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초기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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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가장 초기의 증거

가로수 0 1,432 2007.07.14 17:14
가장 초기의 증거

사도행전 이야기는 이 정도로 접어두자.
그럼 신약의 베드로서, 야고보서, 요한서는 어떨까?
그것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안타깝게도 현대의 고전학자들은 이들 편지가 초기 교회 내부의 이단적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훨씬 후대에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런데 탁월하게 위조하지도 못했다.
번역자인 A. 가우스가 베드로후서에 대해 썼듯이. 이 편지에서는 사도들이 이미 죽어서 묻혔다는 듯이 사도들을 ‘조상들’ 이라고 일컫는다(베드로후서 3:4에서 ‘조상들이 잔[죽은]후’ 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가우스와 이 책의 사람은 이 ‘조상들’이 곧 사도들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아무튼 베드로후서 3:2에는 ‘사도들’이 전한 구주의 명을 환기시키겠다는 말이 나온다. ‘사도’인 베드로가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베드로가 고작 다른 사도들의 말을 환기시키기나 하는 정도의 존재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옮긴이 주).

따라서 이것은 분명 베드로의 글이 아니다.
다만, 반이단적 메시지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베드로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베드로전서와 후서는 베드로와 바울의 우호적 관계를 보여 주기 위해 3세기에 위조된 것이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 사이가 나빴다.
베드로후서 3:15에는 낯간지럽게도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 이라는 말이 나온다.
유세비우스는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와 삼서를 문제가 많은 것으로 간주했고 디디무스는 AD398년에 베드로후서를 위서라고 선언했다 : 저자 주).
베드로서는 널리 위서로 간주된 탓에 신약의 정경(正經)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바울의 편지는 어떨까?
적어도 바울만큼은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학자들은 ‘목희 서간’ 으로 알려진 그의 후기 편지들, 곧 디모데서와 디도서가 위조된 것이라고 믿는다.

후기 편지는 초기 편지와 내용이 모순된다.
다른 사도들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목회 서간은 교회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AD 2세기에 씌어졌다.
 
그러나 초기 편지들은 그것이 스크랩 편집되고 추가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울이 쓴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바울은 AD 70년 이전에 편지를 썼다.
그러니 바울의 편지는 사실상 네 복음서보다도 먼저 씌어진 셈이다.
바울의 편지야말로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 문서이며, 기본 내용에 있어서 일부 편지는 바울의 진짜 편지다.
적어도 이 편지만큼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가치가 있다!

그러나 너무도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그런 관심은 전적으로 신비한 가르침에 중점을 둔다.
바울은 스스로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밟힌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는(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얻은 것이다’(갈라디아서 1:12).
바울은 예루살렘이나 빌라도를 언급하지 않는다.

나중에 더 깊이 살펴보겠지만 바울은 ‘관원들’, 혹은 ‘이 세대의 지배자들’---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악마의 세력---이 선동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한다.
 
사실상 바울은 예수를 어떤 역사적 시대나 장소와 관련시키지 않는다(신빙성이 없는 목회 서간 가운데 하나인 디모데서에서는 빌라도를 언급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는 다만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말할 뿐이다 : 저자 주).
바울의 그리스도는 이교도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시대를 초월한 신화적 인물이다.

바울은 나사렛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으며, 나사렛 예수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세례 종교로 묘사하지만, 세례 요한을 언급하지 않는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특정 산에서 설교하는 예수, 그의 비유,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로마 관헌과의 충돌 등에 대해 그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심지어 주기도문도 모른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하며,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8:26)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개역 <성서>에는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애매하게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바울이 실제로 얼마 전에 죽은 메시아를 섬긴 인물이었다면, 자신의 전도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사도들을 찾아갈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찾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또 자신의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예수가 신화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면, 바울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정식으로 인용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생애를 결코 언급하지 않았고, 예수의 말을 단 한 번만 인용한다.
그런데 그 인용문은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영성체 의식을 치를 때 사용하는 공식 문구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린도전서 11:24-25).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그는 예수가 ‘잡히시던 밤에’, 혹은 다른 번역에 의하면 ‘배반당한 밤에’ 그런 말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쪽 번역이든 간에, 그런 번역은 예수의 역사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스어 원문을 왜곡한 것이다.
 
원래의 그리스어로는 ‘넘겨지는delivered up’ 때에 그런 말을 했다.
넘겨진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음으로 넘겨지는 자, 곧 파르마코스 희생양)의 운명을 언급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바울은 예수를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의 권위로 윤리적 가르침을 베푼다.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싶을 때에는 구약을 인용한다.
예수의 말을 인용해도 효과가 마찬가지이거나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때에도 구약만 인용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유대 율법은 의미를 잃었다고 가르치지만 정확히 그러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예수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다.
천국을 위해 결혼을 포기한 자를 예수가 칭찬한 구절이 있지만, 바울은 자신의 독신 생활을 변호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부활할 때 사람의 육체가 변한다고 바울은 주장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가복음 12:25).
그런데 그가 스승의 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결코 인용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까?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언급하지 않지만, 흔히 복음서에 언급되는 두 사도인 것으로 간주되는 요한과 야고보의 이름을 언급한다.
요한에 대해서는 이름만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야고보에 대해서는 ‘주의 형제’ 라고 칭한다.
이러한 호칭은 바울이 역사적 그리스도를 인정했다는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형제인 야고보를 만났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다.

