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개신교를 떠난이유(1) -머릿말, 믿음 (어느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의 이야기 정리)



나의 기독교 경험담

내가 개신교를 떠난이유(1) -머릿말, 믿음 (어느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의 이야기 정리)

엑스 0 3,171 2002.08.05 13:24
내가 개신교를 떠난이유
 
머리말

2000년 11월 나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개신교는 지금까지 나의 인생, 30여 년 동안의 종교의 전부이었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2대째 교인이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내 나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여 후에 신학교를 설립하신 분이다.
내가 개종을 결심하기까지에는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다. 부모 형제에게 미안한 마음은 물론 내 주위의 개신교를 믿는 많은 소중한 이들에게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양 관행에 젖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신앙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또 그로 인한 갈등을 계속 겪으면서 그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는 것 또한 이 못지않은 고통이기에 개신교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 개신교는 교리적으로는 믿음과 자신의 구원문제에만 초점이 모아져 있는 듯하다.
믿음과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면죄부와 천국의 입장권을 파는 데만 열중했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명을 통해, 예수님이 강조하신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 대한 배려(사랑)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또한 교회는 전도라는 명분으로 오직 교세확장에만 몰두하고 있다. 전도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되다 보니 복음의 정신은 이미 실종된 상태이다.
그들의 교리와 교회는 하나님과 같이 완벽하기에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자만과 자신들만이 절대자에게 선택받은 종교이고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의인이라는 자가당착과 편협, 오직 예수의 이름만 부르짖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천당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맹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개신교에서 지금이라도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의 순수한 기운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신학이나 교리가 옳건 틀리든 하는 문제를 접어두고라도 신학이든, 교리든, 교회든, 목사든, 제도든, 무엇이든지 현실 기성교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실질적으로 평신도의 신앙생활에, 교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왜곡된 믿음이나 신앙생활을 세상에 합리화하고 유도한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흔히 경험하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특정 교회나 목사를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1. 믿음

이는 내가 들은 이야기다.

[L씨는 내가 전에 근무했던 회사의 상사이었다. L씨는 기독교 재단인 연세대를 졸업하였으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라는 말을 꺼내는 것도 싫어한다. 그렇다고 특히 다른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왜 교회라는 말을 싫어하느냐고 물으면 자기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위선이 아주 싫다는 것이다. 자기의 친구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너는 남들과 똑같이 못된 짓을 다 하면서 어떻게 교회는 다니느냐"고 물으면 그 친구는 "나는 늘 교회에 가서 용서를 받으니 그 죄가 쌓이지 않지만. 너는 그 죄가 더 쌓인다"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이 되는 얘기냐는 것이다. ]

문민정부 시절에 비리로 구속된 많은 고위공직자와 장성의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얼마 전 떠들썩했던 고급 옷 로비 의혹사건에 연루된 여인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스스로 내세우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같은 이중적 경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서 못된 짓을 하라고 가르칠 리 만무하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우다보니 현실적으로 자신의 행실과 구원은 별개의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일부 개신교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대비시켜 상대적으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행위는 부수적인 개념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믿음과 행위를 독립된 개념으로 취급하며 상대적으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믿음과 행위의 일체성을 간과하고 있다.

내가 다녔던 많은 교회에서도 성서공부에서 한결같이 믿음에 대해 가르치기를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며,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표현도 중요한 것이라는 점에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이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이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예수가 직접 예기했다는 복음서나 고린도 전서에도 잘 나와 있다.

자신이 거듭났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개신교 교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을 의심하거나 비방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이것이 그들의 중요한 신앙체험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이 같은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온 교회가 다 알도록 소문을 내며 다니는 거듭난 사람이 실상 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술을 안 먹는 정도, 또 목사님 부부를 자주 대접하는 정도가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이다. 오히려 전에는 인간적으로 건방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신앙적으로도 교만해졌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나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듭나는 것도 이렇게 중계방송을 해야하는 것인지,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신앙적으로 교만해 질 수 있는지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런 것이 과연 바람직한 신앙인지 의문스럽다.

'믿쑵니다!' 외치며 눈물을 흘리고는 자신이 참회했다고 믿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내적으로부터의 참회라기보다는 대단히 수동적이고 강압적인, 혹은 의도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마치 태어난 대로의 얼굴을 거부하고 메스와 실리콘으로 자신의 얼굴을 조각하듯, 외부로부터 마음을 억지스럽게도 조각해 나가는 듯이 보인다.

