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성장 |
전통 주장과 달리, 로마의 박해 때문에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가 국교로 채택한 이후에 비로소 부각되었다.
이때부터 순교는 더 이상 선택 사항이 될 수 없었다.
교인들은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는 고대세계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기 전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채택될 운명을 기다리며, 특히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그런 허구를 처음 날조한 테르툴리아누스(200년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거의 모든 도시의, 거의 모든 시민이 그리스도교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과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좀더 신빙성 있는 오리게네스(240년경)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은 사실상 고대세계의 주민 가운데 소수였다.
첫 몇 세기 동안 교인이 얼마나 많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묘비의 글과 이교도 문헌은 250년 이전의 그리스도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3
세기 초에 씌어진 가장 중요한 역사서 두 권에도 언급이 전혀 없다.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통계 자료는 오직 하나뿐인데, 그것은 4세기의 그리스도교인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남긴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자료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
아무튼 그의 말에 따르면, 251년에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이 ‘1천500명 이상의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았다고 한다.
성직자는 154명이나 되었다---그들 가운데 52명은 귀신을 쫓아내는 자였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250년경에 로마 제국의 인구 가운데 약 2 퍼센트가 그리스도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는 인구의4-5퍼센트까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에도 유세비우스는 전체 성지(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도교인이 사는 마을을 고작 세 곳 정도만 알고 있었다.
AD 첫 3세기에는 교인 수가 증가했지만, 그리스도교인만 증가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세계의 미스테리아 인구가 총체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새 천년에 접어들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종교적 회의주의가 만연했다.
에드워드 기번이 말했듯이 ‘모든 신들이 철학자들에게는 똑같이 참된 것으로 보였고, 정치가들에게는 똑같이 거짓된 것으로 보였고, 행정관들에게는 똑같이 유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젊었을 때 쇠퇴하기 시작했던 신탁이 2세기 초에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테네에서는 전에 완전히 쇠퇴한 디오니소스 의식이 다시 되살아나서 엘레우시스에서의 입문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도 제국 전체에 걸쳐 크게 인기를 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