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
사방의 지류를 받아들이는 진리의 강이 하나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분명 고대인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그리스도교를 재평가해야 할 적절한 시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교도 점성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가 만들어진 것은 물고기자리의 큰 달이 시작된 때였다.
이제는 물고기자리의 시대가 끝나 가고, 새로운 물병자리 시대가 밝아 오고 있다.
따라서 고대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처럼 역사 흐름의 전환점에 서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러 면에서 과거의 시대 변화를 상기시켜다.
묵시적인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더 팽배해 있는 것이다. 낮설고 새로운, 절충적 종교가 도처에서 일어서고 있다.
기존의 종교는 불신되며 쇠퇴해 가고 있다. 다가올 물병자리의 시대에는 영적 종교가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
당당하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화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 온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영적인 관점에서 이 기나긴 세월은 분명 권위주의적 종교, 종교적 편협성, 종교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암흑시대’ 였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유일한 참신앙으로 자처함으로써, 다른 모든 영적 전통과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그 무엇보다도 우월하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 논리에 따라 폭력으로 온 세상의 다른 사회를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또한 그리스도교 자체의 신비주의자와 자유사상가들을 끔찍하게 박해했다.
유대인의 아버지 신 여호와를 유일하게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얼굴로 채택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여성 신격을 억눌렀고, 그러한 신학적 관점은 여성을 남성에게 합법적으로 종속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지적 질문을 억압하고 도그마를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고집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이 종교에 등을 돌리고 모든 형태의 영성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갈수록 많은 사람이 종교를 기껏해야 여흥으로, 나쁘게는 편견과 편협과 갈등의 원천으로 여기고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지혜와 문명의 원천으로서 그들의 조상을 섬기는 반면, 서구 문화귄에서는 조상들을 악마의 숭배자라고 매도해왔다. 그것은 서구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서구인들은 문화의 뿌리를 단절시켜 왔다.
15세기에 르네상스, 곧 ‘재생’ 이라고 적절히 명명한 기간에 이교도 철학을 재발견한 후 비로소 서구 문명은 침잠해 들어갔던 미신과 투쟁의 늪에서 기어올라올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근대에 서구는 과학적 지식의 과실을 수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대인들과 달리, 서구인들은 앎과 영성을 같은 미스테리아의 두 국면으로 보지 못했다. 서로 화해할 길이 없는 적대적 관계라고 보았던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하나의 종교라는 깃발 아래 세계를 통합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문자주의 그리스도교 자체가 심한 분열의 원인이 되어 왔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과 이교도, 남자와 여자, 과학과 종교, 믿음과 이성이 대립해 왔다.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의 새 역사가 아니라 그러한 참담한 분열이 서구 영혼 속에 남겨 놓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고대 미스테리아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영적 진화라는 보편적 흐름을 다시 탈수 있고, 악마의 것으로 낙인 찍었던 다른 모든 종교적 전통을 적이 아닌 파트너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무거운 짐인 구약과 오직 한 부족의 질투하는 신을 포기한다면, 여성 신격의 지혜를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독단주의를 포기한다면, 발견의 모험을 통해 과학적 앎과 신비주의를 통합한 고대의 경이를 다시 일깨울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약이 실제 사건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저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 자체의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회복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대하기에 너무 벅찬 것일까? 고작 100여 년 전만 해도, 가장 사색적인 사람들까지도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었다. 자연의 진화라는 다윈의 생각은 우스꽝스럽고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다윈의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은 압도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예수 미스테리아’를 제대로 이해하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이교 신앙에서 진화했으며, 예수 이야기도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비유적 신화라고 주장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일이면 이 주장은 너무나 명백해서 논쟁 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유일무이한 역사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로부터 진화한 것이다.
역사에 느닷없는 단절은 없다.
변화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는 죽지 않았다.
그 미스테리아는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모습이 바뀌었다.
서구의 영성은 이들 두 위대한 전통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이제 우리의 모든 풍요한 유산의 공통 기반과 그 유산에 대한 권리를 회복할 때가 되었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말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근본주의자들의 반발 압력에 굴복해서 권위주의적인 과거로 회귀해 버린다면, 그리스도교 역사의 쓰레기통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격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인들은 ‘<성서>에 씌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라는 상투적인 말에 굴종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이미 그리스도교는 과거와 같은 지배력을 잃었다.
그러한 지배력의 상실과 더불어 우리 문화는 필사적으로 새로운 영적 방향을 찾아왔다.
그리스도교는 신비한 뿌리로 돌아감으로써만 새로운 물병자리 시대의 새로운 명성을 창조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거짓말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조만간에 그 토대는 반드시 전복될 것이다.
그러나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그리스도교는 신비한 초시간적 진실의 반석 위에서 안식하고 있으며, 과거에 늘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초시간적인 진실과 잇닿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