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주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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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문자주의의 탄생

가로수 0 1,201 2007.07.14 16:57
문자주의의 탄생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잿더미로 만든 AD 70년 이후, 유대인들은 난민이나 노예가 되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흩어졌다.
다만 공개적 미스테리아에 입문해서, 그리스도교를 제한적으로 반쯤 수용한 유대인들은 메시아 예수의 ‘생애’ 라고 믿는 것을 마음에 간직한 채 더욱 멀리 달아나서 고대세계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서부 지역으로 간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예수 미스테리아 중심지와 연결이 끊기고 말았다.
그러자 완전한 입문식을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수백 마일 이내에는 그노시스를 전수해 줄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 미스테리아는 혼란스러운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십 년 이내에, 서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죽었다가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핵심 교리로 삼은 종교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어떤 은밀한 미스테리아도 수용할 여지가 없었다.
이 종교는 복음서들을 비유로 보지 않았고, 오로지 실제 사건에 대한 역사 기록으로만 보았다.

2세기 내내, 각 지역의 그리스도교 집단 리더들은 감독자나 주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수할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갖지 못한 이들 주교는 예수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참이라고 믿기만 하면 누구나 영원한 구원을 보장 받는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을 기초로 한 제한적인 형태의 그리스도교인데, 결국 이것이 로마가톨릭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영지주의라고 일컫는 원래의 예수 미스테리아는 발생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계속 번성했다.
이 도시는 2-3세기의 위대한 영지주의 스승인 가르포크라테스, 바실리데스, 발렌티누스,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을 배출했다.
한편 문자주의는 동부의 영지주의 스승들과 연락이 단절된 지역에서 세력을 넓혀, 결국에는 로마시에 본부를 두게 되었고, 당시의 로마인처럼 편협하고 독재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예수 미스테리아의 초기 입문자들은 각지에 독립된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흔히, 특정의 한 스승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들만의 복음서를 지니고 활동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주의와 다양성과 관용의 전통을 유지했다.
그와 달리 문자주의자들은 중앙집권화된 종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자들이 문자주의의 성장에 아연실색 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문자주의자들은 이제 완전히 영지주의자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교로서 고대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수많은 스승들은 로마를 방문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을 그노시스에 입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문자주의자 주교들은 외래인들이 자신들을 단지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 으로 보고 영적 입문식을 치러야 한다고 주창하는 것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지주의 현자들이 문자주의 가르침을 얕잡아 보며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신도를 훔쳐 가는 것’에 분개했다.

예수 이야기를 먼저 창조한 영지주의자들은 이제 구원자의 신성한 가르침을 왜곡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문자주의 대변자인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다수의 신앙을 전복하고, 우월한 지식을 빙자해서 신도들을 빼돌린다’고 항의했다. 갈등은 불가피했고, 그리스도교의 정수가 무엇인가에 대한 혹독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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