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선전자, 유세비우스 |
그리스도교의 모든 허구 역사를 최종적으로 조직화하고 종합한 것은 4세기의 유세비우스 주교였다.
그는 ‘교회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니케아공의회에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완전히 바꾼 주교들 가운데 1명이었다.
그는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전기 작가가 되어, 아첨하는 말로 황제의 살인 행각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린 전기를 썼다. 유세비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천국을 다스리듯이, 로마 황제는 문명화된 세상의 정부를 다스리며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시킨다고 신도들에게 설명했다.
황제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 대변자였다!
유세비우스의 임무는 로마의 그리스도교에 적합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진실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를 만들었다.
현대의 고전학자의 말에 따르면 유세비우스의 글을 읽는 것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황당한 문학적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또 다른 현대의 고전학자는 더 퉁명스럽게 그를 ‘고대에 대해 최초로 철저하게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역사가’ 라고 일컬었다. 또 다른 학자는 ‘고의로 시대를 날조’ 했다는 점에서 그가 ‘부정직’ 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학자는 유세비우스의 역사가 ‘피상적’ 이고 ‘고의로 날조한’ 역사이며, ‘자의적이며 마구잡이로’ 만들어 낸 역사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역사가가 옳게 지적한 것처럼 ‘현대의 고전학자들이 유세비우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유세비우스는 교회의 ‘영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을 그리스도교 역사에 포함시켰고, 교회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배제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고백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저술을 더없이 큰 의혹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말을 상당히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한다는 것은 지극히 무비판적인 행위라고 선언해야 한다.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적에만 맞으면 언제든 습관적으로 그의 말을 인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말은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되어 왔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다만 첫 3세기 동안 교회 ‘역사’로 살아남은 글이 그의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 모든 교회 역사가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결국 거짓말이 항구화된 나머지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역사’ 에서 유세비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게 가해진 대표적인 비난을 전부 열거했다. 그는 문자주의자 주교들이 원래의 그리스도교 전통을 대표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의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들의 후계자 계보를 제시했다.
그 계보는 유세비우스 이전에, 아마도 이레나이우스에 의해 날조된 것이지만 유세비우스는 그 계보에 첨삭을 가했다.
그는 계보를 만들며 흔히 이름만 나열했는데, 어림짐작으로 선택했거나 날조한 이름을 역사에 끼워 넣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명백한 잘못이나 모순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는 처음 1세기부터 로마 교회를 주교들이 이끌어 왔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증거는 전혀 없다.
로마에서 그리스도교인 공동체의 지도자가 단 1명이라도 나타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유세비우스는 또 박해를 받아 순교한 그리스도교인의 수를 터무니없이 과장했을 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의 전기까지 집필했는데, 그 전기는 사실상 이교도 순교자의 전설을 베낀 것이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저술 목록을 열심히 만들었는데, 현명하게도 그 저술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걸 언급하면, 그들이나 자신의 생각이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는 젊었을 때 그에게 큰 영감을 준 오리게네스에 대해 기술할 때에도 오리게네스의 사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정통파 공동체에서 오리게네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 대해 말하자면, 유세비우스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게 유린당한 것을 대단히 기뻐했다. 구원자를 살해했으니 재앙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당한 고통을 분명 재미삼아 아주 흉흉하게 묘사한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러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사악하게 대우한 대가였다’.
유세비우스는 하나님이 분노해서 AD 70년에---로마군의 도움을 약간 받아서!---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전에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이웃 펠라 지방으로 안전하게 피신하라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는 또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을 때, 에비온파의 영지주의자 집단 하나만 발견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술했다.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이단자가 될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을 구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 유세비우스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 그는 자신의 허구 이야기가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전혀 양심에 거리낌없이, 예수 자신이 에데사(지금의 터키 동남부)의 왕자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만들어 냈다---그 편지에서 예수는 왕자가 자기를 본 적도 없으면서 구세주를 믿게 된 것을 축하한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로 통용되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전제적인 로마 황제에게 고용되어 아첨을 일삼으며, 200년 전통을 기만적으로 날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