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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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환상설

가로수 0 1,032 2007.07.14 17:20
환상설

이교도의 다이몬/에이돌론 교리는 ‘도케티즘’으로 알려진, 곤혹스러운 영지주의 가르침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살과 피로 된 육체를 지닌 게 아니라,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았지만 마법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처럼 보였다고 믿는 것이 도케티즘이라고 반영지주의자들은 설명한다(백과사전에도 그런 식으로 설명되어 있어서, 영지주의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도케티즘Docetism’은 ‘~인 듯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dokein’ 에서 나온 말인데, 영어로는 ‘Illusionism’ 으로 번역된다.
우리말로는 대개 가현설(假現說)’로 번역되고 있지만, 그것은 문자주의 관점에서 번역된 말이다.
영지주의 관점에 따르면 ‘환상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옮긴이 주)

도케티즘을 믿는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아예 역사적 사건으로 보질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두 부분, 즉 고통을 받다가 죽는 세속적 부분(에이돌론)과, 고통에 초연한 채 이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환상으로 체험하는 영원한 영적 목격자(다이몬)로 이루어져 있다는 신비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신화로 본다.

<빌립에게 보낸 베드로의 편지>를 보면, 예수는 환생한 순간부터 고통을 겪지만, ‘고통의 국외자’로서 고통을 겪는다.
예수로 상징되는, 환생한 수준 높은 자아는 에이돌론이 고통을 겪을 때 함께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초연한 목격자인 것이다.
<요한행전>에서 예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너는 내가 고통을 겪는다고 들었으나, 나는 고통을 겪지 않았다.

나는 고통을 겪지 않는 자였지만, 고통을 겪었다.

나는 못 박힌 자였으나, 수난을 당하지 않았다.

나는 매달린 자였으나, 매달리지 않았다.

내게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예수는 어떻게 고통을 겪는 동시에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가 설명하듯이 ‘나는 인간과 나 자신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그는 초월적인 수준 높은 자아, 곧 다이몬과 동일시되는 존재이며 고통을 겪는 수준 낮은 자아인 에이돌론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영지주의 입문식의 목적은 입문자를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입문자는 물질적 십자가에 매달린 에이돌론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환상으로서 삶을 목격하는 다이몬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영지주의자 예수는 이렇게 가르친다.



네가 어떻게 고통을 겪는지 안다면, 너는 고통을 겪지 않게 되리라.
고통을 꿰뚫어 보라 그리하면 너는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그래서 예수의 에이돌론은 고통을 겪고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예수, 곧 다이몬은 고통을 겪지도 죽지도 않는다.

500년 앞서서 에우리피데스는 펜테우스 왕이 디오니소스를 결박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결박하지 못한 것으로 그렸다.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를 우롱했다.
그는 나를 결박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붙잡지도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랬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베드로 계시록>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두 손과 발에 못 박혀 ‘기뻐하며 웃는’ 예수를 본다.
예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너는 나무에 매달려 기뻐하며 웃는자를 보느니, 그는 실아 있는 예수니라.
그러나 저들이 못을 박은 두 손과 발을 지닌 이 자는 그의 육체적 부분이니, 이 자는 수치를 당하는 대리적 존재이며, 모습이 닮은 자이니라. 그와 나를 보라.



일부 이교도 신화에서도 에이돌론을 상징하는 대리 인물이 고통을 겪다가 죽는다.
신인은 고통을 겪지도 죽지도 않는다.
<바카이>에서 ‘고통당하는 인간’을 뜻하는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 대신 나무에 매달려 사지가 찢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 영지주의 신화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은 구레네Cycrene(키레네 : 북아프리카 리비아 동부 지역) 사람 시몬이다.
예수는 멀리서 웃으며 지켜본다.
<위대한 세트 신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은 또 다른 시몬 이었다.
가시 면류관을 쓴자는 또 다른 자였다.
나는 높은 곳에서 다만 기뻐하며 그들의 무지를 비웃었다.



구레네의 시몬은 이교도 신화 속의 펜테우스 왕처럼 고통을 겪다가 죽는 에이돌론을 상징한다.
웃고 있는 예수라는 인물은 승리를 거둔 디오니소스와 같은 다이몬(목격하는 영혼)을 상징한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는 영혼이기에 고통을 겪지 않았다’.
구레네의 시몬이 대신 고통을 겪는 동안 예수는 웃었다.
‘그는 누구에게 붙잡힐 수도, 보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마법을 써서 고통을 피했다고도 믿지 않았다.
혹은 좀더 사악한 마법을 써서, 구레네의 시몬을 자기 모습으로 둔갑시켜 시몬이 자기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동안 멀찍이 안전한 곳에서 웃고 서 있었다고도 믿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러한 교리는 문자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혐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그런 주장은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잘못 안 것이다---아니,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사실상 도케티즘, 곧 ‘환상설’에 따르면, 십자가 처형 이야기는 다만 고대 이교도의 다이몬/에이돌론 교리가 암호화되어 있는 입문식의 비유일 뿐이다.

신약의 마가복음(15:21)에는 이러한 가르침의 파편이 살아남아 있다.
---난데없이 구레네의 시몬이 끌려 나와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다.
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시몬 ‘베드로’, 곧 ‘반석’ 이라고 불린 제자와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몬 베드로는 여러 영지주의 신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때의 시몬은 에이돌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영지주의 교리의 메아리는 무슬림의 <코란>에도 살아남아 있다.
<코란>에서는 예수의 가상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으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다.
그들을 위한 하나의 비유로 그런 얘기가 만들어진 것이다(수라 4: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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