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교회 |
막강한 로마 제국이 결국에는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더구나 또 다른 미스테리아 종교로서가 아니라, 하나이며 유일한 참종교로 수용했다는 것은 역사상 가장 역설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다.
유대 국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로마가 결국에는 유대인 역사를 신성시하는 종교---더구나 로마 총독이 살해했다는 유대인 선지자를 섬기는 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 역사에서는, 이교 신앙의 어둠에서 인간을 빛으로 이끈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이 가장 선호한 종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성공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 채택한 유일한 외래 미스테리아 종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17년 전인 304년에 한신인이 ‘제국의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이 신인은 12월 25일에 기적적으로 태어났으며, 신도들이 상징적인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 죽음과 부활을 기념했다.
이 신인은 다름 아닌 페르시아의 구원자 미트라스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로마인들의 적이자 경쟁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미트라스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상 유대인의 구원자 예수를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는 AD 첫 세기에 로마 제국 전역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절정에 이른 3세기에는 제국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현대 권위자의 말에 따르면 ‘흑해의 제방에서 스코틀랜드의 산맥까지, 사하라 사막의 접경 지대까지’---미트라스를 섬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미트라스 신앙의 기념물을 살펴보면 자유인뿐만 아니라 노예까지도 미스테리아의 입문자가 되었으며, 흔히 그런 노예가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트라스 신앙에서는 실제로 ‘나중에 된 자가 먼저’(마태복음 20:16) 되었다.
2세기 말에 코모두스황제(재위 18-192)도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에 입문했다.
황제의 입문은 로마 세계에서 엄청난 자극제가 되어 교인의 수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코모두스 이후의 여러 황제들은 미트라스 신앙을 제국의 종교로 삼으려고 했다.
로마의 지도자들은 사람에 따라 선호하는 미스테리아가 달랐고, 선호하는 정도도 달랐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티스를 선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라피스를 숭배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오시리스를 받들었다.
엘가발루스는 헬리오스를 섬기는 일신교 신앙을 강화하려고 했다.
점점 분열이 격화되고 있는 와중에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라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마 황제들은 ‘하나의 신앙’을 필요로 했다. 보편적인 종교, 곧 ‘가톨릭catholic’ 종교를 필요로 한 것이다(‘catholic은 ‘보편적’ 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 주).
황제들은 이러한 온갖 종교를 여러 시대에 걸쳐 제시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4세기 전반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스도교는 이상적인 후보였다. 민중들에게는 미스테리아 종교가 항상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미스테리아 종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미스테리아 종교의 지도자들은 신비주의자 이거나 철학자들이었고, 그들은 국가의 권위에 과감히 의문을 제기하며 권위를 훼손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골치 아픈 지성인들을 배제시킨 미스테리아 종교였다. 게다가 이미 권위주의적인 종교가 되어 있었다.
이 종교는 권위를 지닌 자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당국자들이 바라던 종교가 아닐 수 없었다.
신비주의자가 없는 종교, 은밀한 미스테리아가 없는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의 종교,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
321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황제가 되었다. 그가 그리스도교인이 된 동기는 분명 영적인 게 아니라 정지적인 것이었지만,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자신의 개종이 신성한 계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전투 전야에는 그와 ‘모든 군대’가 자정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의 징표’를 보았는데,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스도교인의 십자가가 아니라, 이교도의 상징인 키로chi-rho였다.
하늘에 나타난 그 상징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며 잠자리에 든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 그리스도가 찾아왔다. 자정에 본 상징을 들고 있던 그리스도는 ‘적과의 교전 때 이것을 사용하라’고 그에게 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의 방패에 그 상징을 그려 넣었고, 그리스도가 약속한 대로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그의 말을 믿기로 한다면 ‘평화의 왕자’ 예수는 황제에게 마법 군대의 부적 하나를 건네 줌으로써 고대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제국을 손에 넣은 셈이다. 키로chi-rho 상징은 이교도의 파피루스 고문서에서 비롯한 것으로, 학자들은 예언적인 구절에 이것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 키로가 그리스어로는 크레스톤Creston이며, ‘길조’를 뜻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키로는 그리스도를 가리기는 말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이 상징은 이중의 의미를 지녔다. 이교도에게는 길조를, 그리스도교인에게는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이런 이중 의미는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무엇보다도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때에만 그리스도교를 강조했다.
