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너머의 앎 |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테이토스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소신이란 어린이 장난감 같은 것이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현자들은 단순한 믿음이나 소신을 멸시했다.
그들은 앎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주장했다.
---믿음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는 반면, 앎은 이면의 실재를 꿰뚫어 본다고. 정신이 앎의 대상과 일체가 됨으로써 앎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이해의 최고 수준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러한 이교도의 가르침을 물려받아서 피스티스, 곧 믿음을 멸시하고 그노시스, 곧 앎을 중시했다.
그노시스는 확신을 갖지 않고 의심을 하는 사고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진리에 대한 앎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노시스는 즉각적이며 확연하고 전적으로 비개념적인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맹목적 믿음의 가치를 찬양하며, 주교가 한 말을 의심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교도 현자들처럼 영지주의 스승들은,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식을 치르면 입문자가 직접 그노시스를 체험하고 스스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영지주의자들에게 믿음이란 그노시스에 이르기 위한 디딤돌일 뿐이었다. 영지주의 교사 헤라클레온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은 처음에 다른 사람의 증언을 믿음으로써 진리를 믿기 시작하지만,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클레멘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믿음은 초석이다. 그노시스는 그 위의 건축물이다. 믿음은 그노시스를 통해 완벽해진다.
안다는 것은 믿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노시스는 믿음을 통해 받아들인 것의 증거이다.
이교도 현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교리가, 다만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진리 자체는 말과 개념을 뛰어넘으며, 스스로 그노시스를 체험함으로써만 발견될 수 있다.
<빌립의 복음서>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말은 기만적일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을 정확한 것에서 부정확한 것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God’ 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정확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것을 인식할 뿐이다.
‘성부’, ‘성신’, ‘성령’, ‘삶’, ‘빛’ , ‘부활’, ‘교회’, 기타 모든 말 또한 그렇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정확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것을 인식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