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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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가르침

가로수 0 1,014 2007.07.14 17:08
심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가르침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은 영지주의자들과 문자주의자들 모두에게 숭상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이야기가 두 가지 수준에서 동시에 유효하다고 가르쳤다.
공개적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위한 예비적 이야기, 그리고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신비한 알레고리,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수준으로 이해되면서도 얘기 자체는 동일하다.

영지주의자들의 말에 따르면 바울의 편지도 두 수준에서 유효하도록 꾸며졌다.
영지주의 현자 테오도투스의 말처럼 바울은 ‘동시에 두 가지 방식으로 가르쳤다’.

바울은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주를 알고 있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테오도투스는 주장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바울은 ‘태어나서 수난을 당한’ ‘육체적’ 구원자에 대해 가르쳤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선포된 복음’을 그가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르친 것은 ‘그것을 계기로 해서 그들이 앎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바울은 ‘영적인’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입문자는 수준에 따라 자기가 들을 수 있는 말을 취해서 듣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것이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2:14).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서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편지도 입문 하지 않은 자와 입문자가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밀 가르침을 암호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밀리에 구전되는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자들만이 바울의 심오한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이렇게 썼다.



발렌티누스는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이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발렌티누스파들은 그노시스에의 입문을 통해 바울의 편지를 다른 <성서>와 마찬가지로 상징적 수준에서 읽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바로 바울이 의도한 것이라고 말한다.---이러한 영적 독서를 통해서만 비로소 단순한 외부적 ‘인상’이 아닌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은 바울의 편지에 감춰진 비유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암호를 체계적으로 풀이했다.
예컨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단순한 일상적 상황, 즉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심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비유한다. 즉 바울이 ‘유대인’을 언급하면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뜻하며, ‘이방인’을 언급하면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뜻한다.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의미하는 바울의 말로는 ‘이방인’ 외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자’, ‘그리스인(헬라인)’, ‘이면적 유대인Jews inwardly’, ‘참된 이스라엘 사람’등이 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바울은 추종자들에게 영적 가르침을 주고 싶지만 그들이 ‘육신’의 수준에 속해서 영적 가르침을 줄 수가 없다는 실망감을 표현한다.
그래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가장 기초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만을 가르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먹이지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감당치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하는 마음과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리오(고린도전서 3:1-3).



바울은 추종자들이 아직도 기본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날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히브리서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도(교리)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께 향한 신앙과 세례의 가르침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또 다른 입문의 수준으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리하리라.
한번 비추임을 얻고(일단 계몽이 되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자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그런 다음)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음이라(히브리서 6:1-6)



바울이 사도들에게 버리라고 한 ‘교리의 초보’는 영지주의자라면 마땅히 말할 만한 것들이다.
회개, 믿음, 세례, 안수, 죽은 자의부활, 영원한 심판, 이러한 것들이 문자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의식이고 도그마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이런 것들은 다만 심적 수준의 공개적 미스테리아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이 사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영적 입문의 성령을 맛본 후 심적 관심사를 버리고 완전한 영적 수준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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