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예수신화

바이블의 허구를 알기 위한 기본 자료입니다.
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10장 예수신화

가로수 0 1,220 2007.07.14 16:52
10장 예수신화

내가 가장 선호하는 종교의 정의는 ‘신화의 오역’ 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상징에는 마땅히 역사적 준거가 있다고 생각할 때 어김없이 오역이 이루어진다. -조지프 캠벨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집트의 미스테리아를 그리스로 들여왔을 때, 그들은 단지 오시리스 신앙을 제시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오시리스 미스테리아에는 BC 5세기의 아테네인들에게 너무나 이단적으로 보인 여러 교리가 담겨 있었다.
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교리가 특히 그랬다.
그래서 단순히 외래의 미신을 들여왔다는 비난과 박해를 피하기 위해, 피타고라스 학파는 그리스의 작은신 디오니소스를 오시리스의 그리스 버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인들은 그들 땅에서 자생한 신앙인 것처럼 이집트의 미스테리아를 도입했다.
다른 모든 지중해 문화권에서도 이런 식으로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였다.
그들 역시 토착의 신격을 탈바꿈시켜서,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으로 만들었다.

고대 미스테리아를 도입하고자 했던 테라페우테와 같은 유대인 피타고라스 학파 공동체도 5세기 앞서서 피타고라스 학파가 맞닥뜨린 것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미스테리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려면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유대인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토착의 신화적 인물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여러 남신이나 여신이 없었다.
오직 유일신 여호와만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하나One라는 플라톤의 최고신과 동일시될 수 있었지만, 이교도의 신들처럼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신화적 이야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주변 문화와 달리 유대인들은 작은 신격을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시리스-디오니소스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유대인의 신화적 인물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메시아가 그것이다.

메시아Messiah라는 헤브라이어 낱말은 ‘기름 부음을 받음(혹은 받은 자)’ 이라는 뜻인데,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Christos’ 이다.
이 말은 원래 왕이나 제사장을 가리킬 때 쓰인 말이었다.
그들은 의식을 거행할 때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군림하고 있는 왕을 가리킬 때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 후 유대인들이 정복당한 민족이 되었을 때, 압제자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도래할 미래의 구원자---위대한 다윗 왕의 혈통을 지닌 왕으로 군림하며 과거와 같은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 도래할 구원자---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BC 63년에 로마가 유대 지방을 점령한 후, 유대인들의 상황은 점점 더 절망적이 되었다.
그들을 박해하는 강대한 제국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것 같았고, 따라서 메시아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기 위해 도래할 초자연적인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예수 이야기의 구성을 살펴보면, 유대인 미스테리아의 창작자는 죽었다가 부활한 미스테리아 신인과 유대인의 메시아를 종합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서들에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예수가 그러했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메시아라고 일컬어진다(마가복음8:29).
그는 여호수아(그리스어로 이에소우스)라고 명명되었는데, 그건 메시아가 갖게 될 것으로 정해진 이름이었다(요세푸스가 기록한 여러 메시아들도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 저자주).
하지만 사실상 ‘메시아 예수’는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 예수’라는 전혀 다른 인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한 얇은 베일에 지나지 않는다.

탄생 이야기를 보면 그 점이 특히 분명해진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제시하는 길고 상세한 족보는 요셉이 다윗의 혈통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두 복음서 모두 예수가 전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토록 수많은 주석가들이 두 복음서 안의 그런 기이한 모순을 간과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태와 누가는 자기가 한말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것이 후대에 덧붙인 것이고 잘못 편집된 결과라 할지라도, 그러한 모순이 아무런 의도 없이 복음서 안에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에 의하면 이런 이상한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명제에 의하면 복음서 작가들은 스스로 설정한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기록이 비밀 가르침을 암호화한 신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이며,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족보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들을 귀 있는 자’ 에게는 예수가 사실상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이며 하나님과 동정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와 마태가 제시한 족보는 전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 이유는 그 족보가 문학적 허구이며,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메시아라는 매개자를 통해 유대인들이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화 속에 암호화된 비밀 가르침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가 설명한 대로 ‘이야기 구성상의 모순,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상황’은 모두가 고의로 그렇게 꾸며진 것이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너무 오래 저차원적인,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매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이야기가 철두철미하게 우아하고 일관성이 있다는 게 명백하면, 우리는 명백한 의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성서>에 함축되어 있다고 믿지 않게 될 것’ 이기 때문이다.

‘어떤 함정’과 ‘장벽과 불가능성’을<성서> 안에 함께 엮어 놓은 것은 독자가 ‘문자에 얽매여서 더욱 신성한 의미를 터득하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 이야기는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기대에 최대한 부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메시아가 예수의 참된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마태복음(22:41-46)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아(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묻는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가 말한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러자 ‘한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었다’.

또 예컨대 유대인의 메시아는 적의 수중에서 유대 지방을 해방시키고 다윗의 계보를 다시 세우기 위해 도래할 전사 형의 왕이어야 했다.
그러나 재판정에서 예수는 분명하게 선언한다.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추종자)들이 맞서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복음18:36-37).



마가복음 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다고 말하자, 예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만 사람의 아들은 죽어서 부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예언한다.
유대인 메시아가 그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를 꾸짖는다(개역 <성서>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했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문 <성서>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를 한쪽으로 데려가’ ‘꾸짖는다rebuke’. 다음 구절에서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는다’고 할 때와 똑같은 동사가 쓰였다 : 옮긴이 주)

베드로의 꾸짖음에 대해 예수는 역으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일컬으며 꾸짖는다!
베드로는 승리자 메시아로서의 구원자라는 유대인의 사고에서, 희생양 신인으로서의 구원자라는 이교도의 사고로 전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의 모든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 메시아가 범죄자처럼 처형당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구약 신명기(21:23)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메시아는 그렇게 저주 받은 자일 수 없었다.
유대교에서는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죽음으로써 구원을 하는 자가 메시아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역할이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할 때, 예수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어 유대 민족을 해방시켜야 할 사명을 띤 유대인 메시아가 아니라, 영적 승리를 거두어 신비한 자유를 얻는 미스테리아의 신인인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가 불명예스럽게 처형되고, 압제자에게 명백히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런 어려움을 해소시키기 위해 예수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주장하는 자로 그려진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을 완수한 후 예수는 속히 재림할 거라고 약속한다. 적을 쳐부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유대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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