마태복음(28:10)과 요한복음(20:17)에서 예수는 추종자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부른다.
이 형제들은 물론 예수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다.
영지주의 복음서인 <야고보의 계시록>에는 야고보가 ‘순수한 영적 의미에서만 주의 형제라 일컬어진다’고 씌어져 있다.

바울은 또 어떤 ‘게바’를 언급한다.
전통적으로 게바는 베드로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진다.
베드로는 원래 시몬이라고 불렸지만, 복음서마다 다른 상황에서 예수가 그에게 ‘게바’, 곧 ‘반석’ 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아람어 ‘게바’는 그리스어로 ‘베드로’이다.
그렇다면 게바는 베드로와 같은 인물일까?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단 한 번 ‘베드로’를 언급하지만, 게바와 베드로를 동일 인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사도들의 편지>라는 초기 그리스도교 <성서>는 11 사도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세 번째 사도는 베드로라 불리고, 마지막 11번째 사도는 게바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분명 게바와 베드로를 동일시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그들을 반드시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현대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게바가 베드로의 다른 이름이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예수와 알고 지낸 베드로가 곧 그 게바일까?
우리는 복음서 이야기에 너무 친숙한 나머지 그렇게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만난 게바가, 개인적으로 예수와 만난 적이 있는 복음서의 베드로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 그의 편지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그의 편지에 등장하는 게바와 바울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게바가 역사적 메시아의 오른팔이 아니었다는 심증만 굳혀 준다.
바울은 게바에게 너무나 적대적이어서, 강한 어조로 그를 비난한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갈라디아서 2:11).



바울이 게바를 책망한 것은 게바가 유대 율법을 따를 뿐만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교인과 함께 먹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게바가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라면, 예수가 죄인들이나 매춘부와 함께 먹고 마셨으며 유대 율법을 어겼다는 비난에 대해 당당히 자기 변호를 했다는 사실을 게바는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바울은 게바를 외식하는 자(위선자)라고 책망한다(갈라디아서2:13).
그러나 책망하는 이유가 핵심에서 빗나간다.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와 함께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을 자버린 나머지 예수의 책망을 받았고,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으며, 마가복음(8:33)에서는 예수가 직접 베드로를 ‘사탄’에 비유했을 정도의 인물이다.
게바가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라면 바울은 바로 그런 점을 책망했어야 마땅한데, 비교적 사소한 것을 책망할 뿐이다.

바울의 편지에 등장하는 게바가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와 같은 인물이라는 믿음을 정당화시키는 데 쓰일 수 있는 것은 짧은 한 구절 밖에 없다.
부활한 예수에 대한 기록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성서>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500명 이상의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맨 나중에......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5-8).



이것은 아주 이상한 구절이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이스가리옷 유다는 이 무렵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예수는 11명의 제자에게만 나타날 수 있었다.
게다가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니 또다시 우리는 어느 기록을 믿어야 할지 곤혹스럽다.

위 구절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튼 위 구절에 따르면, 수백 명의 다른 사람과 더불어 어떤 게바라는 사람도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는 신비한 체험을 했으며, 바울 자신도 그러했다.
이때 바울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것일까?
혹시 신비한 의식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이것은 급진적인 해석처럼 들릴 것이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수천 명의 입문자들은 역사적 인물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만나지 않았어도 부활한 신인을 체험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일리가 있지만 달리 해석하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갈라디아서(3:1-3)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구원에 대한 영적 깨달음을 구하기보다 ‘육체(물질)’ 에 연연한다고 꾸짖는다.

이들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가 못 박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까?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이 감히 역사적 목격자들을 꾸짖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 수난의 극적 재현을 목격한 것이라면, 바울의 말은 이치에 맞게 된다.
갈라디아서(3: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Having begun by the Spirit, are you now being perfected by the flesh?
개역 <성서>의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는 번역은 의미가 애매해서, ‘육체로 죽겠느냐?’ 정도의 뜻으로 이해되기 십상인데, 영문으로 보면 이런 뜻이다
 ‘육체적으로 온전해지려고 하느냐?’ : 옮긴이 주).



‘온전해진다’는 것을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입문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책망을 받는 게바는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을까?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의 지도자였고, 바울과는 신학적 라이벌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 문서인 바울의 편지들도 역사적 예수를 찾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사실은 그리스도교인 공동체가 이미 1세기 중반에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옛 유대율법을 대체했다고 보는 바울 등의 무리와, 예루살렘의 친유대적 그리스도교인 무리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편지에 나타나는 게바, 요한, 야고보가 복음서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는 것은, 우리가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바울의 편지보다 늦게 씌어진 것이다.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실존한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볼 수 없다---바울은 그런 것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네 복음서는 바울의 편지 이후에 씌어졌고, 역사적 문서라기 보다는 신학적 문서인 것으로 밝혀져 왔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바울이 먼저 언급한 게바, 야고보, 요한이라는 이름을 채택해서 예수 전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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