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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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신약 <성서> 만들기

가로수 0 1,233 2007.07.14 16:42
신약 <성서> 만들기

그리스도교를 영지주의자들 수중에서 빼앗기 위해. 그리고 공통의 도그마에 기초한, 중앙집권화된 종교를 세우기 위해, 문자주의자 주교들은 당시에 배포된 수많은 영지주의 복음서의 영향력을 분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명백히 그리스도교의 진술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제한된 수의 정경(正經)을 만드는 한편, 다른 모든 문헌은 위작이자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일에 착수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한 밑거름이 된 것은 유대인들에게서 훔친 구약이었다.
그러나 어떤 문헌을 정경에 포함시켜야 할 지가 문제였다.

당시에 서로 다른 교인들 공동체는 서로 다른 문헌을 <성서>로 채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들이 선호하는 복음서와 편지와 전설이 정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세기 말에 격화된 논란은 4세기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현대의 거의 모든 종파가 신약에 포함된 문헌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지만, 처음 4세기에는 모든 단일 문헌이 한때 이단적이거나 위조된 것으로 낙인 찍힌 적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정경을 선택하려는 첫 시도는 약 110년경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모호한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마태복음이 ‘신탁’을 수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그가 지니고 있던 마태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문헌과 상당히 다름을 시사한다.
분명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시대(150년경)에는 신약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가 언급한 ‘사도들의 회고록’ 이라는 것은 정경이 된 네 복음서와 사뭇 거리가 있다.
그는 자신의 어떤 저술에서도 네 복음서를 언급한 적이 없다.

타티아노스(170년대)는 다른 복음서들의 얘기를 추려서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지워 버린 후 하나의 복음서로 종합했지만, 교인들 공동체는 이 복음서를 널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2세기 말에 이레나이우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네 복음서를 정경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네 복음서가 각각 예수의 사도 가운데 1명이 직접 썼다는 주장을 신빙성의 기준으로 제시했지만, 그런 기준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마가와 누가는 그들이 묘사한 사건의 목격자인 척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신약은 가장 초기에 가장 널리 인용된 일부 문헌---<도마의 복음서>, <헤르마스의 양치기>, <헤브라이 사람들의 복음서>등---을 배제했다. 그런 문헌들에는 예수의 준(準)역사적 이야기가 전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마의 복음서>는 예수의 ‘쌍둥이’인 도마가 기록했다는 것으로 예수의 ‘은밀한 이야기’를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헤르마스의 양치기>는 초기 교인들 사이에 매우 인기 있는 문헌이었는데, 헤르마스가 ‘교회’ 의 화신으로 변장한 이교도 신탁의 여사제를 만나는 이야기가 담긴 원래의 이교도 문헌을 살짝 개작한 것이다.
현대 권위자의 말에 따르면, 이 문헌의 저자는 사실상 ‘우리가 바울 이후 가장 잘 아는 초기 그리스도교인’ 이라고 한다.

<헤브라이 사람들의 복음서>는 초기 교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된 복음서이다.
그러나 초기에 그토록 인기가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문헌 역시 신약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문헌들은 예수가 일곱 달 동안만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교도 신인 디오니소스가 바로 그랬다!

<도마 행전>과 같은 수많은 영지주의 저술은 너무나 인기가 있어서 그냥 배제시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문헌은 이단적 내용을 지운 후 문자주의자들의 주장에 맞도록 각색되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가톨릭 주교와 스승들은 영지주의 저술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저지하고 신자들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대신 이단적 서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를 송두리째 채택해서, 독이 될 만한 교리는 조심스럽게 제거한 후 다소 정제된 이야기를 사람들 손에 쥐어주었다.



물론 사도행전도 원래의 영지주의 문헌을 그런 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2세기 말에 이레나이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그것을 <성서>로 간주했지만,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그런 <성서>가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때 영지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삼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있는 형태로 날조된 것이다.
즉,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역사성을 확립하고, 사도들의 계보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주교들을 합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도행전은 또 바울을 문자주의의 사도로 그려 놓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바울이 알고 있는 것처럼 꾸며 놓았다.

물론 영지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의 진짜 편지 내용과 사도행전 속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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