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희생양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세상의 죄를 대속해서 죽었다고 믿는다.
고대 그리스에는 특별한 개인을 ‘희생양(속죄 염소)’으로 삼는 전통이 있었다.
희생양은 상징적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한 사람은 파르마코스pharmakos라고 불렸다.
그것은 단지 ‘마법사’라는 뜻이었다.
그 사람을 처형한 것은 분명 종교적 행위였다.
처형하기 전에, 비용을 갹출해서, 특히 순수한 음식으로 그를 배불리 먹였고 신성한 옷을 입혔고 신성한 식물로 만든 관을 씌웠다.
그리고 신성한 희생을 통해 도시의 죄가 사면되었다고 믿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신성한 파르마코스였다.
예수처럼 그는 세상의 죄를 대속해서 죽었다.
파르마코스는 모욕을 당하고, 매질 당한 후 죽음에 처해졌다.
디오니소스의 대속적 죽음을 같이하기 위해 엘레우시스를 향해 신성한 길을 걸었던 사람들 역시 가면을 쓴 사람들에게 위협과 모욕과 매질을 당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서 그와 유사한 운명을 당할 거라고 예언했다.
‘그들은 [인자를]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마가복음 10:34).
바울은 이렇게 썼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의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예수는 희생으로 바쳐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린 양의 피로 씻김’ 으로써 ‘재생’ 한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은유는 고대 아티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 의식은 동물을 제물로 쓴 희생제였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음식으로 쓸 동물이 도살되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아주 원시적인 의식이었을 거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먹기 위해 동물을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리 혐오스럽지 않을 것이다.
’타우로볼리움Taurobolium’, 곧 황소 희생제에서 황소는 밑에 구멍이 뚫린 제단 위에서 도살되고, 밑에 서 있는 입문자는 구멍을 통해 흘러내린 피로 몸을 씻었다.
그러면 입문자는 ‘재생’ 된 것으로 여겨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크리오볼리움Criobollium’ 의식을 치렀는데, 희생물로는 양을 썼다.
입문자는 말 그대로 ‘양의 피로 씻김’ 의식을 치렀던 것이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는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말 그대로보다는 상징적으로 희생제를 치렀다.
실제로 도살을 하는 대신, 황소를 도살하는 미트라스의 성화(聖畵)를 제단 그림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다소 으스스해 보이는 그림이기는 하지만,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는 사람을 그려 놓은 그리스도교 성화에 비하면 덜 폭력적인 셈이다.
’그대는 영원히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했도다’라고 적힌 비문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가 아닌 미트라스에게 바쳐진 비문이다.
그런데 수세기 후 그리스도교인들도 그들의 구원자 신인에게 똑같은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게 된다.
익명의 고대 이집트 시인은 죄를 대속해서 죽은 후 부활한 구원자 오시리스를 다음과 같이 찬미했는데, 이 찬미의 말은 예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대를 희생시켰는가?
그대가 그들을 위해 죽었다고 그들은 말하는가?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살아 있다!
그는 신비한 희생자이기에, 그들보다 더 생기가 넘친다.
그들의 주님이신 그는 영원히 살아있고, 영원히 젊다.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미스테리아 종교도 ‘원죄’ 교리를 갖고 있었다. 플라톤은 죄목을 알 수 없는 고대의 어떤 죄에 대한 형벌로 영혼이 육체 속으로 추방된다고 가르친다.
엠페도클레스는 우리가 신의 세계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로 네 원소를 거치며 떠돈다고 말한다.
미스테리아 종교에서는 하나님과의 분열이 곧 원죄라고 가르쳤다.
신인의 대속적 죽음, 혹은 입문자가 희생 동물을 죽이는 것은 입문자의 수준 낮은 ‘동물적’ 본성의 상징적 죽음과 신적 본성의 재생을 뜻한다.
그것은 신과의 합일, 그리고 원죄에 대한 속죄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