그가 꿈에서 약속 받은 승리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만들었을 때, 비문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로마 병사들이 이교도의 거룩한 수호자들로부터 신성한 도움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광장에 있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육중한 석상 위에 자신의 두상을 얹어놓게 했고, 그의 모습을 헬리오스와 함께 동전에 새겨 넣게 했다. 그리고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이교도 세계의 최고 사제---라는 호칭을 여전히 사용했다.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인 황제들도 382년까지 그런 호칭을 사용 했다.
대부분의 로마 황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누스는 사악하고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골족과의 전쟁(306-312)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은 짓을 했다.
그가 바르바리(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왕들을 수천 명의 부하들과 함께 야수의 먹이로 던져 주었을 때 이교도들까지도 충격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한 후에도 여전히 사악하고 무자비했다. 325년에 그리스도교인들의 니케아 공의회를 주재한 직후, 그는 자신의 계모인 파우스타와 친아들 크리스푸스를 살해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받는 것을 고의로 연기했다.
계속 죄를 짓다가 마지막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룩한 내세를 보장 받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악명은 로마 교회조차도 차마 그를 성자로 만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그래서 ‘대제(大帝)’ 라는 수식어로 만족해야 했다 : 저자주).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조금 더 먼저 교인이 된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녀는 콘스탄티누스의 계모 살해에 연루된 후 추방이 되었는데, 내친김에 성지 순례에 나섰다.
거기서 그녀는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무덤이자 탄생지인 동굴을 발견했다.
골고다에서 예수와 두 도둑을 못 박은 십자가 3개도 함께 발견했다.
이것은 정말 별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가 못 박혔다는 날로부터 300년이 지나는 동안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유대인이 수천 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처럼 뜻밖에 발견한 성지에 교회를 세웠다. 그곳은 오늘날까지도 성스러운 곳으로 기려지고 있다.
성스러운 십자가 조각들은 제국의 도처에 보내졌고, 가톨릭 교회는 헬레나를 ‘진짜 십자가의 발견자, 성 헬레나’로 기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묘지로 여겨진 성소 부지에 거대한 공회당을 세웠는데, 이 공회당은 장차 로마 가톨릭 신앙의 발전소인 로마 교황청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처럼 그저 문자주의자와 영지주의자로만 분열되어있는 게 아니라, 문자주의 공동체 자체도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가 시작되자마자 그리스도교인들은 동료 교인들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황제의 무릎에 첩첩이 쌓아 올렸다고 한다!(황제는 그것을 모두 불태웠다 : 저자 주)
콘스탄티누스는 신학을 전혀 몰랐다. 사실 그는 이교에 가까운 연설을 해서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그러나 그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강제로 통합시켰다.
니케아에서는 하나의 신조가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도 전세계의 교회에서 그것을 되뇌고 있다. 신조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주교들은 황제가 직접 재판하여 범죄자로 몰아 제국에서 추방시켰다.
동의한 주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손님 자격으로 니케아에 초대 받아 황제즉위 20주년 잔치에 참석했다.
많은 주교들은 동의 서명을 한 후 후회를 했다.
훗날 어느 주교는 황제에게 이런 글을 써 보냈다.
‘우리는 그대가 두려워서 신성을 모독한 글에 서명함으로써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제국은 훨씬 더 무자비한 그리스도교인 황제들의 치하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다만 율리아누스 황제(재위 361-363)가 이교 신앙을 부흥시키려고 한 잠깐의 기간만이 예외였다.
율리아누스는 플라톤 학파의 철학자로 자처했는데, 미트라스와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 그는 하나인 신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찬가를 썼으며 겸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반유대 그리스도교인 교회의 소망대로 그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덕분에 이교 신앙이 잠깐 부흥했지만, 곧바로 그리스도교가 다시 살아나서 훨씬 더 맹렬히 세력을 확대해 갔다.
니케아 신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영구히 분열된 채 신약 논쟁으로 위장된 정지적 내부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권위적 분위기 속에서 패배자들은 파문 당했고,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전하지 못했다.
오늘의 ‘정통’이 내일의 ‘이단’ 일 수 있었던 것이다.
4세기 말경에 프랑스 푸아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는 낙담한 나머지 이렇게 썼다.
매년, 아니 매달 우리는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사소하고 애매한 것을 묘사하는 새로운 신조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한 짓을 후회하고, 후회한자들을 옹호하며, 우리가 옹호했던 자들을 파문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남들의 교리를 저주하거나, 남들이 지닌 우리 자신의 교리를 저주하고, 서로 상대방의 교리를 갈가리 찢으며, 서로의 멸망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 무렵 문자주의자 교인들조차도 로마 교회를 더 이상 그리스도의 계획 완수로 보지 않고, 오히려 ‘반그리스도’의 작품으로 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