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가난 |
예수는 신도들에게 겸손하고 가난해지도록 애쓰라고 가르친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12사도를 내보내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면서 전파하며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의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복음 10:7-10). 그렇게 행한 사도들은, 영적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유랑을 한 이교도 견유학파의 철학자들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1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흔히 눈에 띈 모습 가운데 하나는, 누추한 옷을 입고 구걸 행랑을 짊어진 채 가시 지팡이를 든 견유학파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설교를 했는데, 일상어로 고매한 사상을 전파했다.
예수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 그들도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이곳 저곳을 유랑했다.
견유학파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모두 누추한 옷을 입었고, 모두 그들의 종교를 ‘길Way’ 이라고 불렀다. 에픽테토스가 견유학파인물 1명을 묘사한 다음 글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보낸 전령이다. 그는 선악에 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잘못 알고 있다고, 있지도 않은 곳에서 선악의 진리를 찾고 있다고, 진리가 진정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다고.
그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는 비극의 무대에 올라선 듯이 감동을 고조시키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한다.
‘오, 인간이여 ,그대는 어디로 실려 가는가? 그대는 무엇인가? 그대 비참한 자여! 장님처럼 그대는 이리지리 헤매는구나 그대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대는 있지도 않은 곳에서 평화와 행복을 찾는구나 평화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누군가 가르쳐 준다 한들, 그대는 믿지 못하는구나’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의 겸손이 이교도 성자들의 자발적인 겸손을 억지로 모방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분개해서 이렇게 말했다.
놀랄 거야 없지만, 그들은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들의 경우에는 이 미덕의 필요성을 따진다.
이 점에서 그들은 또다시 플라톤의 숭고한 사상을 타락시킨다.
그들은 철학자들의 말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을 왜곡시켜서 예수가 처음 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는 예수가 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들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리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마태복음 19:24).
하지만 우리는 플라톤이 더욱 순수한 형대로 그런 생각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플라톤은 말했다 ‘유난히 선한 사람이 유난히 부유해지기는 불가능하다’
이 말이 예수의 말보다 더 고무적이지 아니한가?
예수의 가르침이 독창적이고 차별적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켈수스가 비판한 것은 정당했다. 예수가 가르친다. ‘너희의 보물을 하늘에 두어라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할 수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2:33).
마찬가지로 켐스토스는 이렇게 권고했다.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 갈수 없는 것을 소유하라. 예수가 세계의 왕인 것은 그가 만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명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스토아 학파의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유일한 참왕은 현자이다’.
예수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지, 혹 저물때 올지, 밤중에 올지, 닭울때 올지, 새벽에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마가복음 13:35-36).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썼다.
‘언제든 배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말라. 너희가 없을 때 주인이 너희를 부르는 일이 없도록’.
예수는 가르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마가복음 10:15).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썼다.
‘왕국은 어린이의 것이다.’
예수는 가르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18).
4세기 앞서서 플라톤은 하나님God을 ‘선Good’으로 정의했다.
그러한 정의에 따라,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선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수와 비슷한 어조로, 피타고라스는 자기가 현자로 일컬어지는 것을 거부하며,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피타고라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 곧 ‘철학자’라고 자신을 일컫기를 좋아했다.
---철학자philosopher라는 말은 그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