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절대적 진리?

바이블의 허구를 알기 위한 기본 자료입니다.
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복음서는 절대적 진리?

가로수 0 1,003 2007.07.14 17:12
복음서는 절대적 진리?

사실상 그리스도교 복음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신약의 네 복음서 외에도 수백 종이나 있었다.
그러나 외경이나 영지주의 복음서가 신화 이상의 역사적 증거라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이들 복음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쓴 예수 생애의 목격담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목격담이 하나뿐인 게 아니라 넷이나 된다는 사실은 이들 목격담이 진짜로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에 무게를 더해 준다.
하지만 사실상 이들 복음서는 흔히 동일한 사건에 대해 일치되지 않는 진술을 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세계(世系 :족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장문의 족보를 나열한다.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가 유대인의 믿음과 맞아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두 저자는 예수의 아버지를 요셉으로 본다.
여기까지는 일치한다.
그런데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마태는 ‘야곱’ 이라고 말하는데, 누가는 ‘헬리’라고 말한다.
 
두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족보라는 게 고작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갔을 뿐인데 벌써 할아버지부터가 다르다.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도 두 족보는 전혀 다르다!
그것을 직접 살펴보자.

## 마태복음
예수 - 요셉 - 야곱 - 맛단 - 엘르아살 - 엘리웃 - 아킴 - 사독 - 아소르-엘리아김 - 아비훗 - 스룹바벨 - 스알디엘- 여고냐 - 요시야 - 아몬- 므낫세 - 히스기야 - 아하스 - 요담 - 웃시야 - 요람 - 여호사밧 - 아사 - 아비야 - 르호보암 - 솔로몬 - 다윗

## 누가복음
예수 - 요셉 - 헬리- 맛닷- 레위 - 멜기 - 얀나 - 요셉 - 맛다디아 - 아모스 - 나훔 - 에슬리 - 낙개 - 마앗 - 맛다디아 - 서머인 - 요섹 - 요다 - 요아난 - 레사 - 스룹바벨 - 스알디엘 - 네리 - 멜기 - 앗디 - 고삼 - 엘마담 - 에르 - 예수 - 엘리에서 - 요림 - 맛단 - 레위 - 시므온 - 유다 - 요셉 - 요남 - 엘리아김 - 멜레아 - 멘나 - 맛다다 - 나단 - 다윗


마태는 다윗 이후 아브라함에서 끝나지만, 누가는 아브라함에 이어 계속해서 아담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이른다.
그러나 이 모든 족보는 거의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두 복음서의 저자들은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고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이며, 누가복음 족보상의 남자 77명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예수의 아버지가 된다.
마태는 분명하게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가 잉태하신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
이 모든 일은 주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마태복음 1:20-23)’



두 복음서의 저자가 전혀 다른 족보를 장황하게 나열한 것은 단지 그런 족보를 하등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라는 뜻에서 그런 것일까?

한편 마가는 다윗에 이르는 혈통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베들레헴과 동정녀 잉태도 언급하지 않는다.
왜 그는 그토록 중요한 얘기를 빼 버렸을까?
바로 그 점에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네 복음서는 그처럼 서로 일관성을 잃은 데가 많다.
누가복음에서는 수리아(시리아) 총독이 된 구레뇨(퀴리니우스)가 호구 조사를 할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 어법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호구 조사가 이루어진 때는 AD 6년이었다.
마태는 예수가 헤롯(헤로데스)왕 치하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헤롯 왕은 BC 4년에 죽었다.

누가복음 속의 내용들 간에도 일관성을 잃은 구절이 있다.
누가는 ‘유대 왕 헤롯 때에(누가복음 1:5)’ 요한과 예수가 6개월 간격으로 기적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한 후, AD 6년의 호구 조사 때에도 마리아가 여전히 임신 중인 것으로 그려 놓았다---
그렇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년 동안은 임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낸 이야기를 앞부분(2:13-25)에 기록했지만, 마태는 복음서 뒷부분(21:12-13)에 기록했다---시차가 크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리 지역에서만 가르쳤고, 유대 지방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유일하게 생애 막바지에 예루살렘에 갔을 뿐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리와 유대에서 비슷하게 가르침을 펼쳤다.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주로 예루살렘에서 설교했고, 갈릴리에서의 설교는 드물다.

놀랍게도,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을 기초로 한 것인데도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사건들조차도 복음서들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유대인 장로들의 심리를 받고 사형을 선고 받는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의 심리를 받지만, 형을 선고 받지는 않는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지 않고, 곧바로 로마의 법정[官廷]으로 끌려간다.
그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아니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을까?’ (사도행전에서는 십자가 처형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5:30과 10:39에서 베드로는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언급은 사도행전이 로마에서 씌어졌다는 학자들의 의심을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은 2세기 말에 이레나이우스가 난데없이 제시한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면 로마인들은 예수가 선동죄로 처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로마의 카타콤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전혀 없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놀랍게도 AD 5세기 이후에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나타난다.
로마인들은 나무에 매달린 아티스 신인의 상을 예전부터 보아 왔다.
 