그들의 말대로 회개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면 세상은 지금 같지 않을 것이다. 회개를 하되,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옆 사람을 시샘한다면 그 참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거리에서, 혹은 지하철에서, 혹은 바로 우리집의 대문으로 붙들려 나와 "자매님, 형제님 회개 하십시오" 라는 주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온듯하고, 그 성스러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도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은 신자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음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1647년 기독교사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미 구원될 인간을 정하셨기 때문에, 인간 자의에 따른 믿음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한다. 스스로 교회에 나가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성경책을 읽고, 심지어 마음으로 우러나는 참회를 하여도 하나님은 굽어봐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우주 창조의 복안(Grand Design)에 따라, '하나님에 영광을 더하기 위하여(in majorem gloriam Dei)'
그 도구로서 인간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있는 성경해석이 당시 유럽 기독교 사회에 미친 영향이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근세 유럽사회는 '한없는 고립감(Sense of Isolation)'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성경해석이 아직도 유효한 것이라면(이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모순이던가. 종교만큼 세상과 영합하고, 그 태도를 표리부동해온 것이 또 있으랴. 절대의 종교가 정세에 따라 목소리를 바꾸고, 인간의 판단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나님의 뜻을 짐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우리가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만나는 전도자들은 대단히 주제넘은 사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넘겨짚는 대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친구아내의 어머님이 남묘효렌교를 믿다 돌아 가셨는데 물론 그 친구는 개신교신자이다. 장례식 때 개신교 목사가 “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셨기에 필시 지옥에 가셨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회개라는 것 역시 인간적인 것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행실은 제쳐놓고 지나치게 믿음만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믿음의 구두 표현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고 마는 것이다. 나는 신앙이란 전 인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으로만 시인하고 행실은 그와 동떨어진 것은 신앙이 아니다. 개신교인이라면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가장 경계하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카톨릭과는 달리 예수가 직접 말했다는 복음서보다는 사도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쓴 로마서의 말씀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복음서의 비중이 전서 혹은 후서의 비중보다는 높다고 생각한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직접 적은 기록임에 반해 전서나 후서는 그의 제자들이 전도과정에서 각 교회에 보낸 서신형식의 글이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정수된 것으로 평가받는 요한복음 제14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12절).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말을 지키라(15절). >

나는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각 교회에 보낸 서신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적었다는 복음서의 구절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믿음, 참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그대로 행하고 그리스도의 말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린 믿음에 대한 정의이기 때문에...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의 대속(대신 속죄함)을 믿으며 그가 창조주인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다. 이런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의해서도 그 타당성이 증명되는데 마태복음 제7장 구절을 보면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21절). 내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든든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24절).>

여기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구원과 동일한 의미임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자신을 주님(=창조주)이라 부른다 해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라 부르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듣고 실행하는 일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라는 앞서 인용한 요한복음의 말씀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박애정신으로 귀착된다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제5장 44, 45절은 이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만 사랑을 논한 것이 아니고 실천으로 이를 보여 주었다. 누가복음 제23장 34절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려는 총독 빌라도 등을 위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때의 사랑이란 형제들간의 즉 크리스찬간만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47절의 말씀으로도 명확해 진다.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비유대인 혹은 비기독교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랑이란 성경에서 간혹 등장하는 선행 혹은 율법의 준수라는 개념보다는 휠씬 차원이 높고 폭넓은 것으로 이해된다.

믿음을 강조한 로마서에서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사랑은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는다. 사랑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채우는 것이다. 사랑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율법이다.>라고 하여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 말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나 비록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라고 하면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이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라고 하여 사랑의 중요성을 오히려 믿음보다도 우선하는 가치로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인간간의 신뢰감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여기서의 믿음은 곧 종교적인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요한일서에서는 <만일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지옥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겨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제3장 13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4장 21절)>라고 해서 사랑 그 자체가 곧 구원이라고까지 가르치고 있다.

한 마디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할 때에도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 그리고 그분의 대속을 믿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대로 그리고 말씀한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100% 완전하게 행한 대로> 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씀과 행동을 따르려는 강하고 진실된 의지가 있어야 함과 동시에 가능한 한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실행을 해야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구원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의 말씀이 이러함을 볼 때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 없이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 이라고....

그러므로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주님의 뜻으로 믿고 둘째, 그리스도가 행한 대로 행한 자 즉 사랑을 베푸는 자만이 천국(하늘나라)으로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성경을 들고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행한 대로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개신교인)으로서의 책무가 그들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날까?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 일에 많은 희생이 따름과 동시에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한 사랑이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구원을 원하는 크리스챤들이 다른 사람들(종교적 이방인 곧 비기독교인들)과는 다른 생활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지도자들과 크리스챤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편리한 구원의 방법(그 방법은 전반부에 서술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을 설정해놓고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대부분이 또 그렇게 믿고 있다. 너무도 쉽게 구원을 받으려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로마서의 말씀만 중시할 뿐 복음서나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이상할 정도로 도외시하고 있다.

즉 개신교는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서신(로마서...)을 믿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개신교에서 행위와 대비하여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점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하면 행위 없이 믿음이 완성될 수 있는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교회에서 의도적으로 잘못된 신앙을 가르칠 리는 없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결과적으로라도 예수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교회의 가르침이 신도들의 신앙에 미치는 결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바른 믿음이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 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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