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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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

가로수 0 1,182 2007.07.14 17:01
세계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

유대 문화와 이교도 문화의 대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4세기 말에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도와 첩자나 용병 구실을 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알렉산드리아라는 새 도시에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대규모의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세련된 이교도 문화의 혜택을 누렸다.
이때 알렉산드리아 초기 인구의 반은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부터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도시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방대한 제국 내에서는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쓰였고, 온갖 민족이 알렉산드리아로 건너와 새로운 다민족 도시의 시민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첫 지배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에 작은 그리스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계몽적인 그의 정치 철학에 따라 도서관과 박물관이 들어섰고, 고대세계의 지식이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다.
절정기에는 도서관에 수십만 권의 장서가 보관되었다고 한다.---50만 권이 넘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세계에서 아테네를 능가하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는 새로운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대규모 행렬은 더욱 웅장하고 극적인 장관으로 발전했으며, 여러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를 상징하는 여러 층의 무대에서 연극 공연이 이루어졌다.
 
아테네에서와 달리 알렉산드리아에서 치러진 미스테리아 의식은 비밀 엄수 규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누구나 신비의식mystical rites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처럼 세계적이고 관용적인 환경 덕분에 자연스럽게 여러 영적 전통의 결합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세련된 이교도 문화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 유대인들은 이교 신앙에 물들 것을 염려하여 대중적 연회, 축제, 연극공연 등에 참석하는 것을 종교적 금기로 삼았다.
당연히 그들은 위대한 문명의 일원이 되는 엄청난 이점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금기를 어기고 이교도 사회에 동화되고자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또, 너무나 짧은 기간에 그들의 모국어를 버리고 공용어인 그리스어를 받아들였다.
유대 지방에서 이집트로 끊임없이 이주자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아람어와 헤브라이어가 계속 사용되기는 했지만, 지배적인 언어는 그리스어였다.---도시 안에서 다른 민족과 거래를 할 때뿐만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도 그랬다.
공회당의 예배 때와 집안의 예배 때에도 그리스어가 사용될 정도였다.

BC 2세기 무렵에 이러한 문화적 동화 과정은 더욱 심해져서 유대인 극작가 에스겔은 유대인의 출애굽기를 에우리피데스 스타일의 그리스어 희곡으로 고쳐 쓸 정도였다!
유대 지식인들은 조상의 신앙과 타민족의 지혜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중재하려고 했다.
그들은 유대 경전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보는 근본주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신비한 비유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유대 철학이 활짝 꽃을 피웠고, 모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빛’으로 알려지게 된 알렉산드리아의 랍비들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했다.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의 신 여호와를 그들 부족의 신으로 보았다.---항상 유대인을 도와서 압제자를 무찌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이교 신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보았고, ‘지고의 하나the supreme oneness’ 인 플라톤의 신과 동일시했다.

그들이 전통을 버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이교도 철학이 원래 유대인의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헤르미푸스는 피타고라스가 유대인들에게서 지혜를 얻었다고 단언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발전시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세의 지혜를 차용했다고 선언했다.
아르타파누스는 이집트 미스테리아의 창시자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와 그리스 미스테리아의 신비한 창시자인 무사이우스를 모세와 동일시한 허구 역사서를 집필했다.

터무니없는 발상인데도, 그런 발상 덕분에 유대인들은 수월하게 민족적 자긍심을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이교도 이웃의 철학을 수용해서 세계시민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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