나무에 매달렸다는 것은 범죄자 처형이 아닌 신인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신인 아티스가 신화적으로 수행한 운명을 현실적으로 수행한 자로서 로마인들에게 제시되었다 : 저자 주)

또 바울은 흔히 ‘십자가에 못 박한 그리스도’를 언급하지만,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우리에게 내린 율법(구약)의 저주를 풀어 주기 위해 예수가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렸다고 말한다.
목격자라는 사람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나무에 달렸는지를 혼동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의 배반자 이스가리옷 유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일관성이 없다.
마태복음(27:5)에서 유다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그러나 사도행전(1:18)에서는 예수를 판 돈으로 밭을 사고, 그 후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와서’ 죽었다.

예수의 가까운 제자들이라고 우리가 믿을 수밖에 없는 복음서의 저자들은 스승이 한 마지막 말까지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시편 22:1의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구절을 예수는 마지막으로 외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시편31:5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외치고 운명한다.
 
이러한 두 구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요한복음에서는 다르게 말한다.---예수는 ‘내가 목마르다’고 말한 후, ‘다 이루었다’ 하고 운명한다.

마가복음(15:43)에 따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서 매장해도 좋으냐고 묻자, 빌라도는 예수가 그렇게 빨리 죽었다는 것에 놀란다.
 
그러나 요한복음(19:31-38)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했을 때, 빌라도는 이미 그전에 예수가 빨리 죽도록 다리를 꺾고 창으로 찌르도록 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이미 죽어 있어서 다리를 꺾지 않았고, 다만 창으로 찔러 보긴 했다 : 저자주).
요한복음이 옳다면, 마가복음에서 빌라도가 놀랐다는 것이 놀랍다.

마태복음(12:40)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예언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아니! 그렇다면 예수가 계산을 잘못했단 말인가?
복음서들의 말에 따르면, 예수는 금요일에 죽었고, 일요일 이른 아침에 살아났다.
그렇다면 ‘땅 속’에서 예수는 다만 이틀 밤만을 보냈다(요나 1:17에 의하면 요나는 ‘삼일삼야(三日三夜)’를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 : 옮긴이 주).

마가복음(16:5)에서 예수의 여성 제자들 몇은 빈 무덤을 발견한 후 동굴속에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누가복음(24:4)에는 동굴 속에서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결에 섰다(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28:2-3)에서는 다음과 같이 훨씬 더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위에 앉았는데, 그의 형상(얼굴)이 번개 같고, 그의 옷은 눈같이 희었다.



마가복음(16:9)과 마태복음(28:9)에서, 부활한 예수는 갈릴리의 다른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부활한 예수는, 먼저 갈릴리에 가 있을 테니 다른 제자들도 갈릴리로 가도록 하라고 여성 제자들에게 명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그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초자연적인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다른 제자들은 담담하기 짝이 없다.

한편 누가복음(24장)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가 아닌 예루살렘 부근에서 다른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사도행전(1:4)에 따르면,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라는 신성한 명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한다.

예수의 말조차도 이렇게 일관성이 없다. 마가복음(9:40)에서 예수는 자애롭게 말한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그러나 마태복음(12:30)에서는 독단적으로 경고한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다.



같은 복음서 내에서도 예수의 말이 너무나 일관성이 없을 때가 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가 묻는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는 완벽한 용서라는 아름다운 가르침을 준다.



네게 이로노니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그런데 베드로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가 도무지 석연치 않다.
같은 복음서의 고작 한문단 앞에서 예수가 이미 용서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인데, 그때 예수는 위와 같은 아름다운 용서를 가르치지 않았다.
죄를 범한 형제에게 일단 훈계한 후, 말을 듣지 않으면 실용적으로 대처하라고 충고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둘이서만 만나서)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너는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증인을 데려가서 시시비비를 가려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도록 하여라(마태복음 18:15-17)



위와 같은 대처도 용서라고 할 수 있다면, 세 번만 용서 받을 기회를 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짜 스승의 가르침일까?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세 번만 용서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네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라면, 우리는 확실하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도 여느 인간 못지않게 오류를 범하는 존재라고. 예수는 당시 살아 있는 자들이 죽기 전에 계시를 목격하게 될 거라고 예언했지만, 그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누가복음 9:27).
(그날에)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두려워 떨며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너희의 구원이 다가오고 있으니 일어나 머리를 들라.......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나리라(누가복음 21:25-32).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주장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태복음 16: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선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태복음 24:34).



하지만 모든 제자들이 죽어서 묻힌 지 대략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든 일 가운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서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구약을 인용하는 대목이다.
그런 사실 자체는 전혀 놀랄 게 없다.
 
다만 놀라운 것은 예수가 인용한 구절이 구약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어 구절 자체는 예수가 주장하는 것을 제대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원래의 헤브라이어 구절은 예수가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는 구절이다.

예수가 정통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유대인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오역한 것을 일부러 인용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더 이상 헤브라이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어만 쓰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는 수많은 유대인 가운데 1명이 그런 사건을 꾸며 냈다면 말이 된다
---그 유대인 가운데 1명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구약을 인용하고, 그것을 예수가 인용한 것인 양 꾸며놓았다고 불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가복음 7:6-7에서 예수는 이사야 29:13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을 인용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도 잘못 번역된 구절을 인용한다.
또 사도행전 15:13-18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구절은 아모스 9:11-12를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마태복음 27:9에서 마태는 스가랴가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말한다 : 저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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