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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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상처

가로수 0 1,558 2007.07.14 16:43
영광스러운 상처

문자주의자와 영지주의자 사이의 갈등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 박해에 대해 양 진영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다.

문자주의자들에게는 예수가 순교자였다.
그래서 순교를 당한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예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증거였다.
AD 258년에 사망한 키프리아누스는 ‘영광스러운 상처에서 흘러나와 지옥의 불을 끄는 피’의 ‘숭고하고 위대하며 흐뭇한 장관’을 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생생히 묘사했다.
오늘날 무슬림 극단주의자들과 흡사한 방식으로, 문자주의 순교자들은 신성하고 영 적인 전사로 받들어졌다.

순교한다는 것은 천국의 한자리를 보장 받는 것이었다.
그러한 보상이 제시됨에 따라 수많은 문자주의자 교인들은 능동적으로 죽음을 찾아갔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함으로써 영생을 획득한다’고 믿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신의 피를 바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고통 당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사회의 언저리에 작은 무리로 결집된 이런 광신도들은 여러 면에서 현대의 사교 집단을 닮았다.
오늘날의 사교 집단도 기꺼이 집단자살을 함으로써 천국의 보상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순교에 대해 가장 열광적인 웅변을 한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나이우스가 그토록 바람직한 운명을 피해 갔다는 것은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달리 영지주의자들은 순교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적인 오해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고 그 운명에 순교도 포함되지만, 재빨리 천국에 가는 방법으로 순교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기만적인 일이라고 보았다.
그들에게 영적 계몽은 그노시스에 대한 신비한 깨달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거창한 제스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의 증언>이라는 영지주의 문헌은, 순교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우리는 그리스도교인’ 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 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증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만 증언하기 때문에 공허한 순교자’ 들이다.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일 뿐이어서 그들이 원하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희생’을 바란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식인종으로 만드는 자들이다.
그런 문자주의자들은 순진한 동료 교인들을 부추겨서 ‘죽은 자의 이름으로 신앙을 굳건히 지키면 순결케 되리라’는 환상 아래 ‘사형 집행자에게’ 자진해서 찾아가도록 ‘형제들을 몰아붙이는 자들’ 이다.
<베드로의 계시록>의 저자는 특히 ‘어린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행을 보며 환호하는 문자주의자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순교를 옹호하는 자들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그런 자들을 ‘영지주의자와 달리,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만큼 어른이 되지 못한’ 유치한 애들로 규정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불합리하게 용감한 자는 결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무서운 게 무엇인지 몰라서 끔직한 일을 당하는 애들도 용감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들은 불을 만지기까지 한다.
날카로운 창을 향해 돌진하는 야수도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푼돈을 벌기 위해 여러 개의 칼을 던지고 받는 요술쟁이도 용감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용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진실로 용감한 자는, 악의적인 수많은 무리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위험 속에서도 의연하게 다가올 일을 기다린다.
그런 식으로 그는 순교자라 불리는 자들과 구별된다.
순교자는 스스로 위험한 사건을 만들어서 위험 속으로 돌진한다.
더러는 영광을 추구해서 수난을 당하고, 더러는 더 큰 형벌이 두려워서 수난을 당하고, 더러는 사후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 수난을 당하지만, 그런 자들은 영지주의자와 달리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만큼 어른이 되지 못한 애들과 같다.
운동 경기에서처럼 교회에서도 어른을 위한 면류관이 있고, 애들을 위한 면류관이 따로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순교자로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다만,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심오하고 신비한 진실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수준 낮은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로 부활한다는 것을 뜻한다.

문자주의자들은 순교의 수난을 헛된 일로 치부하는 영지주의자의 태도에 분개했다.
이그나티우스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편지의 저자 역시 분개해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누군가 말하듯이, 만일 예수의 수난이 다만 형식일 뿐이라면 내가 왜 감옥에 갇히고, 내가 왜 야수들과 싸우고자 한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죽어도 그게 헛된 일이란 말인가?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을 배신자로 보았다.
겁쟁이들을 위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함으로써, 박해에 직면한 교회를 단합시키려는 시도를 좌절시키고 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자들을 광신적 극단주의자로 보았다.
거짓 약속을 내세워 무의미한 수난을 당하도록 호도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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