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과 박해 |
그리스도교 박해의 전통 역사에 따르면, 로마 제국이 이 새로운 종교만을 특별히 증오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로마는 신비주의자, 철학자, 종교적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숙청했다.
그들의 존재가 로마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미스테리아에 대해서는 애증이 교차했는데, 그리스도교는 또 다른 미스테리아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여러 외래 종교의 이국적 영성과 심오한 철학에 이끌리면서도,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급진적인 도전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했다.
예컨대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추종자들은 후대의 예수 미스테리아 추종자들처럼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BC 186년부터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는 로마에서 금지되었고, 이탈리아 전역의 성소가 파괴되었다.
수많은 입문자들이 처형당했고 때로는 한번에 수천 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첫 몇 세기 동안 사실상 로마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다른 철학자는 물론이고,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도 추방이 되었다.
이후의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처럼 많은 철학자들이 전제적인 로마 당국과 타협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형에 처해졌다.
<이교도 순교자 행전>이라고 불리는 한 문헌은 그렇게 박해 받은 입문자들의 용기와 고결함을 찬양한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를 비웃으며’ 화형장으로 끌려가 ‘불길 속에서 의연하게’ 죽어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에 따르면, 맨 처음부터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인의 박해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3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교인들은 공식적인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특정 도시의 몇몇 개인에 한해서만 박해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특별한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억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2세기에 트라야누스 황제는 총독 가운데 1명이 문의한 것에 대해 이렇게 지시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마땅히 정식 재판을 받아야 하며, 익명의 공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재판이 이루어져서 안된다고.
그리스도교인을 ‘쫓아내는 것’도 안 되며, 고발인은 고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AD 250년에 역병이 고대세계를 휩쓸며 수많은 사람이 죽자 상황이 달라졌다. 로마 제국은 붕괴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불운의 희생양이 되었다.
데키우스 황제는 제국의 번영과 건강을 위해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신들에게 제사지낼 희생 동물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해 최초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는 1년 만에 끝났지만, 257-259년 발레리아누스 치하에서, 그리고 303-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박해가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박해를 받은 기간을 모두 합하면 5년 정도이다.
이러한 박해의 규모는, 심지어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의 소위 ‘대박해’의 규모라는 것도, 그리스도교 선전자들이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3세기 중반의 글에서 오리게네스는 신앙을 위해 죽은 ‘몇몇’ 그리스도교인을 ‘손꼽을’ 수 있다고 썼다.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받아 순교한 그리스도교인은 남자 10명 여자 7명뿐이었다!
로마 총독들은 흔히 그리스도교인들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강제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그리스도교인들은 타협책을 제시 받았다.
그들이 희생제의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면 분향만 하는 것을 제안 받았다.
한 총독은 순교자가 되려는 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너는 며칠 만이라도 생각해 볼 시간조차 갖고 싶지 않단 말이냐? 세상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지 너는 알지 못하느냐?
네가 자진해서 죽는다면 대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
총독이 이렇게 하소연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순교를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 자신이었다.
한 교인 집단은 아시아의 총독을 찾아가서 자신들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총독은 거절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벼랑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는 것은 자유라고 총독은 말했다!
영지주의자들처럼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처럼 순교를 자청하는 것이 깨달음을 통한 운명의 수용이 아니라 공허한 작태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기꺼이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에서 비롯한 일이어야지, 그리스도교인들처럼 단순한 고집에서 비롯한 일이어서는 안 된다.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며, 비극적인 것도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사려 깊은 판단에서 비롯한 일이어야 한다.
일부 로마 황제들은 사실상 그리스도교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흥미롭고 이국적인 미스테리아 종교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세베루스 알렉산더(230년대)는 자신의 개인 성소에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여러 신인들 석상 곁에 그리스도의 석상을 모셔 놓기까지 했다.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이교도 철학자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교 철학자인 오리게네스의 후견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