혀 모르는 은밀하고 신성한 비밀을(미스테리아를)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서 문자주의자들은 오직 자기들만이 12사도에게까지 소급되는 사도 계보의 대표자들 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문자주의자들은 주교들이 12사도와 동일한 권위를 부여 받은 자라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의 권위가 부활을 처음 목격한 베드로의 권위를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자주의자 주교들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합법적인 근거로, 그들이 12사도의 계승자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래서 권위에 반대하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아예 그리스도 자체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스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위조된 편지에서 저자는 반감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는 ‘성급하고 자의적인 사람들’을 비난했다.
문자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주교들에게 권능을 부여했기 때문에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불복종하는 죄를 짓는 자라고 단언했다.
또, 신성하게 부여 받은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나 ‘사망의 형벌을 받는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마찬가지로 이그나티우스가 썼다는 편지에서도 주교는 ‘하나님 대신’ 지배하는 자라고 주장했다.
진실로 독실한 자는 ‘주교를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두려워하고, 복종’ 해야 한다! 주교와 사제와 부제가 없으면 ‘교회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편지의 주인은 또 이렇게 썼다.



그 누구라도 주교 없이는 교회와 관계된 어떤 말도 하지 말라.
주교나, 주교가 임명한 자만이 정당한 영성체 의식을 거행할 수 있음을 알라.
주교가 행하지 않는 영성체 의식이나 세례는 합법적인 것이 아니다.
주교와 함께하는 것은 교회와 함께하는 것이다.
주교에게서 떠난 자는 교회에서 떠난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이다.



이 편지의 주인은, 하나님이 하나이며 유일하기 때문에 교회에도 우두머리는 오직 하나뿐이며, 모두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주교’는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슬로건이 되었다.

그와 달리 영지주의자들의 조직에는 주교나 사제라는 위계 질서가 없었다.
그들은 주교나, 사제나, <성서> 낭송자나, 선지자 등의 역할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제비뽑기를 해서 정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새로 제비 뽑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 각 역할을 맡은 자가 계속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일을 할, 올바른 사람을 하나님이 선택한다고 믿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문자주의자 테르툴리아누스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렇다면 주교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이 된다.
오늘은 부제인 사람이 내일은 <성서> 낭송자가 된다.
오늘 감독자인 사람이 내일은 평신도가 된다.
심지어 그들은 평신도들에게도 사제직을 부여한다.



정통파 교인들이 항구적인 권력 계층을 구축하려고 한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누구나 영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깜짝 놀라서 이렇게 썼다.



나는 이단자들의 소행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조에 따라 얼마나 천박하게 행동하는지, 진지함도 없고 권위도 없고 규율도 없이 얼마나 어리석게 구는지. 무엇보다도 누가 믿는 자이고 누가 이교도인지 알 수가 없다.
 
누구한테나 똑같이 개방되어 있고, 똑같이 듣고, 똑같이 기도한다.
혹시 이교도가 참석하면 이교도와 똑같이 기도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어울리며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다른 교리를 지녔으면서도 그들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뭉치기로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잘난척하며, 모두가 그노시스를 주겠다고 나선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모든 형태의 종교는 원래 남녀가 평등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계속 여자와 남자를 영적으로 평등한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2세기 중반에 문자주의자들은 성별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2세기 말에 여자는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여자를 지도자로 삼는 그리스도교인 집단은 무조건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여자는 교회에서 연설하면 안 되고, 가르쳐도 안 되고, 세례를 주어서도 안 되고, 영성체 의식을 거행해서도 안 되고, 남성의 역할을 분담하겠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영지주의자들이 여신을 숭배하고 여성들이 사제가 되는 것을 적극 장려했던 바로 그 시대에, 지독한 여성 혐오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대변해서 여성을 다음과 같이 몰아붙였다는 것은 참 별난 일이다.



너희는 악마의 출입구이다.
너희는 악마가 감히 공격하지 못한 남성을 유혹한 여성이다.
너희는 모두 이브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여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는 이 시대에도 계속 살아 있느니, 너희의 죄 또한 당연히 계속 살아 있느니라.



2세기 말께 문자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인 자와 아닌 자를 위한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규칙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은 문자주의 신조를 고백해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주교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에게 참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구성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 이상이라고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했다.

<빌립의 복음서>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 밖으로 나왔으면서도 이제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웃는다.
 
신조를 읊조리거나, 심지어 순교를 해도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마태복음 7:16)고 한 말을 인용하며 참된 교회에 속한자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영적 성숙의 증거를 요구했다.

문자주의자 주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그런 개인주의가 그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본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훨씬 더 광적이고 극단적이 되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사탄의 대리인들’ 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촉구하며 이렇게 경고했다.
‘하나님은 모든 이단자들에게 내릴 영원한 불의 형벌을 준비해 두셨다’.
문자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이단자가 되느니 이교도가 되는 게 낫다’는 말을 후렴처럼 읊조렸다.
유난히 광적이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영지주의자들이 ‘식인 풍습’에 빠졌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신약 유다서의 저자는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다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짧고 편집증적인 논법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모두의 구원에 대해 너희에게 간절히 편지하고자 하였으나, 그 대신 이번에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진 믿음을 보존키 위해 힘써 싸우라는 호소의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는 경건치 아니한 자, 이미 오래 전에 유죄 판결을 받기로 정해진 자들이 너희 가운데 몰래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환락의 허락으로 왜곡하고, 홀로 하나이신 우리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그들은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신성모독을 하기까지 한다(유다서 1:3-8)



영지주의자들은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은밀하게 스며든 앎---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들은 ‘기탄없이(염치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愛餐 : 맛있게 먹는 요리) 속의 암초 (유다서 1:12)이고,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1:13)이다.
유다서의 저자는 ‘그들의 몸에 닿아 더럽혀진 옷까지도 혐오하라’(1:23)고 말한다.
디모데서의 저자는 영지주의 가르침을 ‘독한 창질’에 비유한다(디모데후서 2:17)

이에 대해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 교회의 당국자들을 ‘저속한 교회 만능주의자’ 라고 일컬었다.
영지주의 현자 헤라클레온은 문자주의 교회의 도그마를 ‘영양가 없이 정체된 물’에 비유했다---그리스도가 그노시스를 통해 선택된 자에게 준 ‘살아 있는 물’과 대비되는 죽은 물에 비유한 것이다.

<진리의 증언>에서는, 문자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가 누군지 모른다’고 공격한다.
<위대한 세트 신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영지주의자들이 ‘무지한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인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미움을 받고 박해 당한다’고 탄식한다.
 
그런데 박해하는 자들은 ‘말 못하는 짐승들처럼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영지주의 문헌에서 구원자는 ‘온전한 교회의 자유와 순결을 흉내내기 위해 죽은 자의 교리와 거짓말을 주창하는’ ‘거짓 교회(모방 교회)’가 만들어져 왔다고 말한다.

<트리파티테 트락타테Tripartite Tractate>에서는 참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영지주의자들과, 거짓 신인 유대인의 여호와를 섬기는 문자주의자들을 대비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는 평등하게 사랑으로 함께 모여 자발적으로 서로를 돕는다.
 
반면에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서로에게 명령하고 싶어하며, 헛된 야심으로 서로 앞서기 위해 경쟁한다’.
그들은 ‘서로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비판했다.



소위 교회라고 일컫는 수많은 곳에서, 특히 대도시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린다는 지배자들이 우글거린다.
더러 가장 고귀한 예수의 사도라 할지라도 그들과 평등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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