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의 허구를 알기 위한 기본 자료입니다. 예수는 신화다는 티모시 프리크의 글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절판되었습니다. |
자연 도덕 |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에서,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를 ‘숭배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법도 지키지 않도록 하는 신’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모독하려고 했다.
그러자 디오니소스가 답했다.
‘그러한 너의 모독이 디오니소스에게는 찬사이다’.
이교도 미스테리아는 흔히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노시스를 체험한 사람에게 전통적인 도덕 개념은 하찮은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미스테리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적 자유였지, 도덕적 예속이 아니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또 ‘선하거나 악한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인습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비난했다. 또,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영적 자유가 사실은 방탕하게 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모든 세속의 권능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두려워할 자가 없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심판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신비한 의식을 통해 참하나님인 예수를 체험함으로써 영지주의자들은 전제적인 여호와가 유대인에게 부과한 온갖 계율과 여호와의 권능으로부터 ‘해방’, 혹은 ‘방면’ 되었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 입문식 과정에서 입문자는 거짓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영지주의 현자 시몬 마구스의 말에 따르면, 여호와의 권능에서 벗어나 참된 아버지Father를 알게 된 입문자들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현대의 권위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바실리데스와 그의 후계자 발렌티누스, 이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영지주의 스승들은 엄격한 무도덕성amorality(도덕적이지도 않고 비도덕적이지도 않은 것)을 좋아했다. 유일한 계율은 계율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수 입문자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선호했는데, 그의 성향이 금욕적이라면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지없이 방탕하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미스테리아의 현자들이건 영지주의자들이건 간에 비도덕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밖에서 부과된 윤리적 계율보다 더 심오한 영적 깨달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성한 본성과 교섭하는 인간이라면 직관적, 자발적으로 총체적인 삶과 조화를 이루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는 ‘영적’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천성적’으로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덕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그노시스에 이르는 정화 과정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일단 그노시스에 이르게 되면, 입문자가 자연스럽게 올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윤리 규범도 불필요해진다는 것이다---올바른 행동이 반드시 전통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영속적인 조화의 상태에 이른 자에게는 외부적 규범의 준수가 더 이상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으며, 더 이상 욕망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명상하며 쉰다.
이러한 상태야말로 다함이 없는 축복이며 영원한 축복일 것이다.
따라서 그노시스를 지닌 자의 모든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다.
그노시스를 지니지 못한 자의 행동은 그릇된 행동이다.---그가 규범을 준수하더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