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이교도 미스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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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이교도 미스테리아

가로수 0 1,012 2007.07.14 17:06
바울과 이교도 미스테리아

바울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잠시 잊고 열린 마음으로 증거를 살펴보면, 위와 같이 바울을 적대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바울의 편지는 영지주의적이며 이교도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고대 그리스 문화를 수용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처음 배운 것이 그리스어였다.
그는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만을 인용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지배를 받는 이교도 도시에서 설교했다.
 
그 도시들 가운데 안디옥은 아도니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고, 에베소(에페소스)는 아티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으며, 고린도(코린토스)는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다소(타르수스 : 오늘날 터키의 중남부)에서 출생했다.
 
당시에 그곳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이교도 철학의 최고 중심지였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가 발생한 곳도 바로 다소였다.
그러니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리스도교 교리와 미트라스신앙의 가르침 사이의 현저한 유사성을 바울이 몰랐다고는 보기 어렵다(다소는 당시 킬리키아 왕국의 수도였다. BC 67년에 다소에서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이 거행되었다는 플루타로코스의 기록이 있다 : 저자 주)

바울운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용어와 구문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예컨대 프뉴마pneuma(영혼), 그노시스gnosis(신성한 앎), 독사doxa(영광), 소피아sophia(지혜), 텔레이오이teleioi(입문자) 등이 그것이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더욱 위대한 카리스마타를 열심히 추구하라’.
‘카리스마타charismata’는 미스테리아 용어인 ‘마카리스모스makarismos’에서 유래한 말인데, 미스테리아를 목격한 사람의 축복받은 본성을 가리킨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의 미스테리아의 집사’ 라고 일컬었다.
이 말은 원래 세라피스 미스테리아의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세라피스와 그의 배우자 이시스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인들의 숭배는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 닐리 퍼져 있었다. 바울은 실제로 세라피스 ‘미스테리아의 집사’ 였을 수도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 시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곳에는 세라피스를 숭배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있다. 세라피스 숭배자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주교라고 부른다’.
이러한 말은 신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신약의 한 구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고린도 동편 1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항구 겐그레아에서 수리아[시리아]로 가는 배를 기다릴때 바울은 ‘일찍 서원한 바가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았다’[사도행전 19:18].
이것은 유대 율법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한 말이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단발을 해야 했다.
사실 겐그레아 근처에는 이시스 신전이 있었고, 그곳에서 고대 그리스 선원들은 단발을 한 후,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머리카락을 ‘스텔라 마리스[이시스]’ 여신에게 바쳤다 : 저자주)

바울은 이교도 현자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한다---아라투스는 수세기 먼저 다소에 살았던 인물이다.
‘우리는 그(하나님)의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사도행전 17:28)는 구절은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바울은 또 미스테리아 교리를 가르친다.
자신이 현명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한 이교도 현자 소크라테스처럼,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따히 알 것을 알지못하는 것이다(고린도전서 8:2).



플라톤은 이렇게 썼다.
‘지상의 복제품에는 영혼에게 소중한 이데아의 빛이 없으므로, 그것들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인다(<파이드로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불 것이다 (고린도전서 13:12).

바울의 이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실재의 곤혹스러운 반영이다.
우리는 작은 거울로 풍경을 보는 사람과 같다.
때가 되면 우리는 실재 전체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될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바울의 가르침이 명백히 플라톤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플라톤은 동굴에 간힌 죄수의 이미지를 비유로 사용했다.
동굴 벽에 드리워진 바깥 세상의 그림자만 볼 수 있는 죄수는 궁극적인 실재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실재라고 잘못 알고 있다.
그런 죄수의 상태는 우리의 현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실재의 곤혹스러운 반영이다’.

동굴에서 해방되어 밖으로 나가 눈부신 햇빛 속에서 직접---‘얼굴과 얼굴을 맞대고’---실재를 보는 자가 바로 철학자라고 플라톤은 가르졌다.
이러한 구절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공식 문구이다. <바카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나에게 미스테리아를 건네 준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입문식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아래의 신들과 위의 신들의 실재 속으로 들어가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숭배한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시인했다.
‘플라토니즘의 목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영역에 존재하는 ‘참세계’ 의 신전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루어지는 신들과의 교섭’에 대해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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